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을 특별사면·복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지 4년 9개월 만인 오는 31일 풀려나게 된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은 1997년 12월 22일 고(故)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특별사면·복권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24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면은 연말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정해졌다. 명분 역시 ‘국민 통합’과 ‘국난 극복’으로 동일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우리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딛고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며 “특히 우리 앞에 닥친 숱한 난제들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국민 통합과 겸허한 포용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IMF 사태 직후 1997년 특별사면 때 당시 청와대가 “국민 대통합을 이뤄 경제난국 극복에 국가 역량을 총집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던 이유와 비슷했다.
이날 청와대 관계자는 “선거 관련 고려는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밝혔으나, 향후 정치적인 파장은 작지 않을 전망이다. 대선 종료 후 이뤄졌던 전·노 전 대통령 사면과 달리, 이번엔 대선을 단 68일 앞둔 시점에 박 전 대통령이 풀려나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이번 사면은 어떤 형태로든 내년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다.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이 주목받는 것은 그가 가진 보수 진영 내 영향력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층은 탄핵 2년 뒤 열린 2019년 2월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전당대회에서 황교안 전 대표 등 ‘강성 친박’ 지도부를 출범시킬 정도로 결집력이 강했다. 이들이 다시 움직이면 내부 갈등이 켜켜이 쌓인 국민의힘이 내홍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24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윤 후보는 “우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을 늦었지만 환영한다”며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빨리 회복하길 바라겠다”고 밝혔다. 국회사진기자단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박 전 대통령과 악연이 깊다. 국정농단 사건 특검의 수사팀장으로 박 전 대통령의 실형 수감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준석 대표와 권성동 사무총장, 임태희 선대위 총괄상황본부장, 원희룡 선대위 정책본부장 등 국민의힘 핵심 인사들도 과거 박 전 대통령과 대립했던 ‘비박계’로 분류된다.
이에 대해 김형준(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결과적으로 사면으로 인해 보수가 분열될 가능성이 커졌다”며 “특히 윤 후보 참모 중에 ‘친이명박계’가 많은 상황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함께 사면하지 않은 것은 다소 전략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야권에서 특히 우려하는 건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대선에 개입하는 경우다. 박 전 대통령이 윤 후보를 강하게 비판하면 강성 보수층이나 대구·경북 지지율이 빠질 수 있다. 반대로 윤 후보 지지를 호소하면 중도층 민심이 요동치게 된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국민의힘이 탄핵의 강을 겨우 넘었는데 다시 분열의 늪, 탄핵의 늪에 빠지게 될 수 있는 이슈”라며 “(여권이) 마치 부비트랩을 세게 숨겨놓은 듯하다”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박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TK(대구·경북) 신당의 등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박 전 대통령이 복권되면서 정치 활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선 후보가 “박 전 대통령 명예회복”을 전면에 내걸고 출마한 상태고, 과거 친박연대의 성공 사례도 있다. 다만 신율(정치학) 명지대 교수는 “진영 내 찬반이 거세게 맞붙을 정도로 박 전 대통령 지지자가 많아야 진영 내 분열이 나타나는 건데, 박 전 대통령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성공 가능성을 낮게 전망했다.
여당이라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당장 호남을 비롯한 핵심 지지층들의 술렁거림이 심상치 않다. 이날 사면 결정 발표 직후 당내 강경파로 꼽히는 김용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국민통합은 국민이 정의롭다고 판단해야 가능하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출했다. 친여권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는지 자괴감이 든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스마트강군, 선택적 모병제' 국방 정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이 후보는 이날 박 전 대통령 사면에 대해 “국민통합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고뇌를 이해하고 어려운 결정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뉴스1
하지만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이 후보가 이날 “현실의 법정은 닫혀도 역사의 법정은 계속됨을 기억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문 대통령과는 일정 정도 거리 두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건의한 게 아니지 않으냐. 반발하는 지지층도 ‘대통령이 저렇게 물러서 되겠냐’며 이 후보를 찍을 것”(김형준 명지대 교수)이라는 설명이다.
박 전 대통령의 사면 사유 가운데 건강 문제가 있다는 점도 여권 타격이 작을 거라고 분석되는 근거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박 전 대통령 사면 이유 가운데 건강 이슈가 있었기 때문에 (여당 지지층) 선거 참여가 줄어들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특히 이 후보가 최근 통합적 행보를 보이는 흐름과 크게 보면 사면이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업체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 많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건강 문제라서, 사면을 안 했으면 외려 보수층이 결집하거나 중도층 내 동정 여론이 퍼졌을 것”이라며 “윤 후보는 ‘탄핵의 강’ 이슈가 다시 떠오르면 최대 7~10% 포인트까지 손해를 볼 수 있지만, 이 후보의 타격은 많아야 3~5% 포인트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이번 사면 결정의 전략적인 측면이 부각되면,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치컨설턴팅 그룹 ‘민’의 박성민 대표는 “최근 윤석열 후보가 온갖 악재와 실수로 지지율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국면이 전환될 수 있다”며 “보수 진영에서 윤 후보에 대한 비토 심리가 커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걸 노린 정권의 의도가 부각되면 외려 보수 진영이 결집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특별사면 대선주자별 입장 https://www.joongang.co.kr/election2022/issues
오현석·남수현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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