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스포츠 2020.12.25. 오후 11:08
일반 이영미 헤럴드스포츠 대표기자, 네이버 '이영미의 스포츠 인 스토리' 칼럼 연재. 추신수&류현진 MLB일기 담당자
<2020시즌을 잊지 못할 한 해로 만든 원종현. 숱한 역경을 딛고 한국시리즈 우승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의 야구인생은 한 편의 장편 드라마나 마찬가지다.(사진=이영미)>
2019년부터 NC 다이노스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원종현은 ‘사연 다이노스’의 완결판이나 다름없다. 팔꿈치 부상과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LG에서 방출된 후 수술과 재활 끝에 NC 창단팀 멤버로 합류, 불펜 투수로 활약하다 대장암 2기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 후 복귀해선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고난과 가시밭길로 점철된 야구 인생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겨냈고, 독하게 버틴 끝에 우승의 주역으로 자리 잡았다.
원종현이 걸어온 그 길을 선수와 함께 되짚어 보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양의지와의 동행
“정규시즌을 확정 지은 후부터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을 그려봤던 것 같아요. 의지랑 어떤 모습을 연출해낼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막연히 상상했던 모습들이 현실로 펼쳐졌을 때는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꿈만 같다는 게 무슨 말인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원종현은 동갑내기 절친 양의지와 남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양의지는 2006년 신인드래프트 2차 8라운드(전체 59순위)로 두산의 지명을 받았고, 원종현은 2차 2라운드(전체 11순위)에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프로의 시작은 같았지만 속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의지랑 경찰야구단에서 같이 복무했고, 제대 후 구리에 각자 방을 얻어 자주 만났어요. 그러다 LG에서 방출 당한 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의지는 제대 후 두산에서 자리를 잡아갔지만 저는 야구를 그만둬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했던 시간들이었거든요. 자비로 팔꿈치 수술을 받고 재활하는 동안 의지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이후 원종현은 NC의 비공개 테스트에 합격하면서 구리 생활을 정리했고, 양의지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선수 생활하는 동안 한 팀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들은 양의지가 FA를 통해 NC로 이적하면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됐다.
“의지는 투수한테 믿음을 주는 포수예요. 리드도 잘하고 잘 막아주기 때문에 마음 놓고 변화구를 던질 수 있거든요. 그런 포수와 한 팀에서 만났다는 건 행운인 거죠. 투수가 자신감을 갖고 공을 던지게 하니까요.”
<사연 많은 33세 동갑내기의 진한 포옹>
수렁으로 빠진 시간들
원종현은 한국시리즈를 마치고 조용히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다.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은 다른 사람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과 한국시리즈 우승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그걸 다 겪고, 이겨낸 후 우승을 차지하니까 더 감격스러웠던 것 같아요. ‘원종현, 잘 버텼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습니다.”
LG 트윈스에서 프로 생활의 첫 발을 내딛은 원종현은 당시 신인 시절을 떠올리면 힘든 기억 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인 선수의 기량이 조금씩 향상 돼야 코칭스태프의 관심을 받는데 아픈 걸 참고 던져서 그런지 기량이 떨어지기만 했어요. 야구에 대한 자신감이 밑바닥까지 하락했습니다. 스스로 강해져야겠다는 마음도 없었고, 한없이 나약해지기만 했어요. 2군에 오래 있으면 1군에 올라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해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더 앞서 있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군 복무를 대신한 경찰야구단 입단은 나름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원종현은 좀처럼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군대를 간 건 잘한 선택이었는데 경찰야구단에서도 기량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제대 앞두고 겁이 나더라고요. 팀으로 복귀해서 다른 선수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복귀하면 감독님, 코치님들한테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던 거죠.”
제대 후 팀에 복귀해서 경기에 나설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건 오히려 사치였다. 현실은 그런 고민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나약한 원종현만 존재했을 뿐이다.
“방출 당하고 나선 차라리 투수 말고 타자로 전업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타자를 하게 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물론 타자 전업은 생각으로만 그쳤습니다.”
원종현은 군산상고 홈런왕 출신이었다. 그런 배경이 잠시 동안 타자 전업을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원종현한테 LG의 방출은 아픔이 아닌 또 다른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방출 당한 후 그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뼛조각 제거 수술과 토미 존 수술까지 함께 받았고, 재활훈련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LG에서 방출 당하기 전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감히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만한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어디서부터 방향을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때 수술을 결정했어요. 방출됐다고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기엔 나이가 어렸고요. 다시 도전해야 하는데 이 팔 상태로는 못 버틸 것 같아 수술을 결심했고, 새로운 몸으로 건강하게 다시 시작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살기 위해 던진다’.(사진=NC 다이노스)>
NC 창단 소식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자비로 수술을 받았고, 자비로 재활훈련을 이어갔다. 재활센터의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센터를 이용할 비용이 부족해 집 근처 고등학교에 나가 이전 LG에서 해왔던 훈련을 떠올리며 몸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계시는 군산으로 내려갈 생각도 했지만 아들이 프로 들어갔다고 지인들에게 자랑했던 부모님을 떠올리면 도저히 갈 수가 없더라고요. 월급도 안 나오는 터라 더더욱 면목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재활 훈련을 하던 원종현에게 NC 다이노스의 창단 소식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NC가 공개 테스트를 통해 선수들을 뽑았는데 그때는 참가하지 못했어요. 재활 훈련을 다 마치지 못했거든요. 팔 상태가 완벽하지 않아 더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마침 강진에서 다시 비공개 테스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테스트에 응했습니다. 당시 김경문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코치들 앞에서 공을 던졌어요. 다행히 팔 상태가 좋아져 140km/h 정도의 구속이 나온 걸로 기억해요.”
합격 여부는 바로 알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전화로 통보를 해줬기 때문이다. 원종현은 일주일 내내 휴대폰만 붙들고 합격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강진에서 테스트를 마치고 고향인 군산으로 내려갔는데 강진을 떠나올 때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다른 선수들의 훈련 모습이 아주 부러웠거든요. 나도 저기 합류해서 같이 훈련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기더라고요.”
마침내 합격 통보를 받고 강진으로 향한 원종현은 엄청난 훈련량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테스트를 거쳐 NC 유니폼을 입었다고 해서 정식 선수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 또 경쟁을 통해 옥석을 가리는 작업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원종현은 코칭스태프한테 인정받기 위해 그 많은 훈련량을 묵묵히 소화해냈다고 한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그 훈련을 시작한다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어요. 그때는 더 젊었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견뎌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힘든 길을 달려왔지만 NC에서 원종현의 자리는 2군이었다. 2013년 NC는 1군에서 정식 경기를 가졌지만 원종현은 2군에 있다가 3군으로 내려가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속으로 ‘또 방출인가?’ 싶었어요.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즌 끝나고 미국 교육리그를 가게 된 거예요. 방출 시킬 선수를 교육리그에 데려가진 않잖아요. 그때부터 조금씩 자신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김경문 감독님이 교육리그 캠프에 방문하셨는데 감독님 눈에 띄려고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듬해 1군 스프링캠프에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짧은 행복, 긴 고통
2014년 4월 3일 광주 KIA전에서 1군 데뷔전을 갖게 된 원종현. 그는 그 해 특급 셋업맨으로 꾸준히 경기에 나섰고, 포스트시즌에선 생애 첫 ‘가을야구’를 경험했다. 원종현은 2014시즌 73경기 71이닝 5승3패 1세이브 11홀드 ERA 4.06을 기록하면서 2400만 원의 연봉이 이듬해 8000만 원까지 상승하는 감격을 경험했다.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 했던 프로 생활. 그 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종현은 2015년 1월 중순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 합류했다가 불펜피칭 도중 어지럼증을 느끼고 조기 귀국했다가 대장암 2기 판정을 받게 된다.
“2014시즌 잘 치르고 나니까 야구를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이 아프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귀국을 결정했는데 정밀 검사 후 의사가 제게 대장암 2기라고 말했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처음에는 ‘살 수 있는 건가?’ 싶었어요. 왜 나한테만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는지 원망도 됐었고요.”
원종현은 수술을 받고 퇴원 후 군산에서 서울까지 통원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12차례의 항암치료 중 가장 힘든 시기가 7번째였다고 한다. 독한 약 기운으로 매일 구토를 하며 어지럼증을 느꼈고,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근육량도 함께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야구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토하고 쓰러지더라도 운동을 하려고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이라도 타려고 노력했어요. 10분도 채 걷지 못하고 쓰러지길 반복했지만 운동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건 암이 아니었다. 야구를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이 암과 싸우는 것보다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다시 마운드에 설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치지 못한 채 12번의 항암치료를 끝냈고, 병원에서 주사 꽂는 장치를 다 뺐을 때 속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치료가 다 끝났구나’, ‘이제 운동하러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숫자 ‘155’가 원종현에게 준 메시지
이즈음 NC 선수들은 원종현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를 상징하는 숫자 ‘155’를 모자에 새겨 넣었다. ‘155’는 2014시즌 LG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원종현이 찍은 구속이었다. 원종현은 선수들이 보내온 응원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2015년 10월 18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 시구자로 나섰어요. 프로 선수가 시구를 한 건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항암 치료 마치고 캐치볼도 안한 상태에서 제대로 공을 던질 자신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팬들에게 인사하고 싶어 수락을 했습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 상당히 설레었어요. 암 투병 중인 선수가 치료 다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공을 던지는 장면이 팬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했어요. 그날의 시구는 저한테 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꼭 다시 마운드에 서야겠다고, 야구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목표와 바람이 더욱 분명해졌으니까요.”
원종현은 2016년 5월 31일 두산전을 통해 복귀전을 치렀다. 9회 등판해 두산의 오재원, 민병헌, 오재일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 세우며 1이닝 3K를 기록했다. 최고 구속이 152km/h. 2016년 10월 22일 LG전(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마침내 최고 구속 155km/h를 찍었다. 원종현을 상징하는 숫자가 전광판에 찍혔을 때 그는 모처럼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전광판에 찍힌 155란 숫자를 보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다시 그 숫자를 보게 될 줄 몰랐거든요. 제가 흥분한 걸 눈치 챈 포수 김태군이 경기에 집중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라고요. 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경기에 집중했습니다.”
야구를 즐기면서 하고 싶지만
필승조에서 활약했던 원종현은 2019시즌 이동욱 감독 체제에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다. 불펜 투수라면 한 번쯤 꿈꾸는 보직이지만 암 투병을 했던 원종현은 조금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프고 나니까 야구를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보다 야구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어요. 마무리 투수는 책임감을 갖고 던져야 하는데 솔직히 저는 그 책임감으로 스트레스 받기 보단 야구를 즐기며 하고 싶었거든요. 아프기 전에는 마운드에서의 승부욕도 강했고, 경쟁심도 대단했는데 아프고 나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야구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 거죠.”
그럼에도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는 건 팀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안고 등판하기 때문에 원종현은 항상 그랬듯이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진다. 9회부터는 그만의 ‘쇼 타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원종현은 한 인터뷰를 통해 “나는 살기 위해 던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공을 던지느냐고 물었다.
“지금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야구장에 있어야 선수 원종현도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원종현의 트레이드 마크는 모자를 삐딱하게 쓰는 것. 그는 내년부터 모자에 변화를 줄 예정이라고 한다.
“이전 김상엽 코치님이 캐릭터를 살리려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던져보라고 조언해주셔서 그렇게 했던 게 계속 이어졌어요. 올시즌 후반기부터 조금씩 모자 챙의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는데 내년에는 삐딱한 스타일을 버리고 제대로 쓰고 등판할 예정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유행이 지나기도 했고, 새로운 원종현의 모습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원종현은 12월 중순부터 야구장으로 출근해서 운동을 시작했다. 근력 운동을 가장 중요시하는 그는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위해 또 다른 달리기를 준비 중이다. 우승을 경험해보니 또 우승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는 그는 앞으로 갈 길이 많이 남았다고 말한다. 원종현의 남은 야구 인생이 꽃길로만 가득 채워지길 바란다.
<창원=이영미 기자>
기사제공 이영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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