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엇이 B급? …저예산에서 출발…작품(범죄·호러·코미디·풍자…) 소재로 판단
매경이코노미 입력 2012.09.03 09:53
"너는 B급이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A급은 아니어도 바로 밑단계니 괜찮다'며 미소를 띨 수도 있겠다. 대학에서도 B학점은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점수니까. 반면 '넌 실력 없고 수준도 떨어진다'는 뜻으로 언짢게 여길 수도 있다.
B급에 대한 해석은 참 어렵다. 저예산이나 범죄, 포르노 영화, 인디음악, 무협지, 판타지소설, 웹툰 등을 B급이라 부르면 정서상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나 '도대체 B급이 뭐냐'고 캐고 들어가면 학술적으로 내려진 정의는 없다.
↑ 여성 걸그룹 2NE1이 키치 스타일 옷을 입고 공연하고 있다.
그나마 명쾌하게 성격을 규정지은 건 영화계에서다.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선 동시상영 영화관이 유행했다. A급 할리우드 영화와 함께 일종의 끼워팔기용으로 상영한 게 B급 영화(B-Movies)다.
제작비가 싸고, 소재와 형식도 대중의 즉흥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한물간 스타나 무명배우를 써서 싸게 제작한 영화였다.
주류에 대한 반감 정서 깔려
B급 영화의 제왕이라 불린 로저 코먼이 자서전에서 "300편의 이상한 영화를 만들어 280편에서 이익을 냈다"고 밝혔듯 B급 영화의 관심은 철저하게 돈에 맞춰져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젊은 비평가들이 B급을 예술영화의 개념으로 재조명했지만 '저예산'이라는 꼬리표를 떼지는 못했다.
1930년대 등장한 '키치(kitch)' 문화도 B급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키치란 '싸게 만들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verk itschen)에서 유래된 말로 초점은 싼 제작비였다.
이후 통속 취미에 영합하는 저속한 예술작품으로 확대 해석하고 가벼움, 유치함, 촌스러움 등이 키치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키치 문화는 일부러 천박한 방법을 동원해 엄숙한 기성예술을 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B급 판정기준은 돈이 아닌 내용으로 바뀌는 게 문화계 추세다. B급 영화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저예산이 아닌 자극적인 소재 영화를 B급으로 평가하는 사례가 늘었다.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145억원의 거액을 쏟아부은 영화 '도둑들'은 저예산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B급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가벼운 도둑 얘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B급 냄새를 풍긴다.
철학적인 시각에서 B급은 주류 문화에 대한 반감과 새 영역으로의 도전으로 풀이된다. 고상한 주류 문화가 채울 수 없는 대중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 문화'가 대표적인 B급 사례다. 닫힌 질서를 부정하고 인간성 회복을 주창한 히피는 처음에는 B급으로 취급받았지만 이후 히피 기치를 내건 록페스티벌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새 장르를 열었다. 일본의 오타쿠(御宅) 문화도 B급으로 분류된다. 오타쿠는 애니메이션이나 SF 영화 등 특정 하위문화에 깊숙이 빠져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B급은 기성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문화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키치·차브 문화와 같은 맥락
2005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실린 신조어 '차브(Chav)'라는 용어에서도 B급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차브는 애당초 하류계층의 문화적 취향을 의미하는 집시어 '차비(Chavi·로마어로 어린이를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통했다.
번쩍이는 싸구려 금붙이를 주렁주렁 달고 짝퉁 브랜드의 야구모자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이가 바로 차브 스타일이다. 세련미와 동떨어진 악취향의 청소년 문화를 의미하던 차브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젊은이의 고유한 문화적 취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다.
과거 B급은 소수만의 문화로 치부됐지만 최근 들어 최상위층 아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는 추세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과거 비주류로 치부됐지만 지금은 주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기획돼 나오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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