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임대차시장에 ‘역전세난’, ‘역월세’가 기승을 부린다.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하기 힘들어 기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거나 세입자에게 거꾸로 전세금에 붙인 이자를 주는 현상이다. 싼 전셋집을 구하려고,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할까봐, 발을 동동거리던 세입자에게는 낯설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역전세난·역월세는 부동산광풍에 편승한 ‘갭투자’(전세를 낀 주택매수)와 거품이 꺼지는 데 따른 부작용이며 ‘전세금 미반환사고’에 대한 경고등이다.
◆전세 대량공급·투기광풍의 참사
“새 아파트 준공이 코앞인데 아직까지 세입자를 못 구한 분양자가 많아요. 결국 살던 집을 처분하고 직접 거주하려고 해도 집이 안 팔리거나 대출이 가로막히니 잔금납부를 포기한 사람도 있어요.”
최근 몇년 새 아파트 공급이 급증한 서울 강남의 한 공인중개사사무소. ‘전세매물’, ‘가격협의’ 안내문을 붙인 종이가 유리문을 빼곡하게 차지했지만 손님의 발걸음은 뜸했다. 한시간 내내 손님이 한명도 안 왔다.
D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전세를 찾는 손님은 그나마 꾸준히 있지만 매물이 많다 보니 세입자 우위거래가 이뤄지는 분위기”라면서 주택담보대출이 많은 집은 아예 거들떠도 안본다”고 말했다
눈뜨면 수천만원 오른다는 ‘서울 미친 전셋값’이 잠잠하다 못해 바닥을 칠 기세다. 새 아파트 건설이 급증해 전세 수요 대비 공급은 10년 만에 최대수준으로 늘어났다. KB부동산 ‘주간 주택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2월 11~17일 서울 전세수급지수는 85.5로 글로벌 금융위기인 2009년 2월 첫째주의 77.6 이후 가장 낮았다. 전세수급지수는 지역 공인중개사사무소를 통해 전세 수요와 공급 중 어느 쪽이 많은지 조사해 산출한다. 100을 넘으면 수요가, 100 미만이면 공급이 많다는 의미다.
전세난이 최고조에 달하던 2013년과 2015년에는 이 전세수급지수가 190을 넘었다. 100 이하로 떨어진 건 지난해 11월 마지막주(99.3) 정부 부동산대책이 지속돼 매매가 중단되고 입주물량이 쏟아지면서다.
월세에서 전세로 전환하는 집주인도 전세물량 증가에 영향을 준다. 4년 전 원룸에 투자해 월세임대로 운영하던 김모씨는 “금리가 올라서 월세를 받아도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내기가 힘들어지고 세입자도 구하기 어려워 전세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공급폭탄은 전셋값을 안정시켰다. 한국감정원 조사 결과 서울 전셋값은 지난해 10월 말 이후 지난 2월 중순까지 4개월여 하락했다.
통상 전세계약 기간인 2년 전과 비교해 전세금이 내린 곳도 있다. 국토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서울 잠실엘스 전용면적 84㎡는 2017년 1월 7억8000만~8억5000만원에 전세계약이 됐다가 현재 7억원에 매물이 나왔다. 2년 새 최대 1억5000만원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되느냐는 것. 일부 부동산전문가는 올해도 입주물량이 전년대비 10% 증가해 전셋값 안정이 계속될 것으로 보지만 매매에서 전세로 전환하는 수요자가 많아질수록 다시 전세난이 고개를 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전셋값은 수요·공급의 영향을 받는데 정부규제로 매매에서 전세로 돌아선 수요가 적지 않은 데다 매매가가 계속 떨어지면 전세수요가 더 늘어나 역전세가 장기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역전세난의 가장 큰 문제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전세금 미반환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집주인이 추가대출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세입자가 경매를 신청해도 전세금보다 낙찰가가 낮게 나오는 ‘깡통전세’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런 우려가 커지자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금융위원회 등은 역전세난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나섰다. 일각에서는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을 의무화해 미반환사고 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SGI서울보증 등의 보증기관에서 돌려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보험료 부담을 세입자에게 전가한다는 반발에 부딪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역적으로 전셋값 하락폭이 크지만 광범위하지 않고 현재로서 어떤 대책을 내놓을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주택 임대차분쟁 절차를 지원하거나 집주인의 전세금 반환을 위한 대출을 확대하는 등의 방안은 검토돼야 한다. 세입자가 법을 이용해 전세금을 돌려받으려면 최종적으로 임차권 등기명령과 전세금 반환청구 소송을 할 수 있지만 판결까지 6개월 안팎이 소요돼 실익이 적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집주인이나 세입자 중 한 사람이 분쟁조정을 신청하면 절차가 개시되는 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2016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 중이다.
◆재건축 이주 지역 역월세 만연
지난 2월 이사한 서울 신천동 전세 세입자 최모씨는 집주인과 역월세계약을 맺었다. 집주인이 전세계약 종료 후에 세입자를 못구하고 추가대출도 못받아 전세금을 한번에 돌려줄 수 없다며 남은 차액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역월세 현상은 재건축 이주가 많은 강남 등지에서 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는 집주인이 새 세입자를 구하기까지 기다려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주를 앞둔 집은 새 세입자를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강남에서는 집주인이 은행이자보다 높은 연 3.5% 수준의 역월세를 지급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역월세 현상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에도 등장했다. 아파트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이 동반하락해 집주인과 세입자간 우위가 뒤바뀐 것이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역월세로 몇개월은 버틸 수 있지만 전셋값이 계속 떨어지면 집주인과 세입자 둘 다 위기”라며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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