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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성으로 소통하라.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12. 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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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성으로 소통하라.

구조론연구소  김동렬슨생  2011.12.26

 

 

(정다방 모임에서 오세님이 말씀하신 완전성 개념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완전, 불완전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면 곤란하다. 중요한건 방향이다. 인간에게는 원래 삶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 그러므로 초반에 한 번 방향을 잘못 정하면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어 그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한 번 정한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게 문제다. 이는 인간의 근원적인 약점이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럴듯한 동기나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다. 그저 앞행동이 뒷행동을 결정할 뿐이다. 김정일은 왜 그랬느냐고? 이명박은 또 왜 그러냐고? 전에 그랬기 때문에 다음에도 그러는 거다.

 

칸트가 이성을 말했지만, 프로이드의 잠재의식이 오히려 진실에 근접한다.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이다. 생각하고 판단하여 이성적으로 결정하는게 아니라 생각은 생각의 결을 따라가고, 판단은 판단의 결을 따라간다.

 

그 결은 생각하기 편하게, 판단하기 편하게다. 인간은 생각하기 편한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편한대로 판단하며, 결정하기 쉬운 결정을 내리고, 실천하기 쉬운 행동을 실천하며, 그것은 전에 하던 짓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한번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 한 번 비뚤어지면 일관되게 비뚤어진다.

 

김정일이 일국의 지도자로서 식견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자력으로는 벗어나지 못한다. 성공한 지도자의 주변에는 항상 좋은 라이벌이 있고, 멋진 경쟁자가 있고, 뒤를 받쳐주는 시스템이 있다.

 

세종대왕도 이방원이 앞에서 판을 잘 짜주었기 때문에 한 눈 팔지 않고 바른 정치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판구조가 거의 결정한다.

 

애초에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어느 길로 방향을 잡을 것인가? 완전성의 길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전성 그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당신은 완전성을 아는가? 모른다면 발언권 없다. 먼저 완전성을 이해하고 논하더라도 논해야 한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아닌데 뭐가 완전하다는 말인가?’ <-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완전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개에게는 개의 완전이 있고, 닭에게는 닭의 완전이 있다.

 

개는 도둑을 지켜야 완전하고, 닭은 알을 낳아야 완전하고, 사람은 소통하여 집단지성에 참여함으로써 제 안의 가능성을 드러낼 때 완전하다. 완전한가 불완전한가가 아니라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어디에 기준을 맞출 것인가의 문제다.

 

문제는 콤플렉스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아닌데’ 하고 불안하게 회의하는 사람은 콤플렉스에 중독된 사람이다. 인간이 불완전에 주목하는 이유는 콤플렉스로 인하여 동기부여 되기 때문이다.

 

◎ 완전성의 문제는 삶의 동기를 찾는 문제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마음의 라이벌을 정해놓고 있으며, 그 상대를 꺾는데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욕망을 정해놓고 충족시키려 한다. 돈을 라이벌로 삼기도 하고 출세를 라이벌로 삼기도 한다. 실패한다.

 

왜? 인간에게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에게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다. 허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 콤플렉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돈으로 목표를 삼은 사람은 돈을 벌어도 계속 돈이 부족하다. 왜? 돈이 필요해서 돈이 목표가 된게 아니고, 실은 목표가 필요한데 그 목표가 없으므로 돈이 대신 그 자리에 포지셔닝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그 경우 목표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계속 괴로울 뿐이다. 콤플렉스라는 잠재의식이 삶의 목표를 만들어낼때까지 계속 배후에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완전하면 통하고 통하면 허무를 극복한다. 허무를 극복하면 콤플렉스에서 동기가 부여 되지 않는다. 그 경우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다. 없는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욕망으로 대체된다. 인생의 태도와 자세가 바뀐다. 목표가 바뀌고 동기가 바뀐다. 삶이 바뀐다. 완전히 달라진다.

 

역시 방향이 문제다. 불완전 방향으로 가면 계속 불완전하고 완전 방향으로 가야 완전해진다. 어느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콤플렉스와 씨름하며 불안하게 회의하고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완전성으로 널리 소통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것을 즐기는 삶을 살 것인가?

 

◎ 불완전 – 멋진 집을 짓겠다. 평생 걸려도 다 못 짓는다.
◎ 완전성 – 친구를 초대하겠다. 저절로 멋진 집이 이루어진다.

 

입체적 모형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항대립적 사고 곤란하고 흑백논리 곤란하다. 완전성은 상부구조를 활용하는 것이고, 불완전은 하부구조에 매달리는 것이다. 역시 상부구조로 올라서라는 말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완전성의 상부구조를 활용하여 외부에서 지원군을 얻어오는 것이 맞고, 이미 사건이 진행중이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지원군은 오지 않는다. 당장 손에 쥔 카드만으로 끝장봐야 한다. 실패다.

 

◎ 완전이냐 불완전이냐가 아니라 이미 내게 선택권이 없는게 문제다.

 

완전성은 외부에서 조달하고, 불완전은 내부에서 조달한다. 외부에서 조달하는게 맞다. 식량을 구해도 밖에서 구해와야 한다. 그럴 때 내가 자의로 선택할 수 있다. 콩을 구할 것인지 보리를 구할 것인지 내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미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면 외부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별수없이 부엌에서 식량을 찾아야 한다. 콩과 보리 중에서 선택할 권리는 없다. 이미 불을 지폈으면 당연히 보리다. 콩은 미리 물에 불려놔야 하는데 늦었다. 불완전 코스에 선택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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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발등의 불끄기 위주의 불완전 전략을 쓰다가 평생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데 있다. 물론 급할 때는 발등의 불도 꺼야하지만 그러다가 평생 발등의 불 끄며 시간을 다 보내는 수가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 편안하게 공무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힘들어도 내 사업을 해볼 것인가? 문제는 한 번 코스를 잘못 잡으면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는 거다. 못 빠져나온다.

 

불완전을 선택하면 다른 사람이 세팅해 놓은 상부구조에 종속된다. 한 번 종속되면 평생 종속된다. 물론 공무원을 해도 자기 할 일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거기서 인생의 대략적인 윤곽이 결정되어 버린다.

 

돈 버는 방법은 손정의처럼 돈이 지나다니는 길목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완전성의 방법은 시간이 걸리고 사전 조치가 필요하다. 스티브 잡스와 말이 통하는 손정의나 되니까 하는 것이다. 아무나 한다고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게 보고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도달하지 못해도 후손으로 이어가며 계속 가야 한다. 갈만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제도 완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불완전에 기준을 맞추며 그 기준보다 빠지는 부분만큼 채워넣는 플러스를 하게 된다. 그런데 기준이 변한다. 625때는 북한보다 잘 사는 것이 기준이었다. 산업화 해서 북한보다 잘 살게 되었다. ‘나 목표달성 했어. 만세!’ 하고 쾌재를 부르는데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다. 인정 못 받는다.

 

한국의 목표는 바뀌었다. 북한보다 잘 사는게 지금 한국의 목표는 아니다. 세계 최고가 목표다. 수구꼴통은 쓸쓸해졌다. 이처럼 목표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룰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불완전성에 주목하면 언제나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다.

 

닭을 구석으로 몰아서 거의 잡게 되었는데 닭은 공중으로 솟구쳐 버린다. ‘반칙 아냐? 닭형! 그러기 있어? 이리 내려오는게 어때?’ 하고 항의해봤자 닭은 관심없다.

 

한국인이 영어에 애를 먹는 이유는 문법 따로, 단어 따로, 회화 따로 배우기 때문이다. 불완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틀을 정해놓고 채워넣기 식의 사고다. 틀렸다. 유치원 수준으로 난이도를 낮춘 다음 전체를 한꺼번에 통달해야 한다.

 

특히 보디랭귀지가 중요하다. 영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를 모르므로 애초에 OS가 세팅이 안 되어 문법도 회화도 다 안 되는 것이다. 영어에 문법 형태로 숨은 보디랭귀지를 훈련함으로써 자기 안에 OS부터 구축해야 한다.

 

인간이 완전한가 불완전한가 하는 물음은 필요없다. 완전성에 주목한 사람은 인생이라는 자동차에 동료를 태우고 멀리 여행을 떠난다. 불완전성에 주목한 사람은  그 자동차를 평생 조립하다가 실패한다.

 

완전성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인생이라는 화살이 지나가며 중간에 거쳐가는 장면들을 모두 자기것으로 소화해낸다. 그 화살은 허공을 날며 새도 만나고, 잎새도 만나고, 바람과도 사귀고, 구름과도 친구가 된다. 그 여러 가지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간다. 함께 온갖 장면을 연출한다. 전부 꿰어낸다. 그 낱낱의 장면들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

 

불완전성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평생 과녁만 째려본다. 결정적인 순간에 바람이 휙 불어서 과녁은 빗나가고 만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어차피 인생의 과녁에는 죽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완전성이냐 불완전성이냐는 어느 레벨에서 놀 것인가다. 스스로 주인을 자처하면 손님을 만나게 된다. 손님과 소통하여 이룰 것을 이룬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면 무수히 많은 손님을 모셔도 실제로는 만나지 못한다.

 

종업원의 관점에서는 손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신이 챙겨받을 일당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손님과 대화는 한다. 그러나 포지션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는 없다. 가치도 없다.

 

◎ 완전성 – 그림을 어디에 걸지 생각한다.
◎ 불완전 – 잘그렸는지 못그렸는지 따진다.

 

어린이를 미술학원에 보낸다. 그리기를 배운다. 그런데 그게 도움이 될까? 그림 잘 그려서 뭐하려고? 세계의 명화를 대량으로 복제하는 중국 그림공장에 종업원으로 취직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림실력 필요없다. 그건 포토샵으로 대체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가려보는 안목을 얻는 것이다. 그림이 단순한 손재주로 되면 곤란하다.

 

답은 항상 바깥에 있다. 자동차의 꿈은 자동차 안에 200마력짜리 엔진을 얹는게 아니고 그 자동차로 서울도 가고 강릉도 가는 것이다. 시선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완전성의 의미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스마트폰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날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사치레 만남, 헛만남이 아니라 실속있는 만남, 가치있는 만남, 알뜰한 만남, 빛나는 만남이었다는 것을 그 스마트폰으로 입증한 것이 중요하다.

 

좋은 물건이 그냥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날 사람을 만나야 이루어진다. 물건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건은 단지 스티브 잡스가 만나야 할 사람을 모두 만났다는 사실을, 만나도 제대로 만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에 불과하다.

 

당신은 인생에서 무엇을 만날 것인가? 그 만남이 과연 의미있는 만남인가? 그것은 당신이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다. 완전성을 바라보면 내 안의 가능성들을 세상에 탈탈 털어놓게 된다. 불완전성을 바라보면 내 안에 채워넣게 된다. 털어놓으면 복제되어 증폭되어 세상을 가득채우게 된다. 채워넣으면 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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