중국에서의 과거 인연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한 것이 199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994년, 나는 중국에서 사업을 해보기 위해 서울과 베이징을 자주 오갔다. 무려 28년 전의 일이니 나 스스로도 놀란다, 옛날 일이지만 당시의 일들이 여전히 생생해서 다시 한 번 놀랍다.
중국 현지에서 적지 않은 중국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유로 만나 親交(친교)했다. 무역상, 공직의 관료, 은행의 고위 간부, 중국 공산당원, 사업가, 대학교수, 기자, 예술가, 소설가 등등, 심지어는 현지 흑사회 조직의 중간 보스와도 제법 친하게 지냈다.
현지에서 놀란 것은 내가 중국어 회화만이 아니라 한문에도 능한 것을 알고 나면 은연중에 존경과 존중의 눈빛과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한문은 너희들 것인데 왜?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곧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한문을 古文(고문)이라고 해서 특별히 古典(고전)을 전공하지 않은 이라면 거의 모른다, 게다가 내가 英語(영어)까지 할 줄 안다는 것까지 보태져서 중국에서 나는 전혀 뜻밖으로 초일류 知識人(지식인)의 대우를 받았다.
어려서 중국 무술 도장을 몇 년 다니면서 華僑(화교)였던 師父(사부)님으로부터 漢文(한문)과 중국말을 배웠으니 새삼 사부님의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다.
중국에서 친교란 으레 유명 식당에 가서 술을 곁들여 식사하거나 아니면 노래방에 가는 게 기본이다. 노래방에선 영어 팝송도 불렀고 조용필의 노래도 불렀으며 특히 ‘영웅본색’ 등의 홍콩 영화 주제가를 부르면 더 많은 박수를 받곤 했다. 외국인이 저희들 말로 노래를 하니 당연한 일.
아쉽게도 중국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인연을 맺은 중국 친구들 상당수는 내가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꽤나 길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더러 중국 친구가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고 또 중국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시진핑이 주석으로 올라선 이후, 거의 동시에 연락이 끊어졌다. 현지 사정이 그러하니 당분간 연락하기 조심스럽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만나는 날까지 잘 지내라는 작별의 메일을 받기도 했다.
중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절망한다.
나 호호당은 중국 그리고 중국인들에 대한 많은 애정이 있었기에 실망도 크다. 오늘날에 이르러 중국에 대해선 거의 절망하고 있다.
오늘은 중국인들의 좌절에 관한 얘기이다. 하지만 언젠가 중국이 다시 자유로워지고 다시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메인 멜로디'란 말
중국에는 主旋律(주선율)이란 단어가 있다. 영어로 Main Melody 라고 번역이 된다. 꽤나 이상한 단어이고 공식 용어도 아니고 중문 위키에도 없다. 하지만 중국인이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작 그 내용을 알고 나면 ‘아, 그래서 중국은 중국이구나!’ 싶다.
주된 선율, 메인 멜로디란 뜻의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중국의 주된 사상, 즉 중국 공산당의 사상 또는 공식 정책을 말한다. 따라서 중국 사회주의 자체이자 최근엔 ‘중국특색사회주의’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끔찍했던 문화대혁명
중국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인민민주독재’를 위한 이른바 무산계급문화대혁명, 줄여서 문혁이란 것을 했다. 당시 절대 권력자 마오쩌뚱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政敵(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투쟁으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엔 젊은이들의 狂氣(광기) 그 자체가 원동력이 되어 엄청난 학살과 파괴가 10년 이상 이어졌던 것이 문혁이다. 통제되지 않는 사회가 보여준 極左(극좌)의 광기였다. (젊은이는 순수하지만 그렇기에 자칫 더 잔인할 수 있다.)
피해는 끔찍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공산독재 정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했던 공산당원은 물론이요 수많은 지식인들까지 자본주의자 또는 수정주의자란 딱지가 붙여진 뒤 무지막지한 자아비판과 함께 조리돌림을 당한 뒤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했다. 학살은 중국 전역에서 발생했고 사망자의 추정치는 적게는 수십만에서 2천만 명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모든 舊習(구습)을 타파한다는 명분 아래 중국 역사 수 천 년에 걸친 막대한 양의 역사 문물과 미술품, 예술품, 공예품들이 파괴되었다. 만일 타이완으로 도망친 장개석이가 알짜배기 엑기스 문화재를 타이베이의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보존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깡그리 멸실될 뻔 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마오쩌뚱이 죽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덩샤오핑이 1981년 권력을 잡으면서 문혁은 비로소 완전히 끝이 났다. 문화대혁명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극좌의 집단 히스테리였고 파괴 행위였다. 중국인들 스스로도 이 기간을 십년동란, 즉 10년에 걸친 일대 혼란과 파괴의 시기였다고 부를 정도이다.
문혁의 후유증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그 트라우마(trauma)는 지금도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치유될 수 없는 상흔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문혁 이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자신의 간판인 실용주의를 내세워 나름 중국을 잘 이끌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외부 세계 특히 미국과 서방권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알게 된 중국 청년들의 기대와 요구는 급격한 민주화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문혁에 대한 일종의 反作用(반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천안문 사태로 인해 중국의 민주주의는 싹이 잘려버렸으니
실용주의의 덩샤오핑이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와 공산당의 권력을 내려놓고자 하는 이는 아니었다. 이에 결국 천안문 광장에서 급격한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외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을 탱크 사단을 동원해 진압해버렸으니 이게 바로 1989년 6월의 “천안문 사태”이다.
또 다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타이완과 홍콩에선 이를 “천안문 도살”이라 부른다.
잠시 피었다가 져버린 꽃들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은 1981년과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1989년 사이의 8년 동안 중국에선 자유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다양한 운동과 움직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등장한 개성 있는 중국 영화와 그 감독들을 “5세대 영화”라 부르고 “5세대 감독”이라 부른다.
천카이거와 장이머우 등이 그들의 대표 주자이다. 모두 최고 엘리트 코스인 북경영화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이다. 그런 그들이 만든 영화로서 ‘황토지’, ‘붉은 수수밭’, ‘현위의 인생’, ‘패왕별희’ 등은 베를린국제영화제 등등 글로벌 세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수상도 했다.
5세대 영화들을 보면 감독들의 조국 중국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중국공산주의의 모순과 특히 문혁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 감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덩샤오핑의 중국 공산당은 공산체제에 대한 약간의 건설적인 비판은 수용하되 그 정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선 안 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주선율이 지배하는 중국 사회
이에 중국 공산당은 主旋律(주선율)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어디까지나 중국 사회의 메인 멜로디 즉 메인 테마이고 주제이다. 하지만 약간의 사이드 멜로디나 곁다리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인정은 해주겠다는 것이다. 약간의 다양성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주선율 영화는 주로 간단히 말하면 “국뽕” 영화라 보면 된다. 그리고 정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해준다. 이에 5세대 감독들은 처음엔 영화의 방향을 살짝 비틀었다. 영화 속에 나름의 비판적인 코드와 상징을 은밀히 삽입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심한 통제를 받게 되자 5세대 감독들은 미국 등지로 정치적 망명을 하기도 했고 아니면 사상적 轉向(전향)을 강요받았다.
천카이거는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가 결국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전향을 했다. 장이머우 역시 전향을 한 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행사연출의 총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 모두 오늘날 중국 문화 권력의 태두이자 권위 있는 원로로서 영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천카이거는 1952년생이고 1980 庚申(경신)년이 입추였고 2010년 庚寅(경인)년이 입춘 바닥이다. 장이머우는 1950년생이고 1987 丁卯(정묘)년이 입추였고 2017 丁酉(정유)년이 입춘 바닥이다.
그들이 활발하게 영화예술을 꽃피웠을 때는 그렇기에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였다. 1993년의 영화 “패왕별희”가 사실상 마지막 5세대 영화였고 그로서 끝이 났다.
중국 친구의 통렬한 심정 토로
중국에 있는 친구가 20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해준 이야기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친구는 중국 고향 동네에서 이른바 호족 세력이다. 사촌형은 공산당원이고 친형은 사업가이며 사촌 동생은 세무공무원이며 자신은 무역업자, 또 사촌 동생은 경찰 간부, 이런 식으로 중국 사람들은 집안 전체가 하나의 안전망을 형성하고 살아간다. 중국에서의 삶은 뒷배가 없으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한 내용은 대략 이랬다.
그런데 말이야, 여긴 서울이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야. 공산당 지역 간부인 우리 사촌형이 하는 말인데, 공산주의는 우리 가문이 살아가고 보호받기 위한 일종의 甲冑(갑주)라고, 그런데 내심으론 공산주의를 진짜 싫어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어.
중국은 모두가 공산당 독재를 싫어하지만 공산당이 붕괴하는 것도 정말 무서워해, 엄청난 혼란과 학살이 일어날 것 같아서 말이지. 하지만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는 비판을 용납할 수 없어, 겉으론 모두 찬양하는 척 하고 속으론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우리 중국인들의 운명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
우리 중국은 矛盾(모순)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물질적으론 좋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눈을 뜨면 너무 괴로워. 나도 그냥 돈이나 많이 벌어서 잘 살고자 노력할 뿐이야. 어쩔 수가 없어.
천카이거도 장이머우도 아마 그런 심정이지 않을까 싶다.
나 호호당은 중국을 사랑했었다, 아직도 그 사랑은 미처 식지 않아서 중국을 미워한다. 다른 나라 사람인 나마저도 그러하니 중국인 스스로 얼마나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고 또 사회 체제를 원망하겠는가.
주선율밖에 없는 중국 사회
최근 중국에선 主旋律(주선율), 즉 ‘국뽕’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전 세계로 울려 퍼지고 있다. 사이드 멜로디는 아예 사라졌다. 주선율을 제외하면 오로지 비현실적 환타지만이 인민들의 삶을 위로해준다. 시진핑이가 중국몽, 즉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꿈을 외치면서 1인 독재의 황제가 된 뒤론 더욱 그렇다.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중국의 양들은 아직도 내 귓전에서 매일 밤 울어대고 있다. 언제 과연 저 울음이 그칠까?
(중국의 이야기를 약간 소개하려면 너무나 긴 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냥 몽땅 줄였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다면 그건 나 호호당의 탓이다.)
알림: 당초 나 호호당이 나가서 방송될 예정이었던 라디오 프로그램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이 2회분에서 1회분으로 압축이 되었다. 너무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면 부담이 되었던 모양인지 PD 님으로부터 양해 전화가 왔었다. 오후 3시 반과 저녁 9시 반에 방송되고 다시 듣기도 가능하다는 점 알려드린다.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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