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든 그렇다. 그 사람이 뭘 좀 알고 떠드는지, 모르고 떠드는지 몇 마디만 나눠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탁상시계라도 줘보라. 뚜껑을 열고 내부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진짜고, 잔뜩 인상을 쓰면서 바깥을 쓰다듬고 있으면 가짜다.
예컨대 이런 거다. 19세기 중국은 왜 낙후했을까? 그게 다 무능한 서태후 때문이라거나, 혹은 욕심쟁이 위안스카이 때문이라거나, 혹은 만연한 부정부패 때문이라거나, 혹은 아편중독 때문이라거나, 혹은 난립한 동북의 군벌 때문이라거나, 혹은 서구열강의 침략 때문이라거나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은 보나마나 가짜다.
아는게 통 없는 사람이다. 외부의 거창한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그거 다 결과론일 뿐. 안쪽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당시 중국이 낙후한 이유는 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장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비유.)
루신의 아큐정전을 읽어본 사람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뭔가 빠져 있다. 내부에 당연히 있어야 할 포지션들이 없다. 마을은 있는데 이장이 없다. 양반도 없다. 어른도 없다. 뭔가 겉돌고 있다. 아큐가 누구를 찾아가서 의논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낙후한 후진국들 보면 대부분 이장이 없다. 제대로 된 족장이 없다. 족장을 자처하는 자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내막을 알아보면 암것도 아닌 자가 내가 족장인데 하고 나선 거다.
현지를 방문한 외부인이 족장을 찾으니까 그 자리에서 족장이 문득 발생한 것이지 원래 그곳에 족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수요에 따라 공급하는 것이다. 뭐시라? 족장이 필요하다고? 그렇다면 까짓거 내가 족장하지 뭐. 여기 족장 계시다고 전해. 시장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조선도 비슷했다. 당시 골치아픈 외교문제는 중국에 떠넘기면 되었기 때문에 책임자가 없었다. 시스템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의사결정을 잘못한 것이 아니고 의사결정할 확실한 주체가 없었다. 혹은 약했다.
인디언은 추장이 없다. 추장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백인들의 생각이다. 추장이라고 알려진 사람은 그냥 부족의 유력자일 뿐이다. 시팅불과 크레이지호스 중에서 누가 리틀빅혼에서 제 7기병대와 싸웠는지는 불분명하다.
정답은 원래 없다. 인디언은 추장이 없고, 추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백인들이 신문을 찍기 위해 붙인 것이다. 추장이 없는데 전투를 한다? 이해가 안 된다. 말이 안 되잖아. 누가 추장이야! 이름을 대라고. 아무나 한 명 대 봐!
시팅불은 훙크파파족의 유명한 무당일 뿐이고, 크레이지호스는 오글라라족의 이름난 전사일 뿐이다. 당시 그들이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했지만 우연히 일이 그렇게 되었을 뿐 그들이 부족에 의해 선출된 확실한 지도자는 아니다.
인디언 부족의 지도자들은 대개 백인들이 제조한 것이다. 백인들이 계속 싸움을 걸어왔고, 대부분 떠났지만 몇몇 인디언들은 끝까지 남아 싸움을 했고, 싸움에 져서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보니 유명해져서 지도자가 된 것이다.
분명히 말한다. 인디언 사회에는 추장이 없다. 단지 일시적으로 추장처럼 행동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백인들의 침략 때문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그게 다 시골 신문사의 작품일 뿐이다.
덧붙이자면 서부시대 무법자 이야기도 대개 시골 신문사가 날조한 거다. 다만 그런 찌라시 소설을 쓸만한 단서가 되는 사건은 몇 건 있었다. OK 목장의 결투 좋아하네. 또라이들의 우발적인 총격전에 불과하다.
요즘 말로 하면 일진 비슷하다. ‘일진회’라는 것은 경찰이 지어낸 가짜다. 그런거 없다. 조직이 없다. 그냥 반에서 잘 나가는 몇몇 애들과 그 주변의 추종자들이 있을 뿐이다. 수학여행 갈 때 버스 맨 뒷줄 가운데 앉는 녀석이 일진이다.
조폭은 직업이 아니라 속성이라는 말이 있다. 경찰이 조폭을 잡으려 하나 간판걸고 일하는 조폭업 종사자가 없기 때문에 잡지 못한다. 겉으로는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가 생기면 폭력으로 해결하는 자가 있고 그들이 휘하에 애들을 거느리고 있으면 그게 조폭이다.
합숙소 같은 것을 구해 놓고 젊은 애들을 깍두기로 만들어서 모아놓은 집단도 많다. 그 깍두기들은 제대로 된 조폭이 아니다. 꼴망파니 목공파니 남문파니 하는 이름은 경찰이 그냥 붙인 것이고 조폭은 이름이 없다.
알고보면 대한민국 조폭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거대한 하나의 조폭집단이 있으며 그 안에서 형님, 동생 하면서 안면 트고 경조사에 얼굴 내미는 자가 조폭이다. 조폭의 실체는 애매하나 조폭의 속성은 분명하다. 암암리에 연결된 일종의 인맥집단이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것도 계급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클럽이라는 말이 있다. 양반이 따로 있는게 아니고 양반집에 출입이 허용되면 곧 양반이다.
청나라를 말아먹은 서태후는 자신이 일국의 지도자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자기 입장에서는 단지 왕실의 한 어른일 뿐이었다. 그러니 잘못한게 없다. 추장이 아니니까. 국가의 대표자가 아니니까. 이는 명성황후도 비슷하다. 서태후나 명성황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봉건시대의 시스템을 이해 못한 것이다.
서부시대 시골 찌라시 신문사가 소설 쓸 요량으로 '아무나 한 명 대봐. 니가 추장이지?' 하고 한 명을 지목하듯이 서태후를 지목한 것이다. 누가? 당신이. 왜? 포지션의 필요에 의해.
러시아는 야당이 없다. 형식적인 야당은 있는데 제대로 된 야당은 없다. 역시 시스템이 없다. 이장이 없다. 중앙의 몇몇 명망가들이 홀로 떠들 뿐 조직이 없다. 우리가 푸틴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달려들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징기스칸은 이장을 뽑았다. 그리고 성공했다. 금나라의 맹안모극제에 기초하여 10진법 단위로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을 선출한 것이다. 그것이 세계정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로마군은 원래 백부장이 있었다. 일종의 직업군인제였다.
이장이 없다는건 포지션이 없다는 말이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역할이 나누어져 있지 않다. 팀이 없다. 내부에 구조가 없다. 직책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없다. 동학농민군처럼 그냥 우르르 몰려와 있다.
이장을 뽑으면 되지 않느냐고? 사이비 종교집단을 보라. 왜 이렇게 숫자가 많냐? 이장을 뽑으려 할 때마다 새로운 종파가 하나씩 생긴다. 그거 안 된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상부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는 내부에 있다. 문제가 생기면 그 안쪽을 들여다보고 내부에 질서를 만드는 사람은 좀 아는 사람이고, 외부를 보고 쓸데없이 구호나 외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장개석 군대가 패한 이유는 내부에 구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아저씨가 개인적으로 지팡이 짚고 어찌어찌 장개석 군대를 찾아가서 누구 친척입네 하고 연줄을 대서 소령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하나 얻어와서 그걸 자랑하며 마을 청년들을 모으는 식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동학도 비슷했다. 18세 소년 백범은 홀로 충청도까지 내려가서 교주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명함 한 장 얻어와서 ‘접주’라는 타이틀 걸고 지역의 포수를 모아 군대를 조직했다. 혼자 한 거다. 몇 달 못 가서 붕괴되고 말았다.
장개석군대든 동학군이든 이장이 없어서 망한 것이다. 반면 중국 공산당들은 나름대로 이장을 뽑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원래 학생조직이 그대로 당과 군대로 변한 것이다. 학교가 상부구조 역할을 하며 에너지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은 뭔가 나사가 빠져 있다.
일본은 이장이 있었다. 사무라이들이 실제로 봉건영주 밑에서 직책을 가지고 일을 했다. 조선은 실무자가 아전인데 아전들은 신분이 낮아서 나설 형편이 안 되었고 선비들은 실무를 몰라서 역시 나설 형편이 안 되었다.
MBC 다큐 아마존의 눈물에 여러 남자와 중혼한 여자가 나오는데 이는 문명인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부족민들은 아무 남자나 같이 살면 다 ‘아빠’라고 부른다. 그 남자들 중에 하나는 오빠거나 사촌일 가능성이 있다. 촌수를 구분하는 단어 자체가 없다. 문명인의 관점으로 보면 곤란하다.
아프리카에는 족장이 있지만 족장이 판결하지는 않는다. 족장은 중재자 정도다. 문제가 생기면 마을 어른들이 다 모여서 주구장창 떠들어 대는데 그 광경은 가히 볼만한 것이 논리적인 의견개진이 아니라 감동적인 퍼포먼스의 연출에 의해 판결이 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열시간동안 토론하여 대강 의견을 모아놓으면 갑자기 사건의 당사자 친척의 사돈의 팔촌 중에 하나가 난입하여 대성통곡하며 바닥에 한 번 뒹굴어주시면 모두가 즐길만한 볼거리다. 그러면 토론은 처음부터 다시가 된다.
이렇게 한 3박 4일 해주면 모두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되는데 촌장은 그때쯤이 자신이 나설 타이밍임을 안다. 마지막에 한 마디 해서 정리해준다. 가해자는 피해자 집안에 소 20마리, 양 50마리 내는 걸로 타결보자.
모두 수긍하면 촌장의 위신이 세워진 것이다. 그 위신이 촌장의 유일한 힘이다. 자기 위신 깎을 결정은 절대로 안 한다.
아프리카의 부족장은 말이 부족장이지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다. 판단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다. 백인들이 그를 족장 대접 해주니까 족장일 뿐이다. 대부분의 족장들은 백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다.
예컨대 식당이 장사가 안 된다면 어떨까? 음식맛부터 조사해봐야 한다. 밖에서 불경기 어쩌고 이명박이 녹색성장 어쩌구 하며 엉뚱한 이념 드라이브 하다가 돌연 기도합시다 이러면 보나마나 나가리다.
진보는 인류의 집단지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을 주장하며 우기는건 진보가 아니다. 이명박이 환율을 올리니까 환율을 내리는게 진보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게 초딩이다.
브라질은 금리 올리다가 경제 망했다. 브레이크와 엑셀 중에 하나만 쓰자는 넘은 운전수가 아니라 미친 놈이다. 밖에서 이렇게 하자거나 저렇게 하자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는 내부의 시스템을 만들자고 말하는 사람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다.
지금 민주당 문제도 내부에 구조가 없는데 있다. 추장이 없다. 박근혜는 분명한 추장이지만 한명숙은 확실한 추장이 아니다. 전혀 의사결정이 안 되고 있다. 민주당의 의사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안 되는게 문제다.
(솔직히 말하자. 당신은 민주당이 어떤 공천을 하든 불만을 터드리며 한 번 뒹굴어볼 마음이 있었다. 왜? 이장이 없으니까. 대표성이 없으니까. 권한을 위임한적 없으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절차를 거쳐서 결정하는 거다. 인디언처럼.)
크게 고민할 일은 아니다. 우리쪽에 문재인이 있지만 안철수를 의식해서 공석으로 남겨두는 편이다. 추장은 없지만 이장은 제법 많다. 새누리당은 족장은 있는데 이장이 없다. 조만간 서태후 꼴 난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선거를 앞두고 있다. 선거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가는 절차다. 이장을 뽑고 족장을 임명하여 내부에 구조를 만드는 자가 이긴다.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고민할 필요없고 구조를 세팅해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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