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수술대 오른 심정, 이름 빼고 다 바꿨다"
출처 스포츠경향 대구 | 안승호 기자 입력 2014.07.14 07:15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시간이 다시 없을 줄 알았다. 야구장 공기와 스탠드의 응원 소리마저 새롭다.
마치 수술대에 올라 사투를 벌인 끝에 새 생명을 얻은 사람처럼 하루 하루가 소중하다. 사실, 야구 인생에 메스를 댄 것과 다름 없었다.
이승엽(38·삼성) "선수 생명을 걸고 수술대에 오르는 심정으로 2014시즌을 맞았다"고 했다. 국민타자로 성공 역사를 함께 한 오래된 타격폼을 버리고, 아주 낯선 타격 자세를 선택했다. 말하자면 이름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꿨다.
↑ 삼성 이승엽이 10일 대구구장에서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하며 새 타격자세를 설명하고 있다. 대구 | 이석우 기자
↑ 삼성 이승엽이 스포츠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구 | 이석우 기자
수술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승엽은 전반기를 마무리 하며 지난 10일 대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만족하는 순간, 나태해지기 때문에 만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올해 전반기는 예상하고 계획했던 대로 잘 왔다"고 했다. 구체적인 성적을 두고도 "홈런 20개, 80타점을 목표로 잡았지만, 지금 성적으로는 조금 상향 조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야구 인생의 사이클이 바닥으로 내려간 것은 성적이 급추락한 지난해였다. 이승엽은 "2012시즌을 마치고 자만한 결과"라고 털어놨다.
이승엽은 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맞은 2012시즌 타율 3할7리에 21홈런 85타점을 거뒀다. 한 시즌 홈런 40, 50개를 거뜬히 때릴 때 폭발력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난관이라고 할 게 없었다. 더구나 한국시리즈 MVP가 되면서 복귀 시즌의 '화룡점정'도 찍었다.
"그때 바로 '한국야구에서는 잘 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너무 쉽게 본 것 같아요. 다음 시즌을 두고도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아니었어요. 생각과는 너무 다르게 갔습니다."
고난의 2013년을 보낸 이승엽은 올시즌 새 타법을 들고 나왔다. 타격 준비 자세에서 방망이를 세우던 것을 눕히고 스트라이드할 때 발을 드는 대신 땅을 스치듯 옮기고 있다. 이승엽은 "방망이가 나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라며 "타구가 맞고 안 맞고는 미세한 타이밍 차이로 갈리는 것인데 작년에는 조금씩 다 늦었다. 야구선수들이 쓰는 말로 방망이 중심에 맞히지 못하는 '미스 샷'이 많았다"고 했다.
이승엽이 새 타격 자세를 제안받은 것은 지난 시즌 중이었다. 이승엽의 침체가 길어지자 김한수 삼성 타격코치는 지금처럼 방망이를 눕혀 반응 속도를 줄이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승엽은 "그간 해왔던 것도 있고, 시즌 중이라 불안하기도 해서 감행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암흑 같던 2013년을 보내고 올시즌을 준비하면서 캠프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때리는 볼마다 타이밍이 조금씩 늦었기 때문이다.
"다 바꾸고 시즌을 시작했다고 보면 됩니다. 타격자세뿐 아니라 방망이와 글러브, 배팅 장갑, 스파이크, 언더셔츠까지 야구 하면서 쓰던 것은 모두 바꾸고 시즌을 시작했어요."
그만큼 이승엽은 절박했다. 개막 시점을 돌아보며 "올해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30대 후반 선수가 2년 연속 잘 못하면 이후 행보를 한번쯤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고 여겼고, 그래서 불안감 속에 시즌을 맞았다"고 했다.
어쩌면 2014시즌을 시작하며 남긴 것은 이승엽이라는 화려한 이름뿐이었다. 누가 봐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지난 3월29일 KIA와 개막전에서 잘 맞은 타구가 1루수 김민우의 다이빙캐치에 걸리자 "올해도 안되나,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튿날 3안타를 쳤지만 그래도 믿음이 없었다. 이승엽은 "단타는 나와도 장타가 나오지 않았는데, 장타가 나오면서 타격폼에서 확신을 얻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승엽이 재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경기로 지목한 것은 5월21일 포항 롯데전이었다. 이승엽은 그날 롯데 왼손 에이스 장원준으로부터 연타석 홈런을 뿜어냈다. 그날 5,6호 홈런을 때린 이승엽은 그 기세를 그대로 살려 6월에만 홈런 9개를 몰아치며 홈런수를 대폭 끌어올렸다.
새 타법으로 타격하는 길도 달리 찾아가고 있다. 이승엽은 국내무대에서 일본, 그리고 다시 국내로 돌아오며 다양한 볼배합을 경험했다. 다시 삼성 유니폼을 입었을 때만 해도 노림수를 갖고 타격할 때가 많았다.
"글쎄요, 몸쪽 높은 볼 하고 포크볼을 자주 봤던 일본에서 경험을 보자면 원스트라이크 투볼에 득점권에 주자가 있다면 거의 변화구 패턴이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 바깥쪽 직구가 펑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많이 놓쳤어요."
이승엽은 요즘은 '공 보고, 공 때리기'를 한다. 특정 구질을 노리기보다는 스트라이크존의 한 구역을 설정해놓고 직구 타이밍에서 볼을 기다린다. 공을 보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은 새 타법으로 반응 속도를 높인 덕분이기도 하다.
이승엽은 요즘 아들과 대화가 즐겁다. 네살배기 둘째 아들 은준이는 아직 어리지만, 큰 아들 은혁(9)이는 이제 야구를 제법 볼 줄 안다. 이승엽은 은혁이를 마주하면 한번쯤 목소리에 힘을 줘보기도 한다. 3연타석 홈런을 때린 지난 6월17일 문학 SK전 같은 경기를 치르고 나면 아들의 시청 소감을 꼭 확인한다. 공감하자는 것이다.
"은혁아, 아빠 봤냐? 제대로 잘 봤어? 어때 멋있지, 뭐 이렇게 제가 먼저 묻죠.이제 야구도 알고 아주 뭐 난립니다."
이승엽은 이 순간이 감사하다. 아들 앞에서 자랑스런 아빠가 되고 싶은 건 이승엽도 마찬가지다.
은혁이는 2005년 태어났다. 이승엽은 국내무대에 이어 일본을 건너가 요미우리 4번타자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2006년 이후 몇해 동안은 야구를 이해하고 보기에 너무 어렸다. 지난해에는 아들 선생님 선물로 한참 후배인 김현수(두산) 사인까지 받아주기도 했다. 이승엽은 이 대목에서 은혁이에게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빠가 이런 사람'이라고.
이승엽이라면 모두가 홈런을 떠올린다. 이승엽은 12일 현재 국내리그에서 홈런 377개, 한일통산 536개를 때리고 있다. 이승엽은 "부상만 없다면 국내 400홈런을 달성할 수 있겠다"며 1차 목표점과 거리감을 줄였다. 그러나 정작 이승엽이 향후 만족의 기준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통산 2000안타 달성이다.
이승엽은 국내무대에서 12번째 시즌을 뛰며 12일 현재 1635안타를 쳐내고 있다. 가정이지만 일본 무대 8년 공백만 없었다면 2500안타를 넘어 3000안타를 향해 달려있을 것이란 계산도 나온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8년에 대한 후회는 없다. 좋은 일도 그렇지 않을 일도 있었지만 나쁜 일조차 훗날 내게는 도움이 될 것"이라며
"2000안타는 다른 선수 성적을 기준으로 삼은 게 아니고, 8년 공백 등을 감안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나 자신과 약속"이라고 말했다. 이승엽은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다면 내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며 '너 참 수고했다', '너 참 고생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엽은 롱런 비결을 두고 "자신의 몸과 상황에 맞는 최적의 훈련을 하는 것인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는 데 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손가락 부상으로 훈련량을 늘리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풍성한 타격성적을 내고 있는 후배 박석민도 그 중 하나라고 했다.
이승엽은 지난해 타율이 2할5푼3리에 머무는 등 부진했다. 올해는 3할 타율에 30개를 웃도는 홈런에 100타점에 접근할 수 있는 페이스를 보이고 있다.
이승엽은 "프로야구 선수는 야구로 잘 해야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고 했다. "예전 같은 성적을 내고 있지만 못하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며 "작년에는 은퇴하라는 말도 듣고,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요즘은 어딜 가도 많이 격려해주셔 행복하다"고 했다.
후배들을 향해서는 "야구선수는 역시 야구로 말해야한다. 조금만 더 고생한다는 생각으로 사생활이라든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억제하면 야구를 통해서 많은 게 따라온다. 그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대구 | 안승호 기자 siwo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