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출장을 다니며 누리는 최고의 사치는 일과를 마치고 한잔 꺾는 것이다. 물론 강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허름한 식당에서 지역의 별미를 곁들인다. ‘곁들인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술은 종(從)이고 음식이 주(主)가 된다. 지역 별미 중 해장 음식이 들어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다음날 일정이 한결 수월해진다.
지금껏 경험한 지방의 속풀이 음식 중에는 장흥 매생이국, 삼척 곰칫국, 영동 올갱이국, 거제 생대구탕 등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겨울 새벽 바다로 나가 허리를 굽힌 채 손으로 훑어가며 거둬들이는 매생이는 숭고한 노동의 산물이다. 푸른 윤기 속에 바다의 향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폭 삭은 김장김치를 넣어 끓이는 곰칫국은 생선살이 부드러워 뼈만 잘 발라내면 거의 들이마시게 된다. 부추와 아욱 등을 투입한 올갱이국 역시 애주가들의 속을 확실하게 풀어준다. 해장의 대명사인 콩나물국밥을 전주 혼자서 오로지하는 것은 아니다.
군산 월명동에도 20여년간 주당들의 쓰라린 속을 달래준 고마운 해장국집이 있다. 살짝 뭉툭한 국물, 억세지 않은 콩나물, 생기를 유지하고 있는 밥알, 촉촉한 달걀이 공생하면서 한 그릇의 따뜻한 위로가 완성된다.
개인적으로 첫손에 꼽는 해장 음식은 평양냉면과 막국수다. 산뜻한 국물이 가슴을 뻥 뚫어주고, 보들보들한 면발이 목울대로 치고 넘어가야 온몸의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전날 통음으로 몸 컨디션이 엉망일 때면 ‘우래옥’의 평양냉면과 김치말이냉면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실존적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주문해서 미친 듯이 욱여넣을 때도 있다.
이번 생애, 몸무게를 덜어내는 일은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갈비와 양지를 넣고 우려낸 ‘반룡산’의 가릿국밥도 혈관 속 알코올 찌꺼기를 말끔하게 청소해준다. 밥은 나올 때부터 맑디맑은 국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 그 위에 잘게 찢은 양지를 비롯해 선지, 두부, 무, 대파 등이 올라 있다. 어느 하나 모나지 않고 유순하다.
긴 세월 동안 ‘내 영혼의 맑은 수프’인 닭곰탕을 굳건히 지켜온 ‘황평집’도 여간 고맙지가 않다. 국물은 말갛고, 방울방울 떠 있는 닭기름의 자태는 영롱하다. 살코기를 씹으면 단단함과 부드러움 사이에서 마치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 든다. 가장 탱글탱글한 부위는 닭껍질. 주문 시 껍질을 많이 넣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밥을 말기 전, 다진 마늘을 넣어보자. 고소하고 여릿한 국물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마늘의 알싸한 향이 닭곰탕의 풍미를 확 올려준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다진 양념장이나 깍두기 국물의 도움은 받을 필요가 없다.
‘황금콩밭’은 서울 시내에서 최고 수준의 두부를 선보이는 집이다. 어떤 부재료의 부축도 받지 않는 생두부의 맛부터 음미해야 하지만 가장 추천하고 싶은 메뉴는 두부젓국이다. 새우젓으로 간을 한 맑은 두붓국(고춧가루가 뿌려져 있기는 하다)인데, 두부의 편안함과 새우젓의 거슬리지 않는 짠맛이 매끄러운 조화를 이룬다.
특히 이 집 새우젓의 상태가 상당히 좋다. 짜면서도 뒷입맛이 달다. 두부젓국을 먹다보면 또다시 음주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하긴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해장’의 뜻을 찾아보면 ‘전날의 술기운을 풂. 또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해장국 따위와 함께 술을 조금 마심’이라고 나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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