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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시술대에 누워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1. 3. 2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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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 시술대에 누워

2021. 3. 23. 00:49

 

 

치과를 찾다, 춘분의 혁신

 

앓던 어금니를 뺐다. 진작 했어야 하겠지만 나는 으레 늦는다. 올 해는 3년간 미루었던 이빨 치료를 해야 한다, 뺄 건 빼고 때울 건 때우고 몇 개는 임플란트로 박고, 연말이나 되어야 끝날 것 같다.

 

그간 왼쪽으로 주로 씹다 보니 얼굴의 균형이 많이 무너졌고 오른쪽 엉덩이 근육에도 무리가 생겼다. 작년 초부터 미루기 시작한 치과치료가 겨우내 이어지더니 마침내 새 해 春分(춘분)이 되자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끝까지 버틴 셈이다. 이에 작심을 했으니 長征(장정)이 시작되었다.

 

 

이빨 치료는 역시 두려운 바가 있어서

 

이빨 치료에서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마취 주사라든가 발치에 따른 약간의 통증 또는 임플란트 봉을 받는 수술도 아니다, 나 호호당에겐 최고의 치과 주치의가 있기에 그런 일은 그 친구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다. 주사를 맞은 뒤 마취가 퍼질 때까지 하게 되는 치석 제거 작업, 꽤나 두렵다, 강한 수압의 찬물이 치주 근처에 닿으면 그 자체만으로 신경 발작이 생겨서 양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말 싫은 것은 발치하고 상처 부위를 꿰맨 다음 지혈을 위해 거즈를 2시간 동안 꽉 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잔뜩 피비린내 나는 거즈가 혀에 닿고 인후를 통해 코로 올라오면 구토를 하게 된다. (그러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살그머니 재빨리 거즈를 갈아 물어야 하는 데 그 또한 부담이다.)

 

게다가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후라 담배 한 모금이 간절한 데 그 또한 꽤나 참아야 한다는 점이다. 담배는 중독성이 워낙 강해서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면 끊기 어렵다, 이런 것을 왜 배워가지고 고생을 하는지. 예전엔 흡연은 성인 남자의 認證(인증)이던 시절이 있었다.

 

 

치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사색에 빠져들다

 

오늘은 치료하는 시간 내내 겨울 동안 사색했던 불교 철학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집중했다. 그러자 절로 떠오르는 문구가 있었다.

 

4 세기 경 인도의 바스반두가 짓고 중국의 삼장법사가 한역한 “大乘五蘊論(대승오온론)” 속의 구절인 苦謂生時有乖離欲(고위생시유괴리욕)이 그것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괴로움 즉 苦(고)란 그것이 생겨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다.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말이 아닌가! 겨우내 여러 번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어떤 무엇이 내게 생겨나고 일어날 때 그로부터 벗어나고 등지고픈 마음을 가지는 게 苦(고)라고 하니 말이다.

 

마취주사를 맞고 발치 전에 하는 치석제거라든가 이어서 이빨을 빼는 등등 모두가 고통이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가? 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다. 고통의 근본 원인은 이빨이 아파서였다. 그간에 염증이 나서 수시로 뻐근하고 아팠으니 그 모든 것이 고통 즉 苦(고)였음이다.

 

그러니 이빨을 빼는 수술이나 치료 모두 고통을 제거하기 위함이건만 그 역시 나름의 고통과 불편함을 겪어야 하니 그 또한 싫어서 참고 참다가 결국 더 이상 있다가는 왕창 더 큰 苦(고)를 겪을 것이 틀림없기에 치과를 찾아온 나였다. 고통 앞에서 나 호호당은 그야말로 비굴하고 옹졸하다.

 

 

태어난 게 죄라면 죄

 

시술의자에 누워서 눈을 가린 채 어금니가 쑥-하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의 말이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바수반두(세친)여, 당신의 말씀 또한 역시 전혀 어긋남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은 나라고 하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게 근본적인 착오였던 것 같습니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삶을 苦(고)라고 했긴 하지만 삶에는 즐거움 즉 樂(락)도 있다. 반대급부도 있다는 말이다. 바스반두는 樂(락)에 대해 樂謂滅時有和合欲(락위멸시유화합욕)이라 했다. 즐거움이란 그것이 사라질 때 다시 만나서 합치고픈 바람이 존재하는 것이라 했지 않던가 말이다.

 

 

고통과 즐거움은 균형이 깨져 있기에

 

하지만 살아보니 알게 되지만 고통이란 것은 그것을 겪을 때마다 힘들다, 어려운 것이 그다지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움이란 그것을 겪을 때마다 그 세기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는 모순이 있다는 게 문제, 큰 문제라 하겠다. 삶에 있어 즐거운 날 그다지 많지 않고 괴로운 날이 훨씬 많다, 이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핵심 문제가 제기된다.

 

삶에서 괴로움은 많고 즐거움이 적다면 분명 밑지는 것인데 왜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살고자 하는 것일까?

 

 

산다는 건 사실 남는 장사가 아니란 사실

 

사는 게 이빨이 아파서 끙끙 앓는 것이고 죽는 게 앓던 이빨을 빼고 염증을 없애는 치료라 본다면 실은 미리미리 이빨을 치료하라고 하는 것처럼 어서어서 확-죽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죽을 때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그건 앓던 이빨 빼는 수술이라 여긴다면 잠깐 눈 딱 감고 어디 한 번 죽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생짜로 죽는 게 아니라 안락하게 세상을 여의는 약도 있다는데 말이다.

 

지나간 겨울 동안 읽고 사색했던 열권 이상의 불교 철학책 속에 담긴 것들을 간략하게 줄여 말할 것 같으면 이빨 계속 아파하지 말고 어서 치과를 찾아가라는 것, 즉 살면서 고생하지 말고 삶으로부터 어서 떠나라는 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건 염세적인 생각이 절대 아니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득실을 따져보는 얘기, 즉 냉철한 理性(이성)에 바탕을 둔 생각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살고자 하는가?

 

치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거즈를 꽉 문 채 계속 생각해보니 왜 내가 더 살고자 하는 바람을 갖는 가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인 즉 이건 그냥 본능 때문이란 답이 나왔다. 머리로는 산다는 것이 밑지는 장사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작정 무조건 살고자 하는 원천적인 욕망과 바람이 유전자 속에 로직(logic)으로서 심어진 채 태어났기에 살고자 한다, 이게 답이다!

 

버스에서 내릴 무렵 또 한 가지를 문득 알게 되었다, 왜 우리에겐 본능이란 이름의 원천적 욕망이 심어져 있는 가에 대해서.

 

본능이란 우리의 계산머리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또는 작동한다 해도 수시로 망각하게끔 지상명령으로서 심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똑똑한 척 해도 결국에 가선 소위 ‘깔때기’처럼 “시끄럽다, 그냥 살아, 무작정 살아보라고!”, 이렇게 이래저래 따져본 들 정해진 답으로 돌아가는 우리들이란 사실이다.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나는 크게 외쳤다. 옛 썰! 무작정 살겠씸더!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집 현관에 들어서니 아내와 아들이 바라보는 터라 약간 지치고 힘든 표정을 지었다, 고생했으니 약간의 엄살 정도는 부려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출처: https://hohodang.tistory.com/ [희희락락호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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