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5.09. 11:46 수정 2018.05.09. 16:16
[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국제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함으로써, 중동은 시리아 내전에 더해 ‘이란 리스크’라는 더 큰 분쟁 요소를 안게 됐다. 중동 분쟁의 대치 전선은 내전이 벌어지는 시리아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 전역으로 넓어지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협정에서 탈퇴한 것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우려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란 자체를 악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란 핵합의가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 확장을 허락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도 “트럼프와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두 동맹국인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이란 핵협정 문제는 핵무기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며 “그 협정이 이란의 신정 정부를 합법화하고 정상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란은 석유 수입으로 세계 경제와 접목돼 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이란의 모험적 행태, 미사일 프로그램, 테러 단체 지원 등에 자금을 대는 석유 수입을 가지고 세계 경제에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트럼프와 그 행정부도 이란 핵합의의 목적과 취지와는 무관한 시리아 등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 확장을 주요하게 문제삼고 있다. 이 핵합의에 서명한 유럽의 동맹국, 국제원자력기구(IAEA)뿐만 아니라 미 정보기관과 의회도 이란이 이 핵합의를 잘 준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보고해왔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핵합의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에 대한 우려가 이번 사태의 주요한 이유가 아님을 말해준다.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가 몇년간의 협상 끝에 2015년 7월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이란과 타결지은 것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 이후 악화된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와 중동 분쟁의 구도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혁명이 나기 전에는 중동에서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었다. 인구나 국력, 지정학적 입지에서 이란은 중동에서 최대 강대국이자, 요충 국가였다. 이런 이란이 이슬람혁명 이후 중동에서 최대 반미 국가로 선회하자,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 이후 미국은 이란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이는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뿐만 아니라 중동 분쟁을 악화시켰다. 미국은 1980년대 내내 이란-이라크 전쟁을 뒤에서 지원했다. 이렇게 이란에 맞서주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반미로 돌아서자, 미국은 이라크를 상대로 두 번이나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으로도 내몰렸다.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이다.
특히 이라크 전쟁은 중동 전역의 분쟁으로 확산됐다.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고, 시리아 내전으로 바샤르 아사드 정권이 약화되며, 중동에 거대한 세력 공백이 생겼다. 이 세력 공백은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 확장을 불러왔다. 레바논에서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뿐만 아니라 이라크에 새로 들어선 시아파 정부로 인해 이란의 영향력이 확장됐다. 이란은 내전이 벌어지는 시리아에서도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파인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시리아에서도 영향력이 커졌다.
미국의 이란 봉쇄는 오히려 중동에서 이란~시리아 아사드 정권~레바논 헤즈볼라로 이어지는 시아파 연대를 강화했다. 그리고 러시아도 이란의 시아파 연대의 후견인으로서 중동에서 세력을 다시 키웠다. 여기에 이란의 핵개발까지 겹치자,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는 취임하자마자 이란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물이 핵협정이었다. 중동에서 이란의 세력과 지위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뿐만 아니라 중동 분쟁을 완화하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란의 석유 등 자원, 그리고 거대한 시장에 대한 유혹도 컸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이란의 석유 자원과 시장이 절실했다.
하지만 이란과의 핵협정은 이란을 최대 적으로 보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큰 반발을 샀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는 핵협정을 통해서 이란을 국제사회로 복귀시키면 중동에서 그 영향력이 더 커질 것으로 우려했다. 이스라엘은 특히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사우디 역시 종파가 다른 이란이 중동에서 패권 국가로 부상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하면서 오바마 행정부의 중동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란과의 대결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사우디를 주축으로 한 수니파 아랍 국가들과의 연대 강화로 선회했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첫 해외순방으로 사우디 등 중동 수니파 국가들을 택하고, 사우디와 1100억달러(약 119조원)라는 천문학적인 무기 판매 계약을 체결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이란과의 핵협정 파기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이스라엘·사우디는 이번 핵협정 탈퇴를 통해 핵개발 저지라기보다는 이란의 경제적 생명선을 다시 차단해 체제를 붕괴시키겠다는 도박을 걸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유럽의 한 외교관을 인용해 평가했다.
국제사회는 미국이 이란과의 핵협정에서 탈퇴하면, 이란이 원하는 핵물질을 자유롭게 생산해 핵개발로 치달을 것이라고 우려해왔고, 이를 근거로 미국의 탈퇴를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런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과거의 제재 영향에서 아직 허덕이는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 사우디에 맞설 경제적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란이 핵무기 개발로 다시 나서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벼르는 군사 공격의 빌미를 준다는 것을 이란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미국 동맹국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계산은 역사적인 실수가 될 조악한 지정학적 접근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인 핵협정 탈퇴로 중동은 다시 이라크 전쟁 전야와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는 당시 이스라엘이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려는 로비, 그리고 이를 배려한 조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세력들의 전략 착오가 있다. 이란의 반발도 문제이지만, 이스라엘과 사우디는 이번 조처를 통해 이란과의 대결 노선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제재가 다시 본격화되고, 이란이 여기에 반발하는 조처를 시작하면, 특히 이스라엘이 나서 이란에 대한 위협을 현실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 첫번째 무대는 시리아 내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이 시리아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내전에 직접 개입해 아사드 정권이나 헤즈볼라 등 친이란 세력들을 공격할 시나리오가 어른거리고 있다.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경고하던 이란에 대한 직접 공습 역시 곧 중동에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것이 분명하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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