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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닮은 여직원 성형수술 시킨 남자... 사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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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3. 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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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닮은 여직원 성형수술 시킨 남자... 사형까지

[중국 속에서 15년⑧] 2006년 중국 복심 담은 철마, 티벳 도착
오마이뉴스  2014.03.03 10:52 최종 업데이트 2014.03.04 10:47  조창완(chogaci)

 

 

중국에서 숫자 육(六 발음 류)은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류(流)와 발음이 같다. 때문에 재부를 뜻하는 팔(八 발음 빠), 오래오래 간다는 구(九 발음 지우)와 더불어 선호하는 글자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당대 중국에서 끝이 육자로 끝나는 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다. 1966년 3월초에는 허베이성 싱타이(邢臺)에서 지진이 시작되어 3월22일에는 진도 7.2의 대지진이 발생해 중국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자연의 공포 못지 않게 인간의 공포도 무서웠다. 5월16일에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공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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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왕푸징에 있는 라오서 기념관 홍위병들에게 모욕을 당한 작가는 태평호에 몸을 던져 시대를 마감했다. 하지만 문혁의 신호탄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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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파로 인해 8월24일에는 중국의 저명한 작가 라오셔(老舍)가 베이징 동북부에 있는 타이핑후(太平湖)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낙타상자> 등 저명한 작가였지만 홍위병들의 조리돌림에 수치심을 느끼고 자살함으로써 비극적인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1976년은 더욱 그랬다. 새해가 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은 1월 8일.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던 정치인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영면했다. 저우 총리의 추도식인 4월5일에는 덩샤오핑 복권을 요구하는 45운동이 일어났다. 7월1일에는 루산회의의 희생자 장원톈(張聞天)이 사망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인 7월6일 중국 군인의 상징적인 인물인 주더(朱德)가 사망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7월28일 허베이성 탕산을 진원으로한 7.8 진도의 강진이 발생해 공식발표로만 24만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9월 9일 지금은 신이 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후에 중국 군부 원로인 예젠잉이 화궈펑(華國鋒), 왕동씽(汪東興) 등과 힘을 합쳐 4인방을 체포하면서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30년 여가 지난 2006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올림픽이나 엑스포 등을 앞둔 자신만만한 시기였다. 1월이 시작되자 마자 전해의 경제성장률이 9.8%에 이른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는 예상치인 9.4%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로 거대한 중국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뿐 아니라 그해 2월28일 외환보유고가 8537억 달러를 기록해 일본을 제치고 외환보유고 1위 국가로 등극했다.

 


중국 경제 성장의 낙수효과를 확실히 본 곳은 한국이었다. 전해 한중 간의 교역규모도 1006억 달러였는데 한국의 무역흑자가 200억 달러로 중국 성장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해 설날에는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타이베이 간 특별기가 운항해 주목을 끌었다.

 

춘지에를 앞둔 1월25일 베이징 쇼우두 공항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열린 대만행 귀성 전세기를 취재했다. 정기항편은 이보다 3년여가 지난 2008년 12월에야 개설됐지만 2006년 춘지에 귀성편이 그 첫걸음이 됐다.

 


그해에도 봄이 되자 나는 황사 근원지를 찾아갔다. 특히 그해 겨울 황사근원지의 강수량도 작고, 기온이 높아 황사 발생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긴장된 마음으로 꼼꼼히 점검했다. 3월 14일에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황사, 3년간의 침묵깨고 다시 분다'는 기사를 올렸다.

 

그해 지독한 황사들이 4월말까지 한국을 유린했다. 황사가 심해야 주목받을 수 밖에 없는 황사 전문 탐사꾼의 생활도 그해를 기점으로 지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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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혁명공원의 중조협의기념정 1927년 12월11일 광저우에서 벌어진 봉기에서 한국인 150여명이 사망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 먼 곳에까지 가서 혁명에 참여한 이들로 인해 중국은 두 나라가 피를 나눈 것을 기념하는 정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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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 집주변 키오스크를 지나다가 재미있는 기사가 눈에 띄어 오랜만에 주간지를 집에들었다. '한국인은 왜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할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것은 남두조우칸(南都週刊)이라는 주간지였다.

 

칭화대 중문과 쾅신니엔(曠新年) 교수가 쓴 이 글에서 한국인이 술 마시는 이유를 한국이 4대 대국의 사이에 포위되어 있어 긴장되기 때문에 술이 필요하다는 좀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원고 안에 있는 내용은 한(漢)나라 이후 중국과 끝없는 전쟁과 융합관계 속에서도 독립국가로 완강히 생존한 것이 기적이라는 말로 끝나서 그런대로 봐줄만 했다.

 


이 정도는 애교라고 볼 수 있지만 중국인들의 한국관은 두 나라 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또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이 시기의 한국관은 그런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활동했던 위대한 혁명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에 대한 나름대로 부채의식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한국은 해방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 나름대로 흠모하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경제교류에서 중국 의존도가 커가고, 한류가 중국 대중문화와 접목되면서 복잡한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강원도가 강릉 단오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중국 내에는 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발생한 전통 명절을 한국이 가져갔다는 오해에서 부터다. 이런 논란은 다른 사안이지만 중국의 고구려사와 발해사 등재 등 곳곳에서 논란거리로 남았다.

 

단오는 굴원의 투신에서 유래된 중국 전통 명절이 확실하다. 반면 강릉단오제는 이 명절이 지역 문화와 융합되어 독특한 특성을 가진 것이다. 강릉 단오제는 단오라는 중국 명절의 가치를 더욱 높인 것인데, 이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서로에게 오해를 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한중 간을 서로 이해해 완충장치를 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나 기구가 없다는 것이 뼈저렸다. 중국 전문가도 많고, 한중 우호단체도 많았지만 이런 갈등을 풀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외교관에서도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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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하이의 문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 웨이하이는 한중간 처음 정규 항선이 운행했던 도시다. 한국에 건너온 화교들도 이곳 출신이 많고, 외교관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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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한국대사를 지낸 리빈이 산동성 웨이하이 부시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던 리빈은 2001년 9월부터 4년간 한국대사로 근무한 지한파였다. 그를 전후해 한국 대사로 근무한 인물은 장팅옌 초대대사를 시작으로 우다웨이, 리빈, 닝푸쿠이,청융화, 장신썬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어가 능한 대사는 리빈과 닝푸쿠이였는데, 특히리빈은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남북한에 익숙한 한반도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1년 후에 중국 정계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훗날 북한 관련 정보를 한국과 미국에 제공했다는 설과 술자리에서 비밀을 누설했다는 설이 있지만 한반도 통의 비극적인 퇴각은 한국의 대중국 외교에도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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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장철도도 쉬어가는 쿤룬산 입구 해발 4767미터의 쿤룬산 입구는 청장철도의 고지대 시작을 알리는 지점이다. 이후에는 탕구라산 등 고지를 넘어야 티벳에 닿는다. 성모가 산다는 곤륜산의 전설은 이렇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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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일 칭장철로가 개통했다. 칭하이성 꺼얼무(格爾木)에서 시장의 성도 라싸로 가는 먼 여정이었다. 길이로는 1142킬로미터로 길다고 볼 수 없지만 평균해발 4000미터에 가장 높은 탕구라산 입구는 해발 고도 5072미터의 만년설 지역이다. 이로써 1980년대 중반 중국을 철도로 여행하고 "쿤룬산맥으로 인해 기차는 영원히 라싸에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쓴 폴 서로우의 글은 오류가 되고 말았다.


나는 중국 인민일보의 초청으로 철도가 개통된 지 한 달 반여가 지난 8월 13일부터 칭장 철도의 전 구간을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선 구간인 시닝에서 꺼얼무까지의 철로도 소금평원 구간에 있는등 신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짚차와 기차 등으로 20여 간 같이한 이 길은 나에게 티벳이라는 복잡한 심사가 겹쳐 만감이 교체했다.

 

티벳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89년 톈안먼' 만큼이나 민감한 단어다. 1959년 3월 12만명의 티벳인이 희생되는 와중에 티벳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피신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던 달라이 라마는 수차례 돌아가기 위한 협상을 했지만, 중국의 위상이 커갈수록 그의 행보도 어려웠다.

 

하지만 뛰어난 영적 능력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종교 지도자로서 존재했다. 하지만 그의 수명이 다해갈수록 위태로울 수 밖에 없다. '관음보살'의 환신인 달라이 라마는 '아미타불'의 환신인 판첸 라마와 후대를 지명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지금 상태에서는 정식적인 승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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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쩌방스 잔푸 행사 티벳 불교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쩌방스의 탱화 펴기 행사. 티벳 불교의 지도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행사를 한다. 단 달라이 라마는 오랫동안 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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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티벳의 운명은 이미 다양한 비극이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티벳의 승려는 끝없는 소신공양과 저항으로 티벳 종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6년 8월23일 티벳 불교의 가장 큰 행사인 쩌방스 짠푸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황교 최고의 사원인 거루파(格魯派)의 중심사찰인 저방스(哲蚌寺)의 뒷에 있는 샤이푸타이 옆에 1800평방미터의 불상을 펼치는 행사다. 산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는 이 행사로 라싸는 발 디딜틈 없이 붐볐다.


라싸의 가장 큰 인상은 이제 이곳의 주인인 장족(藏族)은 거의 없고, 쓰촨 등에서 온 외지인이 이곳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생활하던 궁전인 노브림카는 같은 시기에 열리는 쉐둔지에로 인해 시장판 같이 되어 있었다. 장족 소녀는 행사장 한켠에 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해 9월 9일 베니스영화제에서 지아장커 감독이 <스틸라이프>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중국명 '산샤하오런'(三峽好人)인 이 영화는 산샤 수몰 과정 속에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을 담고 있는 영화다. 5세대의 대표주자인 장이모나 첸카이거 등이 대형 상업영화로 흘러간 자리에 돋아난 6세대의 감독들은 소외된 중국에 시선을 던졌고, 그 가장 큰 성취가 지아장커 감독을 통해 드러났다.

 

6.4 천안문의 상흔을 안은 그들은 화려함보다는 혼돈 속의 중국을 담는 것을 선호했다. 지아장커 역시 척박한 고향인 산시성 펀양(汾陽) 등을 배경으로 한 고향3부작으로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왕슈오슈아이, 장위앤 등 6세대 감독들은 여전히 거칠은 작품 세계로 당국을 긴장시키는 추세다.


2006년이 끝나갈 무렵 중국의 변화를 말해주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주인공은 전 중국은행 홍콩유한공사 총재로 당시 54세였던 류진바오였다. 고교 시절 짝사랑하던 급우에게 연애편지를 보냈으나 퇴짜 맞았던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 36살에 중국은행 상하이분행 부행장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41살인 1993년 5월에는 행장대리까지 맡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장 환영식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첫사랑을 닮은 선전부의 여직원이 눈에 띈 것이다. 그는 곧 그녀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했고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이후 류 총재는 그녀에게 첫사랑과 더 닮아지는 성형수술을 권했다. 처음에는 무심히 넘겼지만 류 총재가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자 이 여인 역시 한국, 홍콩을 오가며 성형수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류 총재는 국가에 한화 650억 원 가량의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권력을 가진 남성이 첩을 갖는 얼나이(첩) 문제는 이미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부유한 상인뿐만 아니라 공산당 간부인 관료들까지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대적인 척결을 나서기도 했지만 이미 사회전체에 깊숙이 들어온 상태여서 제어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얼나이를 두는 비용은 적게는 일년에 한화 1000만원 정도면 가능해 홍콩과 맞닿고, 부호가 많은 광둥성 선전 등지에는 얼나이촌에 생길 만큼 번성했으며, 광둥성의 일제단속에 걸린 부패 관료들은 100%로 얼나이를 두고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부자되는 본성을 찾은 동시에 과거의 폐습도 역시 찾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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