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17. 12:22
사색과 독서를 마치고
봄날이 이어지고 있다.
11월 소설부터 2월 우수 전까지 석 달 동안 꽤나 많은 생각과 독서를 했다. 이번엔 주로 불교 철학이었다. 대승오온론부터 시작해서 아비달마구사론, 나중엔 난해함의 극치를 달리는 대승기신론과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소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 번 고생해가며 읽어 보았다.
고생했다는 말인 즉 여전히 이해가 부족하다는 얘기. 혼자만의 힘으론 부쳐서 일본 불교학자들의 국내 번역서도 여러 권 함께 읽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꾸러미로 꿰어내지 못한다.
바깥으로 나가야지
겨울 동안 그림 작업은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화실을 정리하고 화구를 닦았다. 양기 뻗치는 봄날이 왔고 곧 개나리와 목련이 만발할 때가 왔으니 어찌 마냥 사색에 빠져있을 수 있으리. 슬슬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오면 내 속으로 침잠하고 봄이 와서 땅이 풀리고 남풍이 불어오면 내 속의 그림벌레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이르다. 봄비라도 한 번 흠뻑 대지를 적셔주어야 호호당의 수채화도 물을 머금을 것 같으니 말이다. 水彩畵(수채화)는 물이 있어야 한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서시
봄비 얘기를 하니 “캔터베리 이야기”의 序詩(서시) 중에서 첫 네 문장이 떠오른다. 현대 영어 버전으로 외우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라서 서시 전체를 그냥 풀어서 얘기해본다. (평생 연구해봤지만 외국의 시는 그냥 그 자체로서 읽고 음미해야지 번역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럴 뿐 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4월이 되자 감미로운 소나기 흠뻑 내려서 메말라 있던 대지의 밑바닥까지 적셔놓으니 세상 모든 나뭇가지들은 그 물을 잎맥을 통해 다시 빨아 올려 꽃들을 피워 올리고 마침 불어오는 西風(서풍)은 그 달콤한 입김을 삼나무 밭 어린 가지의 끝 속으로 불어넣고 있다, 이제 막 여정을 출발한 태양은 白羊宮(백양궁)의 절반을 갓 지났으니 작은 날짐승들이 저처럼 쉬지 않고 지지배배- 노래를 하는 것은 자연이 그들의 가슴을 마구 설레게 해서 밤에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도록 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이 순례를 갈망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지, 성지순례자들은 먼 異國(이국)에 마음이 쏠리니 이는 먼 나라 여러 고장마다 널리 칭송되는 성인들의 묘소를 찾으려 함이라, 특히 영국에서는 마을마다 앞을 다투어 캔터베리로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이는 병들어 고생할 때 그들을 도와준 거룩하고 복된 순교자를 찾아가기 위함이라.
“캔터베리 이야기”는 英詩(영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가 14세기 말 경에 해마다 4월이 되면 영국 각지에서 남쪽 바닷가의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를 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들을 이야기책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보카치오가 남긴 “데카메론”과 비슷한 시기의 작품이다.
조금 풀이해보면
위의 시에서 태양이 막 여정을 출발했다는 것은 태양이 3월 21일경의 춘분으로서 황도대 위로 올랐다는 것, 즉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백양궁의 절반을 지났다는 것은 4월 5일경의 청명절을 이제 지났다는 뜻이다. 늦은 봄이 시작된 것이다. 이럴 때 한 차례 시원한 소나기가 내리니 봄 가뭄이 가시게 된다. 이에 목마른 모든 나뭇가지마다 잎맥이 수액으로 가득차서 한껏 부풀어 오르고 꽃을 피워낸다, 삼나무의 새로 뻗어난 여린 가지 끝에는 대서양에서 불어온 부드러운 미풍이 살랑대고 있다는 얘기이다.
춘분을 지나서 해가 점차 길어지니 새들은 늦은 밤까지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시끄럽게 울어대니 이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러니 자연의 일부인 사람들 또한 슬슬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니 영국에선 남쪽 바닷가 근처의 캔터베리 대성당에 묻혀있는 성인들을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축복을 받고자 한다. 다양한 직업과 동네의 사람들이 순례를 떠나니 시인은 그들의 얘기를 이야기책으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40년 전 탐구당의 문고판 책에서 읽고 외웠던 초서의 서시는 영어 문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시작된다. “4월의 감미로운 소나기가 3월의 가뭄을 그 뿌리에까지 뚫고 들어가...”
모두가 자연의 순환에 따를 뿐
이제 나 호호당이 화실을 정리하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는 것처럼 독자들도 각자 활발하게 그 무엇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겨우내 침잠했던 것들이 우리 모두의 속에서 깨어나고 있으니 이는 이른 새벽부터 삼나무 여린 가지 위에서 울어대는 저 새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모두가 자연의 순환에 따를 뿐. (그저 코로나19의 현실로 인해 어디론가 떠나고픈 욕망을 당장은 눌러두고 있겠지만.)
대청소와 책 이야기
작년 5월에 지금의 우면동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냥 대충 지내왔다. 그러다가 2월의 우수로부터 시작된 대청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손볼 데가 너무나도 많았던 까닭이다. 창틀을 닦고 베란다의 잡동사니들을 왕창 내다 버리고 바닥은 물로 씻어내고 화장실의 구석은 물론이요 천정까지 세제로 닦고 다시 물로 씻어내고 서가의 책들을 정리하고 등등. 그러다 보니 손가락 마디에 주부습진이 생겨서 보습제 열심히 바르고 엷은 고무장갑을 쓴다.
서가가 너무 부족해서 5단짜리 책꽂이를 두 개 더 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배송에 2-3주 걸린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오는 토요일 춘분까진 청소와 정리를 완전히 마치려던 당초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나사 풀리는 소리, 푸르르-.
한 때 책이 도대체 몇 권이나 되는지 헤어보려고 했다. 내친 김에 아예 목록까지 작성할 참이었지만 도중에 포기했다. 그래서 책꽂이가 몇 단인지 어림셈으로 하면 대충 알 수 있으리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헤아려보니 작업실과 집 다 합쳐서 48단, 한 단에 책이 대충 28권 정도 들어가니 대충 1350권 정도가 된다. 다 들어가지 않아서 뉘어놓은 책도 꽤 되니 아마도 1500권 정도가 되겠다.
예전에 구반포 아파트에 살 때 책이 대충 4천권 정도 된 적이 있다. 서재가 아니라 그냥 책 창고였다. 쌓아놓은 책 더미 사이로 한 권 찾다가 무너지면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그 이후 신세가 망해서 셋집을 전전하다 보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2천권 정도를 버리기로 작심하고 1층 출입구 앞에 내다 놓으니 청소 아주머니들이 바로바로 가져갔다. 그 이후론 해마다 50-60권 정도는 버리고 있다. 올 해 역시 마찬가지. 중고 사이트에 팔면 되는 일 아니겠느냐 하겠지만 귀차니스트인 나 호호당이다.
사실 내가 귀차니스트란 사실은 망한 뒤 그러니까 운명의 입춘을 지나면서 깨달았다. 출세도 성공도 부지런해야 하고 악바리여야 한다는 것을. 그렇기에 귀차니스트가 부귀와 영화를 바란다면 그건 좀 양심 없는 거라 여긴다.
옛 지혜를 새롭게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니
그런데 호기심은 식어들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된 나만의 연구가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나름의 결실을 맺었으니 말이다. 자연순환이 존재한다는 것, 대단히 규칙적이란 것, 나아가서 사람의 일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다시 알고 보니 옛 先人(선인)들과 현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만 나 호호당은 그것의 철저한 규칙성과 예외 없음을 알아내었을 뿐이다.
자랑스러웠다, 나 자신이. 선인들과 현자들의 지혜에 내가 닿아있다는 사실에 감격해했다. 요하네스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 프리드리히 니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더 가깝게는 미르체아 엘리아데, 멀리 거슬러 오르면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에서 헬레니즘과 로마의 순환 사상, 고대 중국 동중서의 춘추번로와 회남자까지 이어지니 여러 천년에 걸쳐 이어져오는 맥의 줄기를 발견했다. 망각된 옛 지혜를 재발견했을 뿐 아니라 과학의 경지로 올려 세웠으니 참으로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올 해부터 천천히 글로 옮겨서 후세에 전하는 일이다. 아마도 내후년이면 책으로 만들어져 나오지 않을까 싶다. 돈을 모아서 3천권 정도는 전국 도서관에 기증하고 더 여력이 된다면 영문판으로 제작해서 여러 나라의 국립도서관에 메일을 통해 받아달라고 요청을 할 생각이다.
세상이 알아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선 아무런 갈등도 걱정도 없다.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면 절로 힘을 얻어 세월의 경과와 함께 온 지구촌에 널리 퍼질 것이고 혹시라도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없어져버릴 것이니. 하지만 자신만만하다,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 여긴다. 아마도 100년 후가 되면 전 세계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에 누군가 내 묘비 앞에 한 송이 꽃이라도 놓아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국발 먼지가 하늘을 수시로 덮어오는 봄날이다. 중국을 차이나라고 한다. 나는 중국을 먼지의 나라, 이에 먼지 塵(진)에 저쪽 那(나)를 붙여서 盡那(진나)라고 부른다. 곧 맑고 더 밝아질 질 것이다, 동남풍이 들어올 것이니.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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