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남자로 산 흑인 집사, 세월을 이기다
[리뷰]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미국 흑인 현대사를 되짚다
오마이뉴스 2013.11.27 17:18l최종 업데이트 2013.11.27 17:18l 나영준(ns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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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명의 대통령을 모신 흑인 집사를 통해 미국 흑인 인권에 대해 짚어 본 영화 <버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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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권력자의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킨다. 어떤 밥을 먹고, 어느 공간에서 지내는지, 업무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지 등. 흔히 구중심처라고 불리는 지도자만의 공간, 그곳에서의 평소 모습은 소문과 상상을 더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미국 백악관에서 8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집사 생활을 한 이가 있다. 유진 앨런. 흑인이다. 1952년 트루먼을 시작으로 1986년 레이건에 이르기까지 34년간의 엄청난 기록이다. 탁월한 성실성은 물론, 보고 들은 많은 것들을 입 밖에 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가 남긴 인터뷰를 기초 삼아 영화가 만들어졌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다. 영화에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백악관의 모습이 담겨져 있지만, 단순히 엿보기를 통해 흥미를 자극하는 작품은 아니다. 집사로서 바라본 권력자의 모습이 아닌, 흑인으로 그가 감당해내야 했던 20세기 질곡의 역사가 담긴 작품이다.
늘 백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아채야 했던 흑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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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집사로 인정 받아 백악관에 들어가게 된 세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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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대부분의 흑인이 그렇듯, 남부 농장에서 노동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세실(포레스트 휘태커). 하지만 아내를 강간하려던 주인의 총탄에 숨을 거두는 아버지. 아무렇지 않게 시신을 끌어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풍경.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세계의 경찰대국, 미합중국에서 벌어지던 일이었다.이후 침묵에 길들여지며 주인댁의 시중을 들던 소년은 가난과 억압에서 도망치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나간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흑인소년에게 결코 녹록하지 못했다. 창문을 깨고 음식을 훔치다 발각되고 만다. 다행히 목격자는 흑인. 그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간청한다. 백인들의 시중을 잘할 수 있다고.평소 백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잘 알아챈 세실은 승승장구해 뉴욕의 고급 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흑백차별 정책에 조소를 보내는 백인상류층을 대접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일체 드러내지 않는 세실. 이런 자세를 유심히 지켜본 백악관 관리자에 의해 그는 최고 권력자의 집사가 되는 영광을 맞는다.당시의 흑인으로서는 손에 꼽히는 자리에 오르게 된 세실. 하지만 그가 담당하는 일은 여전히 침묵 속에 1인자의 시중을 드는 것뿐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되고, 아무것도 들어서도 안 되고 들으려 해도 안 되는 자리. 바로 그것이 대통령의 집사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 세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은 아들,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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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사는 아들과 갈등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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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정된 생활 속 그는 아내 글로리아(오프라 윈프리)와 두 아들을 두었다. 여전히 세상은 흑인들을 함께 사는 이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시끄러웠지만 그건 자신이 떠나왔던 남부 쪽의 일로 여기는 세실.그런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고, 백인들의 노예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큰 아들은 흑인인권 운동에 뛰어들고 백인우월주의자들 KKK단의 습격까지 받는다. 아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세실. 이렇게 살 만한데, 무엇이 불만인지, 왜 시끄러운 운동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드는지 분노에 휩싸이고 만다.결국 아들과 인연을 끊고 자신의 일에만 광적으로 몰두하는 세실. 백악관 구경이 소원인 아내의 간청도 귓등으로 지나간다. 허탈함과 외로움에 빠진 아내는 알코올 중독에 물들어간다. 여전히 밖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직업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가정에서 멀어진 세실의 상실감도 깊어져 간다.그런 그의 곁으로 현대사의 산 증인들. 미국의 대통령들이 스쳐 지나간다. 보고 듣고 느끼며 세실도 조금씩 변해간다. 마침내 백악관에서조차도 흑인들은 백인 임금의 40%밖에 못 받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 세실. 그가 바꾸어 나가려 하자,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마침내 그가 죽기 전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흑인이 당선된다.
눈부신 호화 배역진들, 깊은 내용만큼 볼거리도 풍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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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연 포레스트 휘태커는 물론 호화 배역진의 훌륭한 연기도 빛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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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가 모신 대통령들이 주인공이 아니다. 흑인으로서 현대사를 건넌 세실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그렇긴 해도 작품에 등장하는 배역진에 눈이 가는 것도 사실. 아이젠하워 역의 로빈 윌리엄스, 닉슨 역의 존 쿠삭, 낸시 레이건 역의 제인 폰다 등이 출연, 개성 넘치는 행동은 물론 꼭 빼닮은 외모까지 재현해낸다.세월의 잿더미를 담담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주연 포레스트 휘태커의 명연기는 물론이고 아내 역을 맡아 명불허전의 활약을 보여준 오프라 윈프리도 빼놓을 수 없다. 방송보다는 본업인 연기의 옷이 그녀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농장의 '하우스 니거'에서 출발해 백악관의 집사로 살아온 주인공의 삶은 현대의 흑인운동 궤적과 맞물리며 역사의 현장 고비마다 목격자로 서게 된다. 최고 정책 시행자로서 대통령들이 흑인과 그들의 인권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고민했는지도 영화 곳곳에 스며있어 흥미를 더해준다.아버지부터 시작해 본인과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의 이야기가 극적이진 않지만, 담담하게 표현된 이 영화, 잔잔하지만 얕지 않은 감동이 배어나온다. 흑인들이 간절히 꿈꾸고 목메어 바라던 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실제가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질곡의 역사 뒤에는 달콤한 감격이 기다림을 영화는 뭉클하게 표현했다. 주연배우들의 아카데미 수상이 유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