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10. 05
왜 사느냐?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압도적인 허무와 싸우면서 실낱같은 의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숨을 이어가는게 인생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의 작은 전환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 사이에서의 커다란 도약이라야 한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보는 자가 있다. 둘 사이의 나란함이 있다. 상호작용이 있다. 보이는 것은 자연이다. 보는 자는 인간이다. 둘 사이의 게임은 문명이다. 여기서 방향성과 기세를 찾아야 한다. 방향성이 진보라면 기세는 의리다. 진보는 함께 하고 의리는 개인의 몫이다.
자연과 인간과 문명은 원래 있는 것이고, 진보는 남들이 하니까 묻어가는 것이고, 의리는 남이 안하므로 내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서구사상은 진보를 가르치되 의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반대로 동양사상은 의리를 가르치되 진보를 가르치지 못했으니 피장파장이다.
미국식 히어로물과 일본식 허무주의가 망한 이유는 이야기의 결말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사느냐?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기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다. 모든 이야기는 히어로의 변형이다. 뭔가 힘을 얻거나 동기를 획득한다.
누가 나를 해코지 해서 내게 복수할 명분이 생긴다. 절대적 히어로냐 상대적 히어로냐의 차이뿐 본질에서 같다. 무언가 지갑을 주우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난을 당하지만 영웅의 솜씨를 보여줄 찬스다. 결말을 짓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겉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주인공이 세상과 톱니가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안해도 되는데 왜 하지? 히어로는 출동할 이유가 없다. 외계인은 침략해 오지 않았다. 내게 돌아올 몫이 없다.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재난이 찾아오길 기다려야 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큐브에 갇혀 있다거나, 무인도에 버려져 있다거나, 감옥에 갇혔다 하는 식으로 계기는 외부에서 주어진다. 캐스트 어웨이든 쇼생크 탈출이든 그러하다. 외부에서의 강한 힘에 의해 주인공은 어떤 낯선 공간에 결박된다. 탈출하는 미션이 주어진 것이다.
항상 적이 선수를 치고, 운명이 선수를 치고, 주인공은 후수가 된다. 주인공은 나설까 말까 고민하다가 악당의 공격이 도를 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곤 한다. 내가 능동적으로 말을 걸어야 진짜다. 왜 항상 세상이 먼저 내게 말을 거는가? 남이 먼저 시비걸고,
함정에 빠뜨리고, 해코지를 하고, 거인이 진격해 오고, 외계인이 침략해 오고 하는건 시시하다. 내가 먼저 세상에 말을 거는 힘이 주어져야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것이 의리다. 유비가 가만있는데 장비가 와서 말을 건다. 오늘부터 네가 형 먹어. 관우녀석도 끼워주자구.
그것이 의리다. 성기훈이 딸을 만나기 위해 게임에 나서는건 헐리우드식이다. 타의에 의해 끌려간다. 조상우의 어머니와 강새벽의 동생을 챙기는 것은 먼저 말을 거는 의리다. 일본만화의 좋은 소재라도 한국인이 손을 봐야 완성된다. 한국인은 말을 걸 줄 알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가 꼬인 것은 일본이 말을 걸 줄 모르는 츤데레 민족이기 때문이다. 침략은 일본이 먼저 한 것이다. 미국에게 말을 걸 줄 몰라서 본의 아니게 진주만을 습격해 버렸다. 한국이 시비를 걸어준 것을 고맙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이 아니면 일본은 지구와 겉돈다.
주인공 성기훈이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신 죽어줄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의리가 인류문명의 마지막 빈 칸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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