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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인기 끌었을 때, 중국이 김치 주도권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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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14. 2. 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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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 인기 끌었을 때, 중국이 김치 주도권 잡아

[중국 속에서 15년⑦] 2005년 정치 라이벌 짜오즈양과 장쩌민 시대 종결
오마이뉴스  2014.02.26 18:33 최종 업데이트 2014.02.27 10:20  조창완(chogaci)

 

 

 

2005년 1월 17일 사람들은 귀성행렬로 분주했다. 나 역시 설날 귀성 인파 취재를 위해 베이징 서역에서 이창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 때에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 영면했다. 향년 85세의 짜오즈양(趙紫陽 1919~2005). 그는 1978년 정협 부주석으로 중앙 무대에 들어와 1980년 4월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된 후 5개월 만에 국무원 총리에 올라 가파른 상승곡선을 탄 주인공이었다.

 


다음해 6월에는 중공중앙 부주석에 올랐다. 대과 없이 시간을 보낸 그는 1987년 1월에 열린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중공중앙의 대리 총서기를 거쳐, 같은해 11월에는 중공 13기 1중 전회에서 중앙 총서기에 당선됐다. 나이가 좀 많았지만, 이런 흐름이 지속된다면 그가 덩샤오핑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1989년 6월이 왔다. 그리고 천안문의 비극이 왔다. 혼란 속에서 짜오즈양은 진압이라는 덩의 명령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은 그보다 7살 어린 장쩌민이었다. 장은 그를 대신해 6월에 국가주석에 올랐고, 11월에는 군사위 주석까지 올라 순식간에 거대한 중국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장쩌민은 태상황 덩샤오핑을 잘 모시다가 1997년 덩이 죽자 중국의 실권자가 됐다.

자신을 제치고 중국을 장악한 장쩌민이 중국을 만드는 사이, 짜오즈양은 베이징의 사합원에 연금되어 쓸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여정을 테잎으로 남겼고, 이 기록은 2009년 5월 홍콩을 시작으로 출간된 '국가의 죄수'를 통해 상세히 알려졌다. 이 책을 통해 자오는 톈안먼의 유혈 사태가 러펑 총리 등이 주도했지만, 덩샤오핑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소위 정치 대결에서 그가 실패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때로 죽은 제갈공명이 사마중달을 위협하듯 짜오즈양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공포스러웠다. 1976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죽은 후 동요가 있었던 4월 5일이나 1989년 후오야오방의 추도식에 맞추어 사건이 일어났던 6월 4일 모두가 공포였다. 하지만 두 날 모두 톈안먼은 철저한 감시가 이뤄졌고, 질주하는 경제로 인해 민주화란 단어는 더욱 먼 느낌이었다.

 


때 맞추어 장쩌민은 이해를 마지막으로 정치 권좌에서 내려왔다. 3월 8일 전인대 10기 3차회의에서 장쩌민 주석의 국가 군사위 주석 사임안을 통과시켰다. 군사위 주석을 후진타오가 이어받음으로써 사실상의 권력승계가 평화적으로 끝났다.

 

마오쩌둥은 화궈펑에 정권을 넘기려 했다가 실패했고, 덩샤오핑에서 장쩌민으로 실권이 넘어갈 때 문제가 있었던 반면에 이번 후계 작업은 평화적으로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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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의 대표적인 코리아타운인 왕징 신청 사진은 가장 오래된 단지인 4구 지역 아파트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오른 임대료로 인해 한국 사람들의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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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는 우리 가족이 베이징에서 첫 생활을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톈진에서 5년여를 살다가 이사 온 베이징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동아시아 최대의 신도시를 목표로 건설되던 왕징은 중국 최대의 코리아타운이었기 때문에 중국 말 한마디 못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은 왕징 3취 아파트의 한 문으로 연결된 집 두 칸을 얻어 하나는 생활집으로 하나는 사무실로 썼다.

 


왕징 3취 아파트에 사무실겸 생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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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사 시절 직원이자 동반자 였던 영훈이 열하기행을 위해 네이멍구 사막으로 갔을 때 장난삼아 활을 쏘는 모습. 지금은 베이징 교외에서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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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만났던 가장 소중한 인연은 최영훈 팀장이다. 직원이 필요하자 주변에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 가운데 최영훈팀장이 있었다. 옌지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투 출신의 최팀장은 부모님이 한국으로 돈벌러 떠난 후 고향에서 자란 전형적인 조손가정의 청년이었다.

 


학력은 낮고 여행사 경험도 없었지만, 짧은 만남으로 정직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최팀장은 2008년 우리 가족이 급작스럽게 귀국한 후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베이징 사무실을 꾸려가는 등 그 신뢰를 지켰다.

 


다만 내가 여행사업에서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같이할 일도 적어지고, 거리가 멀어 만날 수 있는 일들이 줄어서 이제는 서서히 멀어지는 인간관계다. 지금은 베이징에서 반찬가게를 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최팀장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가장 신뢰하고, 멀리 같이할 친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내 중국에서의 인간관계에 큰 오점은 없다. 그런데 한국 사람과는 별로 좋지 않은 인연이 있다. 나를 찾아와 직원으로 같이하다가 회사가 합병하는 도중에 중국 동포 사장에게 건너가면서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 한 친구가 가장 안타까운 인연이다. 그 사이에 만났던 중국 동포 사장도 나에게는 뼈저린 기억이지만, 동업이라는 어려운 숙제 속에 있었던 만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 비해 최 팀장은 나에게 중국 동포에 관한 많은 생각을 해준 동생이다. 부모님이 떠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때로는 거칠게 크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당당하게 했던 믿을 만함 동행이었다. 최 팀장 또래의 조손가정은 사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중요한 화두다.

 


분단 상황에서 중국 속 동포들은 높은 학력과 창의력 등을 바탕으로 과학, 교육은 물론이고 군계에서 나름대로 큰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찾아온 돈벌이에 역량이 집중되면서 이런 동포 사회의 힘은 약화됐다. 특히 부모가 떠난 후 조부모 사이에서 자라나 조손가정으로 불리는 동포 3~4세대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세대들은 나름대로 정체성을 가지면서 최 팀장처럼 그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5월 23일 일본을 방문 중이던 중국 국무원 우이(吳儀) 부총리가 23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의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귀국 길에 올랐다. 이유는 앞선 16일 고이즈미 총리가 중의원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외국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며 참배 강행 의사를 비친 것이 중국을 자극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1938년생의 우이 부총리는 쑹칭링이나 덩잉차오 이후 중국 여성 정치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베이징석유대학을 졸업한 테크노그라트로 대외통산분야에서 성장해 부총리를 역임한 여걸이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칼라 힐스와 지적재산권 다툼을 할 때 밀리지 않았고, 2003년 사스때는 위생부 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혼란을 극복했다.

 


그녀는 WTO 가입이나 상하이 엑스포 유치 등을 주도하는 등 중국 당대 여성정치인으로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다. 그녀를 잇는 여성 정치인으로 17기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류옌둥이 진입했지만, 우이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해 우이의 일본 총리 면담 거부는 중국이 가진 근대사에 대한 입장을 잘 대변한다. 특히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문제는 물론이고 오키나와 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은 영토나 해양문제가 겹쳐서 더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갈수록 더 나쁜 상황을 향해가고 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2009년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있었다. 하지만 변화는 담보되지 않았다.

 


자국 과거사에 대한 사죄의 자세가 없고, 일반인들의 인식안에 분쟁 영토나 독도 등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그대로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인 아베 신조가 수상인 상태여서 이런 상태는 더욱 고착되어 동아시아 갈등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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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가 자리났던 항저우 지역 위화의 고향은 하이옌이지만, 항저우로 이사해 이곳에서 생활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항저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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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1일에는 중국 출판계를 흥분시키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당대 중국 문단의 거목 위화(余華)의 신작 '형제'(兄弟)가 출간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매체는 '허삼관 매혈기' 이후 근 10년 만에 내놓은 그의 신작 장편소설에 적지 않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60년 저지앙 하이옌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릴적부터 항저우에서 생활한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특유의 포르말린 느낌과 항저우의 겨울 날씨 같은 멜랑콜리한 정서를 소설에 담고 있는 작가다. 그의 신작 <형제>는 그의 소설 가운데 규모가 제법 큰 소설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항저우에서 멀지 않은 신흥 상업도시 이우와 같은 곳이다.

 


어릴 적부터 사고뭉치였던 이광두와 그의 배다른 형제 송강의 곡절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개혁 개방이후 급속히 변모하는 중국 도시에서 중국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잘 녹여내고 있다. 지나친 행동으로 착한 형이 죽고, 스스로는 처녀대회를 여는 등 괴물이 되어가지만, 결국은 형의 유골을 우주로 보내는 계획을 세우는 조금 황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당대 중국을 살아가며 혼돈에 빠진 중국 사람들을 잘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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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콘텐츠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이는 후난텔레비전 청사 '대장금' 등 한국 콘텐츠의 유통은 물론이고 '슈퍼 보이스 걸' 등을 만들어 상당한 시청률을 올리는 방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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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국 문화계를 흔든 가장 거대한 키워드중 하나는 <따창진(大長今)>이었다. 그해 1월 5일 홍콩무선텔레비전(tvb)에서 첫 방송된 <대장금>은 중국 내륙에서는 중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후난위성에서 9월부터 방송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건강, 음식, 여성의 성공 등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것들을 잘 조화시킨 대장금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만한 요소를 완벽히 녹여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대장금은 중국내 한류의 정정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했다. 1997년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사랑이 뭐길래>를 원조로 시작된 중국 텔레비전의 한류는 이해 대장금을 정점으로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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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옌타이 과수 박람회장 옌타이는 중국에서 과일로 가장 유명하다. 해마다 9월이면 과일채소박람회를 개최해 중국 내 신선식품 메카가 되고 있다.
ⓒ 옌타이과채박람회 조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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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한국에서는 중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커 갔다. 봄부터 기생충 김치 등 중국산 수입 농산물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방송 코디네이션으로 뛰던 나도 KBS 스페셜팀의 현지 취재를 맡게 됐다. 코디네이션을 시작하면서 내 전제 조건중 하나는 중국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 상황을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내부를 들여다보니 문제가 되는 김치는 영세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현지에서 생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산동에서 생산하는 고춧가루 등 양념이나 원재료는 분명히 문제가 없었다.

 


수입업자인양 위장해 칭다오 인근 식품공장을 방문해 위장취재를 했다. 하지만 문제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 지역의 고추는 품질도 좋고, 색깔도 좋아 굳이 색소를 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담당 PD는 색소를 타는 등 문제가 있는 장면을 꼭 촬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주고 중간에 일을 그만 두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김치 파동 이후 한국 사람이 하는 영세한 김치공장은 문을 닫고, 일본이나 대자본의 중국 식품기업이 김치의 주도권을 갖게 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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