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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종의 탄생 _ 혁명은 청년의 심장으로부터 >>>

경제·강의방

by 21세기 나의조국 2017. 9.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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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종의 탄생 _ 혁명은 청년의 심장으로부터     

중년학생 | 조회 57 |추천 2 |2017.08.31. 13:20 http://cafe.daum.net/agoodcapitalism/fy1i/82  

      


김영하의 <퀴즈쇼>에는 청년세대(N포세대)가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 블록 만들 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 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300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맞아. 너도 피아노 치지 않아? 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새로운 종의 탄생


촛불집회는 전통적인 집회 시위와 매우 다른 문화를 보였다. 그 촛불집회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것은 청년세대였다. 도대체 촛불집회 고유의 문화와 청년세대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청년세대의 범위부터 정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1990년대에 10대를 보낸 사람들 이후부터를 청년세대로 간주하고자 한다. 2017년 현재 기준으로 보면 대략 40대 중반까지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1990년대에 10대를 보낸 사람들까지 청년세대로 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로부터 시작해서 전혀 새로운 종의 인류가 등장했다고 할 정도로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세대 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10대부터 전혀 새로운 세대 특성이 나타난 것은 일차적으로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던 시기였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정착되었으며 경제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되는 등 역사의 국면을 바꾼 굵직한 변화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1~2자녀가 보편화되고 인터넷의 확산 등 디지털 문명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과연 이러한 환경 변화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을까?


청년세대는 대식구들 속에서 눈칫밥을 먹고 자랐던 기성세대와 달리 1~2자녀가 보편화되면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로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삶을 살면서 자기 계발과 자아실현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었다.


청년세대는 한층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면서 굳이 주눅 든 삶을 살 이유가 없었다. 기성세대처럼 자기표현을 억제하며 침묵의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또한 인터넷의 확산 덕분에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 유통시키는 등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도 급속히 확장되었다. 대학교육 일반화로 평균적인 개인 능력 역시 기성세대에 비해 월등히 우월해졌다.


이 모든 요소가 작용하면서 개인으로서의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데 익숙한 전혀 새로운 세대가 잉태되었다. 그들에게 ‘나’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중심이었으며 동시에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철저히 집단 가치를 우선하면서 개인을 앞세우는 것을 경멸했던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성세대는 왜 집단 가치를 우선했던가.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시대 상황의 산물이었다.


기성세대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향해 나아갈 무렵 그들을 둘러싼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개인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직 집단의 힘만으로 돌파 가능했다. 자연스럽게 기성세대는 집단 이익을 앞세웠고, 집단 이익에 헌신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다. 그들에게 개인의 삶은 누리고 즐겨야 할 것이 아닌 희생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들은 집단에 속해 있을 때 마음이 편했고 힘을 발휘했다. 집단주의가 체질화되다 보니 개인의 좋고 나쁨보다는 집단 공통 가치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개인으로서의 나를 우선시하는 청년세대와 집단 가치를 우선시했던 기성세대와의 차이는 여러 차이들을 파생시켰다.


각자가 중심인 조건에서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수평적인 것밖에 없다. 청년세대는 생래적으로 수평 지향성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온라인 활동은 수평 지향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온라인 활동은 친구, 이웃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수평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온라인 활동에서 권위를 앞세우면 비웃음꺼리가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기성세대는 수직적 관계에 체질적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이전 시기에는 군대와 관료조직은 물론이고 민간 기업들도 엄격한 수직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움직였다. 진보적 성향의 사회단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년 특유의 열정이 넘치던 학생운동조차도 선후배 사이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상층 지도부 중심의 일치단결과 상명하복이 불문율처럼 통용되었다. 조직 구성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일사불란함을 과시했다. 집단주의가 발현된 방식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모두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이 일상적으로 반복되면서 기성세대 사이에는 수직적 인간관계가 체질로 굳어버렸다.


두 세대의 확연한 차이는 청년세대는 강한 개방성을, 기성세대는 강한 폐쇄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직적 관계에서는 A가 B의 아래이면서 동시에 C의 아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통제받을 수는 없다.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그 누구인가의 아래로서 관계가 ‘독점’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평적 관계에서는 전혀 달라진다. A는 B의 친구이면서 동시에 C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다. 도리어 관계가 다양할수록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수평적 관계에서 관계는 ‘공유’되는 것이다. 정보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직적 위계질서에서는 ‘정보의 독점’을 추구하는데 수평적 관계에서는 ‘정보의 공유’를 중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평 지향성이 강한 청년세대는 강한 개방성을 보였다. 개방성은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편견 없이 수용하는 데서도 드러났다. 일본 문화도 마음에 들면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와 달리 기성세대가 폐쇄성을 보인 것은 그들이 익숙한 수직적 위계질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수직적 위계질서는 경계선 안과 밖을 뚜렷이 가른다. 경계선 안의 구성원들끼리는 맹목적으로 결속한다. 반면 경계선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성을 보인다. 폐쇄성이 체질화되는 것이다.


두 세대의 차이는 청년세대가 다양성을, 기성세대가 획일성을 지향하는데서 뚜렷이 나타난다.


청년세대는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는 것에서 벗어나 내면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을 추구했다. 기성세대에 비해 유별날 정도로 개성을 중시했다. 개성이 없는 것은 자아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청년세대는 권위 있어 보이기를 원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멋있어 보이기를 갈망했는데 멋의 핵심은 개성이었다.


이에 반해 기성세대는 집단 가치를 더 우선하다 보니 조직의 통일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의 무분별한 표출은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엄격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로 개성은 무시된 채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하는 판에 박힌 인간만이 양산되었다. 자연스럽게 획일적 문화가 확립되었다.


시대 상황 역시 두 세대의 차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기성세대가 살았던 냉전체제는 세계를 두 진영으로 가르면서 획일적 사고와 행동을 낳는 흑백논리를 강요했다. 그런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청년세대는 세상을 흑백 두 개의 색깔이 아닌 천연색으로 다채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청년세대는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다원주의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청년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사고와 행동 방식에서 뚜렷하게 다른 전혀 새로운 세대가 되었다. 1990년대 이후 급격한 환경 변화가 전혀 새로운 종의 인간들을 출현시킨 것이다.


앞서 촛불집회는 수평성, 개방성, 다양성 등 세 가지 특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청년세대의 고유한 속성 역시 수평성과 개방성, 다양성이었다. 청년세대의 속성과 촛불집회의 속성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이는 촛불집회가 청년세대의 속성이 발현된 결과이자 청년세대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청년세대가 촛불집회의 진화를 선도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혁명은 청년의 심장으로부터


나중에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수평성, 개방성, 다양성 등으로 표현된 청년세대의 속성은 경영혁명을 추진하는 에너지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청년세대는 생래적으로 변혁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년세대가 일상 세계에서 자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의식을 품어 왔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실제로 청년세대 의식의 궤적을 추적하면 상당한 곡절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90년대 10대를 보냈던 청년세대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발을 내디뎠을 무렵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였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광풍이 매섭게 몰아치는 시절이었다. 청년세대는 태풍의 한가운데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졌다. 결과적으로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의 최대 희생양이 되었다. 취업 대란, 벤처 대란, 카드 대란, 부동산 대란 등 각종 대란이 청년세대를 무자비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첫째, 취업 대란.


외환위기 이후 청년세대는 줄곧 취업 대란에 시달려야 했다. 구조조정 압박을 받은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줄이고 그마저도 비정규직으로 전환한 결과였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집중적인 희생양이 된 것이다. 청년세대가 이토록 차별받은 것은 자본주의 역사 이래 없었던 일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개선의 조짐 없이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다는 데 있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 동안 종업원 100명 이상 기업에서 일자리가 총 56만 1,000개 늘었는데, 이 중 청년층 일자리는 6%인 3만 3,660개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80% 정도가 비정규직이었다. 그 비정규직 자리마저 구하지 못해 수많은 청년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2000년에 이르러 15~19세 청년 고용률은 43.3%로 곤두박질쳤다. 2014년에 이르러서는 그보다 낮은 40.7%를 기록하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50.9%보다 10%포인트나 낮은 수치이다.


둘째, 벤처 대란.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크게 위축된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활로는 벤처기업 육성에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뒷받침할 각종 방안을 마련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가세하자 빠른 시간 안에 벤처 붐이 일어났다. 도전 정신으로 넘쳐났던 청년세대가 성공을 확신하며 대거 합류했다.


하지만 건전성이 결여된 투기자본이 몰려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투기자본들은 창업자와 짜고 인위적인 주가 부풀리기 등으로 벤처 업계에 폭탄 돌리기 노름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거품 붕괴와 함께 코스닥 상장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락했다. 1999년 말 98조 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코스닥 시가총액은 5년 후인 2004년 10월에는 30조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대략 68조 원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빚을 끌어다 썼던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벅찬 희망을 안고 참여했던 청년세대는 직격탄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셋째, 카드 대란.


2000년 이후에 접어들어 금융사들은 신용카드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정부도 소비 확대를 목표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신용카드 대출(현금 서비스) 잔액은 1998년 10조 원 수준에서 2002년 하반기 무려 60조 원까지 급격히 팽창했다. 불과 4년 만에 6배나 증가했다. 2003년이 되자 카드 대출의 상당 부분이 상환이 어려운 부실대출임이 드러났다. 곳곳에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례가 벌어졌다. 금융권은 5만 원 이상의 신용카드 대금을 3개월 이상 갚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신용불량자 명단에 올렸다. 일순간에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사람들이 줄잡아 300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상당수가 카드 사용에 쉽게 적응했던 청년세대였다.


넷째, 부동산 대란.


과거 주택보급률이 낮았을 무렵 부동산을 둘러싼 갈등은 주로 소득 계층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다. 주택가격이 오르면 부동산을 보유한 부자는 막대한 이익을 보았고 서민은 엄청난 출혈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것이 2004년 이후 신규 주택 구입자가 주로 청년세대로 채워지면서 세대 간 갈등 구조로 바뀌었다. 이 와중에서 시장 원리를 중시한 김대중 정부는 아파트 분양 가격을 건설사가 자율로 정하도록 했다. 그러자 아파트 분양가가 천정부지로 뛰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이후부터 2005년 10월까지 전국의 아파트 시가총액은 무려 276조 원이나 늘어났다. 아파트 분양가는 2006년에 이르러 몇 년 전에 비해 두세 배나 비싸졌다. 노무현 정부는 시장에 맡겨야 한다며 상황을 방치했다. 피해는 고스란히 청년세대에게 집중되었다.


온갖 트라우마가 가슴을 짓누르는 속에서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 광풍 속을 외로이 헤쳐 나가야 했다.


삭막한 세상을 배회하며 발견한 것은 그 어떤 조직도 개인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


여기에 부모로부터의 끊임없는 주문이 더해졌다. 부모세대는 “다른 사람은 신경 쓸 것 없다. 오로지 너만 잘 하면 된다.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무한경쟁 논리를 반복해 주입했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부모세대가 어떻게 자녀를 가혹하게 굴복시켜 왔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식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맴돈다는 의미의 헬리콥터맘이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부모세대가 자식을 자신의 의도대로 몰고 가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통제했다는 의미이다. 그로부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부모 이기는 자식 없는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청년세대 사이에서 무한경쟁은 절대화되었고 경쟁에서의 승리는 철저히 정당화되었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장면들이 다수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대학 강의실에서 KTX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투쟁을 소개하면서 학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한 학생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3분의 2 정도의 학생이 그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은 정규직이 된 것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인 대가인데 여승무원들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정규직이 되려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 하나를 놓고 10명이 서로 밀치고 다투는 무한경쟁 논리는 청년세대의 삶을 극도로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청년세대는 집단 우울증에 시달리며 고통에 울부짖어야 했다. 반복되는 좌절은 고통의 깊이를 나날이 더해갔다. 무엇보다 단 한 번도 승리해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청년세대를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에 터진 2008년 촛불시위는 일시적이나마 청년세대의 억눌린 속성을 마음껏 발산할 공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2008년 촛불시위는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세상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심각한 정치적 좌절감만을 안겨다 주었을 뿐이다. 이명박의 직접 사과와 쇠고기 수입 재협상 결과에 아랑곳없이 정치적 상황이 계속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촛불시위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은 더욱 후퇴했고 종편 도입과 함께 언론 지형은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고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년세대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출구가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월호 참사는 세상을 향한 청년세대의 불신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지옥의 땅이었다. 이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망상에 불과했다. 청년세대 사이에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그 어떤 진지한 노력도 극단적 불신과 냉소로 봉쇄되었다. 청년세대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간 것은 이 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망하는 것이었다.


청년세대는 거듭해서 체제와의 불화를 경험했다. 때로는 기존 체제의 집중적인 희생양으로, 때로는 무한경쟁의 톱니바퀴가 되어 집단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때로는 지독한 반항아가 되어 기성세대와 극렬한 충돌을 빚는 것으로, 때로는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냉소를 보내는 것으로 내면세계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 세계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했다. 청년세대가 기존 체제와 화해하고 융화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먼저 자신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가오는 사람들 면모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뒤엉키면서 움직이기조차 버거웠지만 누구 하나 짜증내는 사람이 없었다. 낯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따뜻하게 배려했으며 거리낌 없이 교감을 나누었다.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질서를 선보였다.


불시민혁명은 목표했던 박근혜 탄핵을 성공시키면서 힘을 합쳐 노력하면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청년세대로서는 숱한 좌절을 거듭한 끝에 처음 얻어낸 더없이 강렬한 승리의 경험이었다. 청년세대의 뇌리에 희망, 확신, 열정 등 새로운 단어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혁명은 청년의 심장에서 먼저 일어났다.


먼저 청년세대가 촛불시민혁명을 겪으며 혁명적 변화를 경험했음은 수많은 징표들로 입증되고 있다.


먼저 청년세대 사이에서 정치적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다. 2017년 초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92%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2016년 4.13총선 때의 투표율 52.7%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이다. 열성적 투표층인 5060세대보다도 10%포인트 높은 것이었다.


지난날 그 무엇인가의 노예로 살아 왔음을 깨달았다는 고백도 줄을 이었다. 헬조선을 갇조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퍼져 나갔다. 나라는 여전히 혼미하고 삶의 조건은 악화되고 있지만 함께 넘어설 ‘사람들’을 발견한 결과였다. 청년세대는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사람만이 희망임을 터득했다.


청년세대의 모습은 광장에 모인 시민 전체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광장은 운집한 인파 속에 ‘청년 바이러스’를 단기간에 전염시키는 무대가 되었다. 덕분에 모든 세대가 고르게 참여하면서도 꼰대가 드문 집회가 되었다. 촛불시민혁명에서 드러난 시민의 정체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한국혁명 _ 불평등 해소의 새로운 길 _ 박세길 지음” 중에서 일부 발췌 편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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