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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만화방 맞아?

문화·패선·취미·노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5. 11. 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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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만화방 맞아?

[한겨레]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신개념 만화방 시대
20대 여성·데이트족이 많이 찾는 카페풍 신개념 만화방 인기

 



 

신개념 만화방의 원조인 ‘즐거운 작당’. 사진 박미향 기자

 


뿌연 담배 연기, 어둑한 불빛, 흐트러진 라면 그릇, 퀴퀴한 냄새…. 중장년층이 만화방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다. 하지만 지금 20대들에게 만화방은 세련된 문화공간이다. 알록달록한 카페풍의 신개념 만화방들이 젊은이의 거리인 서울 홍대 앞, 강남 등에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웹툰이 등장한 200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춰 추억의 공간이 된 만화방이 이제 20대들의 놀이터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아저씨들이 없다!

지난달 29일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만화방 ‘딩굴딩굴 알타미라’(이하 딩굴딩굴). 벽면에는 2만권이 넘는 만화가 가득하다. 1980년대 만화방의 단골인 ‘아저씨’는 찾아볼 수 없다. 미간을 찌푸렸다 폈다 하며 만화책 <신과 함께>를 넘기고 있는 김진아씨는 26살 직장인이다. “옛날 만화방하고 달라서 색다르고 좋다”는 김씨의 말에 옆에 앉은 한살 어린 직장 동료도 “옳소” 하고 맞장구친다. 다락방 같은 작은 방은 전희진(28)씨와 그의 여자친구 차지다. 전씨는 데이트 코스로 이곳을 선택했다. 여자친구와 나란히 누워 웹툰 단행본 <오늘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를 펼쳐 들었다. 팔베개도 하고 주문한 볶음밥을 나눠 먹으며 까르르 웃음꽃을 피운다. 그는 “1만원대로 데이트 비용을 해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이곳 이용료는 1인당 70분에 3000원, 이후 10분당 500원씩 추가된다. 딩굴딩굴 인근 만화방 ‘청춘문화싸롱’을 찾은 스무살 동갑내기 강태석·김예진씨는 4시간째 한자리다. “전에는 데이트로 청계천도 걷고 영화도 봤는데 이제는 다 지겨워졌다”며 “이곳은 카페와 별반 다르지 않아 좋다”고 말한다.

딩굴딩굴의 주인 임동현(38)씨는 “손님의 80%가 20대 여성이나 데이트족”이라고 한다. 주말에는 10~20분 정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다. 여성이 주고객층이라 해서 순정만화가 가장 인기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오산이다. 임씨는 “요즘은 구분이 없다. 여성들이 오히려 액션, 스포츠 만화를 더 찾는다”고 한다.

 



 

데이트 장소로 인기 많은 ‘딩굴딩굴 알타미라’. 사진 박미향 기자

 


이런 신개념 만화방의 원조는 서교동의 ‘즐거운 작당’이다. 지난해 4월 문 연 이곳은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에스엔에스(SNS)에서 입소문이 퍼져 홍대 먹자거리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주인 김민정(44)씨는 2013년 대기업을 퇴사하고 만화방을 열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저씨들 틈에 끼여 불편하게 만화책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여성들에게 편한 문화적인 만화 공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는 공간을 복층 구조로 짜고 다락방을 만들었다. 261㎡(79평)에 3만3000권 넘는 책을 골라 넣었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만화류는 목록에서 뺐다.

하지만 ‘아저씨’가 출몰하는 예외도 더러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만화방 ‘섬 만화카페’(이하 섬)에서 초등학생 두 명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줄무늬 고양이 코우메>에 푹 빠진 초등학교 6학년 심훈군과 동생 심완이양은 아빠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아버지 심규빈(45)씨는 이곳의 유일한 ‘아저씨’다. 심씨는 “만화는 애들이 봐선 안 되는 거라는 일부 생각에 반대한다”며 “이곳은 깨끗하고 밝아서 좋다”고 했다. 심군은 이제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아빠 따라온 만화방에 재미를 붙이면서 게임을 끊었다고 한다.

 



1980년대 동네마다 있던 만화방
2000년대 들어 자취 감췄다가
알록달록 세련된 문화공간으로 부활
간식도 색다른 메뉴로 업그레이드




만화‘방’ 안에 ‘방’이 또 있다!

언뜻 시설 좋은 도서관처럼 보이는 즐거운 작당을 둘러보다 “오호!” 하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책들이 빽빽이 꽂힌 서가 사이에 자리한, 한평도 안 돼 보이는 방들과 시골 외할머니댁 대청마루 같은 공간 때문이다. 직장인 박찬희(29)씨는 방에 콕 박혀 있다. 그야말로 ‘방콕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늑한 방에서 유일한 친구는 열권 넘는 만화책이다. 그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가질 수 있어 좋다”며 “하루 이틀, 짧은 휴가를 여기서 보내고 나면 힐링이 된다”고 한다. 직장인 이소연(25)씨도 지난달 30일 하루 휴가지로 이곳을 선택했다. 그는 지난 여름휴가도 이곳에서 보냈다. “다리 쭉 뻗고 앉을 수 있는 대청마루 같은 공간이 없었다면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는 1주일에 2번 이상 직장 동료들과 맥주 한잔 하는 대신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씨를 따라온 직장 동료 현예진(25)씨는 “담요를 덮고 방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상 5개를 펼쳐놓은 즐거운 작당의 대청마루는 만석이다. 마루 반대편 계단을 오르면 빼곡한 책들 옆에 작은 방이 또 있다. 대청마루에서도 들머리에서도 이 방을 볼 수 없다. 미로를 여행하듯 찾아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다. 20대 여성 둘이 벽에 등짝을 붙인 채 만화책과 수다를 즐기며 나른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신사동 섬의 방은 이층침대를 닮았다. 아래층과 위층이 붙었으면서도 독립돼 있다. 이층침대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도 커다란 방처럼 꾸며져 있다. 폭 파묻히는 1인용 빈백소파 8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청춘문화싸롱’의 아파트형 방. 사진 박미향 기자

 


딩굴딩굴에도 다락방을 포함한 작은 방이 10개 이상 있다. 방에는 푹신한 쿠션과 담요가 기본으로 있다. 대학생 김미경(24)씨는 천장 없는 방에서 3시간째 만화책 보다가 지치면 잠을 자고 깨면 다시 만화책을 펼치는 중이다. 그는 “친구들이 이런 특이한 만화방 얘기를 많이 해서 호기심 때문에 와봤더니 정말 편하더라”며 반쯤 누운 상태로 말한다. 집이 지척인데도 갈 생각을 안 한다. 청춘문화싸롱에선 방 8개가 아파트처럼 붙어 있다.

신개념 만화방의 작은 방들은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를 넘어 ‘5포’(꿈과 희망마저 포기)까지 내몰린 외롭고 쓸쓸한 이 시대의 청춘들이 선택한 쉼터다.



주인장 개성이 곧 만화방 얼굴!

신개념 만화방들은 카페풍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도 주인 성향에 따라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색다르고 독특한 것을 선호하는 20대들은 주인 개성에 따라 만화방을 고른다. 개성 없는 만화방은 ‘아웃’이다. 20~30대 4명이 동업해 석달 전 문 연 서교동의 청춘문화싸롱은 한달에 한번 인디 뮤지션을 초청해 뮤직 토크쇼를 진행하고, 재즈 공연 등도 한다. 대학 예술학부를 졸업한 주인 허수영(28)씨는 “쉴 곳 없는 청춘들의 안락한 문화공간을 추구한다”며 인테리어도 이색적으로 구성했다. 대부분 지하인 다른 만화방과 달리 이곳은 2층이다.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으로 햇볕이 쏟아진다. ‘싸롱을 이용하는 개꿀팁’ 같은 발랄한 문구가 벽 곳곳에 붙어 있다.

 



 

섬 만화카페’는 흰색과 푸른색으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진 박미향 기자

 


섬도 주인의 개성이 강하긴 마찬가지다. 주인 오승민(31)씨는 실내장식을 흰색과 파란색으로 통일했다. 그가 구비한 빈백소파는 평소 집에서 애용하던 소파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책만 모아둔 책장을 따로 만들어 손님에게 추천한다. 역삼동 ‘꿀잼코믹스’와 함께 강남권의 개성 강한 만화방으로 떠오르고 있다.

즐거운 작당은 신개념 만화방 가운데 가장 많은 만화책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피스> 같은 인기 만화도 많지만, 용산참사를 다룬 <내가 살던 용산>을 비롯해 <삼십살>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 <바늘땀> <담요> 등 다른 곳에선 쉽게 찾기 힘든 명작 만화책들이 서가를 채우고 있다. <미생>의 윤태호 작가, <송곳>의 최규석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도 모두 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던 주인 김민정씨의 개성이 오롯이 드러난 구성이다. 그는 요즘 어른을 위한 그림책도 여러 권 구입중이라고 한다.

20대들과의 소통에 적극적인 곳도 있다. ‘신촌 피망과 토마토 만화카페’ 주인 황순욱(34)씨는 지난달 29일 페이스북 페이지에 “게임이나 하면서 가게 보는 사이에 바로 옆 이화여대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부끄럽다”는 글을 올렸다. 이날은 이화여대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이대생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를 벌인 날이다. 주인은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며 오는 6일까지 이대생들에게 이용료를 안 받겠다고 적었다.

 



 

‘즐거운 작당’에는 <심야식당>에 등장했던 명란버터라이스가 있다. 사진 박미향 기자

 


 

청춘문화싸롱’의 비만세트(비빔면+만두). 사진 박미향 기자

 


 

딩굴딩굴 알타미라’의 볶음밥. 사진 박미향 기자

 


라면은 가라! 볶음밥이 대세!

달걀 푼 라면이 70~80년대 만화방 간식의 대세였다면, 신개념 만화방의 1위 먹거리는 비빔·볶음류다. 국물 흥건한 라면을 주문하면 ‘꼰대’ 취급 받기 십상이다. 풍만한 살을 연상시키는 청춘문화싸롱의 ‘비만세트’는 매콤한 비빔면과 만두가 한 조다. 남자친구가 면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동안 여자친구는 만두 먼저 쏙 빼먹는다. 이름부터 웃음을 부르는 ‘긴밤지새우볶음밥’, ‘낙지랄볶음밥’ 등은 양도 푸짐하다. “네가 (밥값을) 쏘라”는 속마음을 대신 투영한 ‘간계토대왕밥 네가 쏘시지’도 비만세트처럼 간장 뿌린 계란밥과 소시지가 한 묶음이다. 청춘문화싸롱처럼 유머를 차림표에 버무린 곳이 있는가 하면, 만화에 대해 일관되게 진지한 태도를 간식에 섞은 곳도 있다. 즐거운 작당은 ‘명란버터라이스’, ‘고양이맘마’ 등 만화 <심야식당> 마니아라면 익숙한 음식을 차림표에 넣었다. 명란버터라이스에 숟가락을 푹 넣어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를 반복하니 코가 근질근질하다. 바다의 짠내와 구수한 흰밥이 섞여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향을 피운다. 혼자라고 눈치 볼 것 없이 남김없이 먹어치운다. 주인 김민정씨는 금방 만든 비빔짜장라면을 단골에게 주면서 “맛 평가 해달라”고 조른다. 신사동 섬도 비빔류가 최고 인기다. 섬의 ‘만두밥’은 ‘비만세트’처럼 만두와 밥이 한 조일 것 같지만 아니다. 냉동만두를 익히고 으깬 다음 밥을 얹고 일본식 간장, 참기름, 가쓰오부시를 뿌려서 비벼 먹는 음식이다. 이들 비빔류들은 넉넉한 양으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는데도 가격은 다른 식당에 비해 20~30% 싸다. 신개념 만화방은 지갑 얇은 20대들이 재미도 채우고 배도 채우는, 유쾌한 곳이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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