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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유서 해석하는데 1년 반 걸렸다”

노짱, 문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6. 23.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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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유서 해석하는데 1년 반 걸렸다”
[‘국민의명령’ 문성근을 만나다 ①] 시민정치 운동가로 사는 그의 이야기

(오마이뉴스 / 고범중 / 2011-06-22)

 


문성근은 여러모로 ‘평범’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배우로서 가장 유명한 그이지만 대다수 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명문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해 대기업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10년 가까이 하던 중 뒤늦게 인생의 ‘꿈’을 찾아 ‘연기판’에 뛰어들었다.

 

“운이 좋아서”라고 한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후 배우로서 승승장구를 이어갔고 그 정점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가 되면서 찾아왔다고 한다(2011년 3월 19일 오마이뉴스 기사 “대학생들 맨정신으로 노래방 자주 가라” 참조).

 

‘국민 배우’로 불릴 만큼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가던 그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스크린 쿼터’ 사태가 발생하면서부터다. 스크린 쿼터를 지키기 위해 2002년 대선 때 ‘노사모’ 활동을 통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에 나섰고, 당선 이후에는 “한몫 챙겼다”는 오해를 받을까 연기 활동도 미루고 물밑에서 지냈다.

 

정권이 바뀌고 그동안 못 했던 ‘연기’를 재개하던 그는 돌연 2010년 ‘국민의 명령’의 대표로 “야권통합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메시지를 한국의 야당들에 전달하고 있다. 이런 그를 사람들이 좋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한 트위터리안은 그에게 “연기자면 연기나 할 것이지 왜 그렇게 나서는 것이냐”고 힐난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명령 ‘수행자’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문성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지난 20일 국민의 명령 사무실에서 만나 나눈 많은 이야기를 2회로 나누어 싣는다. 1부에서는 문성근의 과거 삶을 돌아보며 현재의 문성근의 뿌리를 찾아보았고, 2부에서는 현재 국민의 명령 대표 문성근에게 정치,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문성근의 인생을 돌아보다

 

▲ 기자의 질문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문성근 대표 ⓒ김민경

- 10대 문성근은 어땠나?

 

“부모님께서 굉장히 자유롭게 놔두셨다. 네 삶은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는 식으로 하셔서 덕분에 철없이 놀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화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서강대 무역학과를 진학하게 된 것은, 대학입시 시험이 끝나고 당시 ‘진학’이라는 잡지에 나온 시험 점수표 때문이다. 내 점수로 진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입학 후 금방 큰 후회에 빠졌다. 재미가 없고 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즘 우리 교육이 ‘남을 누르고 올라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10대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할지 생각해보고 스스로 정리하면서 살면 인생의 시행착오가 줄어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나의 꿈이 무엇인지 확인하면 힘들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고 지켜나가고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 부모님이 자유분방하게 키워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자유로운 ‘문성근’이 존재하는 건 아닌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자유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한 근원이 되었을 수는 있다. 지금 ‘국민의 명령’을 통해 길거리 ‘민란’을 하는 것도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직업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된 작업이기 때문에 국가 체제, 정당 등을 이리저리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기존의 정당 체제에서 왜 벗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자라면서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는다면 무엇이 있는지 듣고 싶다.

 

“대학교 2학년 때 연극을 했는데 어느 날 술자리가 있어서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문제는 내가 술이 약해서 필름이 끊어지는 타입인데 다음 날 일어나니 누나가 ‘어제 너 집 앞에 쓰러져 자고 있는 것을 아버지가 업고 들어오셨다’고 하더라. 아침 밥상에서 아버지는 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고 나도 그랬다. 또 기억에 남는 건 83~84년쯤 아버지께 ‘고문당한 적 없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고문 위협도 받아 본 적 없으시냐?’고 하니까 ‘물론 있지’ 하셨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취조에 협조하지 않자 지하의 고문실을 보여주며 조사관이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애들과(고문담당자) 며칠 지내셔야 됩니다’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래라’고 하셨다. 만약 고문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기색이 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몰랐겠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그러라고 하는 자세를 보고 조사관이 ‘올라가자(위층의 조사실로)’고 했단다. 1, 2분의 짧은 이야기였는데 이때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렸던 이미지가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 아버지의 ‘일’로 인해 고통받거나 힘들어서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는지.

 

“전혀 없었다. 원망이나 이런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신께서 당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일을 하시는 것이고 내가 워낙에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계셨기에 내가 도와드리지 못해 늘 죄송했을 뿐이고 원망해 본 적은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적지 않긴 했다.

 

가령 아예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이것이 배우할 때인 6공화국에서도 방송금지와 같은 형태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런 수준이라서 그런 것을 어쩌겠나. 김미화, 김제동과 같이 특정 정파의 이익에 맞지 않다고 ‘생업’을 끊으려는 시도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권리’를 다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아서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이 원망스러운 것이지,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문성근의 아버지’의 차원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환원하겠다는 의지의 투영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문 목사는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활동하시던 분들과 동지였고 많은 사람들이 ‘문목(문 목사)’이라고 부르고 기억하신다. 또한 역사 속의 한 인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문 목사’라고 언급하는 것이 대화하기 더 편하기도 하다.”

 

- 대학에 다닐 때가 시대적으로 ‘권위적’이었고 이에 항거하고자 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땠나, 대학생 문성근은?

 

“내가 72학번인데 이때가 유신 때다. 이때는 ‘플래카드’를 꺼내려고 하면 잡아갔고 잡혀가면서 비명 몇 번 지르는 정도였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나의 경우는 민주화 운동에 ‘전혀’라고 이야기해도 될 정도로 참여한 것이 없다. 아버지의 삶을 보고 내가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었다. 대신 구속된 사람의 가족으로 구속자를 위한 활동은 조금 했다.

 

1980년 ‘내란 음모 사건’ 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전원이 구속 상태였고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언도된 상황이었다. 이때 구속자 당 두 명이 들어가서 재판을 참관할 수 있었는데 이때 기록할 수 있는 도구는 어떤 것도 지참할 수 없었다. 참관을 하고 나와서 그 내용을 문서로 기록하고 밖에 전달하는 일을 내가 했고 구속자 가족의 의견을 도합해서 ‘성명서’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89년 ‘문익환 목사 방북’ 때는 한겨레를 제외한 모든 신문에서 문 목사를 맹비난하고 있었고 문 목사를 변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위해 문 목사의 방북 성과와 목적,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을 통해 약속된 내용 등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런 일들 외에는 하지 않았고 2001년 ‘스크린 쿼터 사태’에 영화계가 공동 대응할 때 비로소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다.”

 

- 20년 혹은 30년 전의 과거 문성근이 현재 문성근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나?

 

“(한참을 뜸들인 후) 뭐… 그렇게 즐겁게 보지는 못할 거다. ‘어쩌다가 저 인간 저러고 살지?’ 이런 생각 할 거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내 인생의 흐름이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쳐 지금의 내 모습과 활동이 있는 것이니까 안타깝지 않을까 싶다. 이는 단순히 내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더 원만하게 진행되어 왔다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 안타까울 것이다.”


배우, 스크린 쿼터 그리고 노사모

 

▲ 그는 참 진지하게 듣고 진지하게 고민한 뒤 답변을 하는 사람이었다. ⓒ김민경

 

- 다른 배우들처럼 연극을 전공하거나 젊은 나이에 연기를 했던 것이 아니고 심지어 요즘 대학생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대기업’에 있다가 뒤늦게 연기판에 뛰어들었는데 그 정도로 연기가 좋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일단 당시는 취업하기 위해 지원서를 내면 10군데 20군데에 합격하던 시절이니까 지금 하고는 비교하기 어렵다. 문 목사는 어렸을 때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꿈꾸며 자라오셨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었다. 또 형들도 대학에서 ‘연극’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학가면 연극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절벽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내가 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자금이 충분해 사업을 하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내가 몰두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연극’이었다. 현실적인 요인과 감성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연기’를 선택한 것이다.”

 

- 배우 활동하면서는 사회적 현안에 대해 언급하는 일에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문익환 목사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투영이었나?

 

“아니다.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아니고 아버지는 내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계셨던 분이기에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 목사는 만주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게끔 훈련이 된 반면 나는 자유롭게 자라왔고 어려서부터 ‘죽음’을 각오한 아버지의 활동을 보면서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왔다고 볼 수 있다.”

 

- 침묵을 깨뜨리고 나오게 한 사건이 ‘스크린 쿼터’ 문제였다고 알고 있다. 당시 어떤 각오와 인식이었는지?

 

“당시 영화계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 대응하는 모습이 마치 ‘앵벌이’하는 듯했다.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주세요’라는 식으로 어떤 논리나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정당하게 주장하자는 생각이었고 이때 ‘무역과’에서 전공한 것이 유일하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스크린 쿼터’는 ‘독과점 규제 장치’라는 내용의 글을 잡지에 싣게 되었다. 경제의 논리로 항변을 한 것이고 이것이 당시 많은 효과가 있었다. 이때부터 얽혀들었다 (웃음).”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가? 아니면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매력을 느끼고 정치적 이념에 동의하였기 때문인가?

 

“스크린 쿼터와 관련된 것은 전혀 아니다. 당시 20명가량이 매일 모여 대책회의를 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나, 명계남, 이창동 등 4명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한날은 ‘DJ 정부에서는 스크린 쿼터가 지켜져 가는 분위긴데 다음 정권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4명이 모두 ‘노무현’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만큼 이전의 인식이 그러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 것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달성되고 김대중, 김영삼 양김이 분열하는 일을 막지 못했던 문 목사의 책임을 옮겨 지기 위해서였다.

 

문익환 목사는 일생에 ‘논쟁’ 거리가 없었는데 딱 하나 ‘양김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 유일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면 87년의 분열을 극복하겠다고 했기에 문 목사는 안 계시지만 국민께 내가 대신 또 한 번 사죄하겠다는 의지로 노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나는 어떠한 혜택도 받지 않고 나의 본업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 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치가 집약된 ‘민주주의 2.0’과 같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입장에도 동의를 했던 것인가?

 

“오히려 당시에는 참여정부가 당선 이후 어떤 일을 총체적으로 벌여 나갈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 사회가 정치적으로 철저히 ‘지역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든지 동의하는 현상이 만연해 정당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이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일들은 '토론'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니까 여기에 최우선의 가치와 동의를 두었다. 오히려 노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후 참여정부의 가치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이후 여러 일 중 ‘서거’ 당시 어떠셨는지, 또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나.

 

“사실 노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8년 가을이었기 때문에 7~8개월 정도 가까운 곳에서 뵙지 못했다. 왜냐하면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 내가 내 본업 활동을 통해 매체에 노출되는 것이 ‘역차별’적으로 참여정부에 손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칩거’ 비슷하게 지냈고 정권 교체 이후에는 다시 나의 본업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찾아뵙거나 하지 않았다.

 

서거하시고 나서 ‘봉하’에 내려가 마을 방송을 담당하며 대통령의 ‘유서’를 읽었는데 이 유서를 나 스스로의 의미로 해석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삶 전체에는 ‘신화의 비극적 요소’가 모두 깔려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해 독특한 캐릭터가 형성되었고 끝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다가 스스로의 허물을 안고 몸을 던짐으로 해서 민주진영 전체에 역사 발전을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예술가들이 재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만큼 참 무서운 사람이다.

 

유시민 씨에게 들은 얘기가 있는데 대통령 후보 시절에 유시민과 정태인 씨가 경제 영역을 담당했었다. 하루는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수백 장에 달하는 두꺼운 보고서를 아침 9시경에 전달하고 오후 5시쯤 만나 회의를 하는데 그 사이에 특정 논리에 대한 핵심을 파악해 ‘허점’을 지적하며 ‘이런 문제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도 상당히 뛰어나신데 돌아가셔서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한 기간을 우리 역사를 위해 힘을 쏟아주셨다고 생각한다. 반면 노 대통령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그 아쉬움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그분의 가치는 영원히 역사에 남아 살아 숨 쉴 것이기 때문에 이 아쉬움을 감당해 낼 수 있다.”


<2부에서 계속>


“한이불 덮자는 게 아니라, 한 집에서 각방 쓰자는 것”
[‘국민의명령’ 문성근을 만나다 ②] 시민정치 운동가로 사는 그의 이야기

(오마이뉴스 / 고범중 / 2011-06-22)

 


▲ 답변을 진행하며 깊은 고심에 빠져 있다. ⓒ김민경

- 참여정부에서 현 정부로 정권교체 이후 배우 문성근으로서 돌아오나 싶었는데 국민의 명령 대표 문성근으로서 돌아왔다. 동기를 설명해달라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직후부터 참여정부가 추구한 것이 무엇이며 왜 성공과 실패라고 얘기하셨으며 진보의 미래는 어떻게 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어서 대외적인 발언을 할 수 없었고 사양하고 있었다. 그러다 1주년 추모식 행사를 하는데 5분 동안 노 대통령에 대해 아무 말이나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총 6회의 공연이었는데 3회 정도 되면서부터 말의 내용이 달라져야 하니까 고민을 하고 전달을 하다 보니 내적으로 눌러 담았던 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못 견디게 되었던 것 같고 이후 지역 구도를 조금 더 완화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6·2 선거 이전) 그리고 20, 30대 자유주의 진보가 자유롭게 구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촛불시위를 경험한 ‘P세대’의 경우는 그 이전의 세대와는 다른 배경에서 성장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요구가 다르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이들의 정치적 참여가 자발적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했다. 거기다 이전에는 자유주의진영(민주당 계열)과 진보주의진영(민노당 계열)이 민주화를 위해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 이후 분립이 된 것인데 이 분립이 과연 의미가 있고 효과적이냐라는 근본적인 회의가 생겼다. 이제는 ‘다름’을 인정한 상태에서 ‘같이’ 가는 방법을 찾아야 이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정권을 되찾았을 때 참여정부처럼 고통스럽지 않게 이상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권통합에 대해 정치인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전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해보니 정치인들은 각 진영의 ‘입장’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실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내가 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 P세대 이야기가 잠시 나왔는데 장기적 역사의 관점으로 보면 현 정권의 활동이 안정적인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영위하던 세대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MB 정권 집권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잊고 있던 진정 소중한 가치들을 많이 일깨워 주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과거 정부들은 철저히 억압하면서 국민들을 통제하고 선전했다. 내가 판단하기로 지금의 대통령도 이러한 영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래서 향후 이 정부가 변화할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기를 통해 국민공동체 전체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대북 전략에 있어서 ‘민족’의 개념을 떠나서라도 기본적으로 국가가 행해야 할 역할의 측면에서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본다. 더불어 젊은 사람들에게도 나를 위한 스펙도 중요하지만 우리 전체를 위한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개념을 알 수 있도록 했다. 현재 길거리에 나와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왜 내가 이곳에 있는가’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과 이유를 찾을 수 있기를 요구하고 싶다.”

 

- ‘국민의 명령’이라고 단체의 이름을 규정한 의미와 배경은?

 

“결국 ‘야권통합’은 피할 수 없고 이 시대 국민들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뜻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한 것이다. 정확히는 ‘시민’이라는 표현을 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국민’이라는 표현에 더 익숙한 측면이 있어서 '국민의 명령'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 시간이 지나면서 문 대표님을 보면 점점 수척해지고 흰머리도 늘어가는 듯하다. 길거리에서 활동하다 보면 힘든 점이 많을 텐데.

 

“사실 길거리에 나가서 시민들과 함께 만나는 것은 도리어 행복하다. 요즘은 초기와 달리 다른 일들이 많이 생겨 자주 길거리에 나가지 못하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나간다. 반면 국민의 명령은 시민정치 운동으로서 고도의 정치사안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 활동가와 정치지망생이 같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운동이 실패한다. 정치 정당도 함께 가야 한다. 기존에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서로의 배경과 사고가 다른 이유로 많은 충돌이 엄청나게 일어난다. 이런 점이 참 힘들다.

 

또 하나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큰 틀을 위해 정리하고 나아갔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때로 내가 정리하고 중재를 해야 되면서 동시에 내가 이끌고 나가야 된다는 점은 정말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제안서를 꾸미고 설명을 하다 보니까 강연이든 연설이든 내가 구상을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두뇌의 역량을 넘어서는 부분인 것 같다. 솔직히 지금은 뇌가 푸석푸석해지다 못해 다 소진되어 버려 푸석푸석한 나의 뇌가 내 그림자만 끌고 다니는 듯하다.”

 

- 길거리 시민들의 반응과 호응이 긍정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느끼나

 

“물론이다. 처음에는 시민들께서 ‘선거 때도 아닌데 왜 선거 유세를 하지?’ 하는 시선으로 보셨지만 이제는 이 운동을 스스로 인식하고 필요성을 느끼고 계시다. 지금까지 여러 선거에서 다른 정당의 후보자들이 단편적인 후보자 통합을 통해 얻은 결과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운동의 왜 필요한가를 알고 계신 것이다.

 

또 늘 길거리 민란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숫자’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우리 회원들이 해왔던 일들이 잔잔히 퍼져 나가면서 이제 임계점이 멀지 않았고 정치권에서도 많은 동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진보정당들이 마음을 다잡고 대의를 위해 움직이기만 하면 확실히 가능해진다.

 

이제는 진보정당과의 논쟁이 남아있다. 기존에는 진보정당들이 정치적 이념과 방향이 다른 정당으로서 정공법으로 원내교섭 단체를 이루겠다고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충분히 존중하지만 우리는 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하되 큰 지붕 아래 다섯 가족으로 모여 기존의 목표에 배에 달하는 교섭권을 얻어 펼치고자 하는 정책들을 이루어 가자는 것이다.”


‘야권통합’의 비전

 

▲ 답변 중인 문성근 대표 ⓒ김민경

 

- 지금은 좀 덜 합니다만 올해 초만 해도 “야권통합 되겠냐”고 냉소하던 시민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이 운동의 초기에 단일 정당을 지지하는 비율이 10% 정도, 정당을 달리한 채 후보 단일화를 지지하는 비율이 50% 정도였다. 지금은 역전되었다. 현재는 단일 정당 35%, 부분 통합 후 선거 연대가 15~25% 정도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총선에서 선거연대가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선거법에 정당이 다르면 경선을 하지 못하고 경선을 하면 경선에 응한 사람이 패한 뒤 탈당을 해 출마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경선을 해야 단일화가 되는데 정당이 다르면 경선을 하지 못하니 단순한 선거연대만으로 총선에 임하자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선거 지역구를 각 야당이 분할해 출마하는 것이다. 가령 용산은 민노당, 종로에는 민주당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이번에 순천에서 한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양보한 정당의 후보자들은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이걸 막을 수가 없다, 법적으로. 순천의 경우는 한나라당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서울에서 이랬다면 100% 패배한다.

 

두 번째 방법은 여론조사를 통해 진행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적합한 후보가 선출되기 힘들다. 이것이 이번에 김해에서 이루어졌던 방식이다. 근데 이렇게 되면 진보정당(민노당, 진보신당 계열) 후보들이 선택받을 확률이 굉장히 적다. 솔직히 말해서 수도권에서 이 방식으로 선출될 만한 진보계열 인사는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셋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같은 정당 안에서 당내 경선을 하면 이 확률이 늘어난다. 또 진보계열의 정당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재들이 많은데 이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면 줄줄이 낙마한다. 노회찬, 이정희 등 훌륭한 진보계열 인사들도 비례후보를 지내면서 인지도를 쌓고 지역구에 달려들었다. 따라서 단일 정당을 이뤘을 때 진보정당들이 충분한 후보들을 배출하지 못하면 비례대표 후보에서 이를 보정해 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도 좋고 진보계열 정당에도 좋으며 정당 정상화되니 국민들께도 좋다. 이렇게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데 왜 검토하지 않는 것인가.”

 

- 야권통합의 어려움을 넘어서 후보 단일화를 이룬다는 것이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데 이 가능성을 ‘승리’로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후보상은 뭐라고 판단하나?

 

“우리는 현재 대선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총선에서 민주진보진영이 다수당이 되지 않는 한 승산이 거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진보진영의 정당들은 통합되지 못하고 분립되어 있고 민주적이지 못 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실권 정당’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뭐라고 공약을 내세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민주진보진영 정당 전체가 우선적으로 통합된 틀을 확립하고 이 안에서 정책을 내세우면 그때야 국민들께서 인정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특정 후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체적인 ‘구조’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 4·27 재보선 이후 ‘야권통합’에 대한 인식이 확실히 증가했고 이것을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정치인들이 더욱 많아졌다. 4·27의 긍정과 부정은?

 

“순천 시민들의 놀라운 선택에 경탄했다. 2012년에 정권교체를 위해서 정당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니 뽑아준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시기가 되어서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심판은 정말 무서울 것이다. 순천 시민들의 위대한 판단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정당을 달리한 채 후보를 단일화하는 것이 일정부분 효과적이었다. 반면 그 한계 또한 명백히 드러났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 한동안 특정 후보의 ‘대세론’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에는 또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추세다. 여당의 ‘구조조정’ 주장도 팽배하다. 이런 현상의 근원에는 뭐가 있다고 보나?

 

“여기에는 국민의 깨달음이 있다고 본다. 2007년에 문민정부 10년에 대해 실망을 하셨었는데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 모델이었다. 즉 토건 중심의 고속성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 2년 만에 이것이 우리 사회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국가의 빚을 늘려 국토사업을 벌이면 ‘낙수효과’가 발생해 서민들에게도 혜택이 닿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노 대통령의 가치가 확산되는 것이 복합적으로 이러한 상황을 일으켰다고 본다. 또 4대강 사업의 불합리성을 걷어내면 더 나은 ‘복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보수의 위기라고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진영의 위기는 곧 ‘비상식진영의 위기’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드러나는 사례가 ‘부산저축은행’ 사태다. 조선일보가 ‘박정희 대통령 신화 만들기’를 문민정부 시절에 시작해 한때는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50%가 넘는 지지가 박 전 대통령에게 몰리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에 박정희 31% 노무현 30% 김대중 12%로 변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는 박정희 35% 노무현 25% 김대중 18%가 나왔다. 노무현, 김대중 두 분의 합계가 박정희 대통령을 앞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국민 전체적인 인식의 변화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요즘 야권통합에 관해 긍정적인 소식이 들리는 것이 민노당과 진보신당 통합 결정을 이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북노선과 같은 예민한 부분에서는 갈등 요소가 잔재해 보이는데….

 

“그 둘은 원래 부부였다. 한이불을 덮던 부부였으나 갈등으로 헤어졌고 재결합하려니까 헤어지게 된 이유를 다시 드러내 확인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 과정이 순탄히 진행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이루길 바란다. 이는 곧 단일정당을 이루었을 때 참여자들의 개체수가 더 많아지느냐 적어지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갈 수 있듯’ 참여자들의 수가 적어지면 ‘합의’를 위한 단계는 수월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이 둘의 통합은 부부가 재결합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같은 이불을 덮자는 것이 아니라 한 집에서 다른 방을 쓰자는 것이다. ‘합의’를 통해 불가능한 것은 떼어놓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해 이루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 야권통합 이후 ‘국민의 명령’의 방향은? 시민단체로서 감시기구 역할을 할 것인지 아니면 최초의 목적 달성과 함께 활동도 종료되는 것인지.

 

“우선적으로 야권대통합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정권 재창출이 목적이다. 그 이후에 시민정치운동 단체로 존속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자의 질문에 ‘시민단체로서의 감시기구 역할’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감시하는 단체는 참 많다. 이것이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걸려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는 정당과 중립을 유지하며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독재 시절 끊임없이 요구한 프레임이다. 정치하려면 시민단체가 아니라 정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에 일종의 두려움이 존재한다고 본다. ‘정치중립’이라는 용어가 정치철학적으로 어떠한 세부적 담론을 지니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시민단체로서 선호하는 활동을 펼치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응당한 권리다.

 

‘뉴 라이트’를 보면서도 시민단체의 중립을 주장할 수 있나? 이후 민주진보정당의 정권이 세워지면 그 정권을 보호하고 이들이 진행하려는 일을 지지하는 것이 이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노사모’와 같은 풀뿌리 민주운동은 통신 산업의 구조적 발달을 바탕으로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는 ‘무브온’이라는 단체로 진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이 한계에 대해 반성하면서 ‘무브온’ 같은 시민정치 단체로 진화하면서 존속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 인터뷰 후 함께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트위터에 열중하고 있는 문성근 대표. 그는 파워 트위터리언이다. ⓒ고범중

 

- 많은 분들이 “언제 연기하는 모습 다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라는 질문들을 하시더라. 한 마디 필요하지 않은가?

 

“두 달 전쯤 휴가를 받아 독립장편영화 한편에 출연했고 7월에도 휴가를 받아 독립장편영화 한 편에 더 출연할 예정이다. 하루라도 빨리 제가 저의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제 그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웃음)”

 

- 마지막으로 문 대표를 지켜보고 지지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 해주시라.

 

“아까도 말씀드렸듯 참 많이 지치고 힘든데 내가 지친다고 국민의 명령 제안자로서 쓰러질 수 없지 않나?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갈 것이고 이제 이 운동이 질적변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느끼고 있다. 문재인 실장이나 이해찬, 한명숙 총리와 같은 사람들이 야권통합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주창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향력에 있어서 나의 10배 20배 나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많은 중요한 분들이 함께할 것을 약속해 주었기 때문에 최초 우리가 길바닥에 헤딩하는 정신으로 시작한 것을 잊지 않으면서 이분들이 정당한 목소리와 신념을 전달할 수 있게 잘 도울 것이다. 내 등에 있던 짐이 더 많은 분들에게로 옮아져 이 운동이 발전하고 있는 것 같아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쁘다.”


오전 11시가 되기 10분 전 쯤 시작했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느덧 오후 1시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인터뷰 내내 냉철하면서도 때로는 감정적인 호소를 반복하던 그도 인터뷰가 끝나고 나니 시원했는지 웃으며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인터뷰가 끝날 때 즈음이 되니 ‘배우 문성근으로부터 국민의 명령 대표 문성근’까지의 삶을 보다 가까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그의 이상이 대한민국 전역에 퍼져 빛을 내고 있지는 못하다. 하지만 ‘국가’ 전체를 위해 국민의 공통 이익을 위해 고민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그의 가치와 용기는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마음의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가 ‘배우 문성근’으로 돌아오는 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정치에 대한 ‘희망’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4766&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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