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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카이스트형 비극’ 진작부터 우려

노짱, 문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1. 4. 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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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카이스트형 비극’ 진작부터 우려
(양정철닷컴 / 양정철 / 2011-04-11)


 

KAIST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사진 : 연합뉴스)

 

카이스트에서 하루가 멀다고 비극적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학생 4명에 교수까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카이스트는 패닉에 빠졌습니다. 우리 사회는 뒤늦게 비극의 원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총장의 무리한 ‘개혁’이 문제라고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총장 한 사람 바꾼다고 해결될 일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카이스트 총장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더 넓게 보면 우리 사회 보수 및 기득권 계층의 그릇된 교육철학과 교육정책이 핵심입니다.

 

그들은 교육에서조차 경쟁력만을 따집니다. 효율성만을 내세웁니다. 서열만을 중요시합니다. 경쟁하는 기계, 시험 보는 기계로 속도와 결과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교육현장에 인간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카이스트라는 한 명문대에서 벌어지는 비극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경쟁과 서열과 효율만을 내세우는 비인간적 교육에 내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다른 대학에서도, 중고교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말, 대학들은 거의 집단행동을 하면서 우리 교육의 근간인 3불(不)정책 폐지와 대학자율을 요구했습니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창의성교육, 인성교육, 다양성교육, 민주주의교육과 같은 미래의 가치를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의사표현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교육이 그렇게 갈 경우 초래될 수 있는 비극을 우려하면서 교육의 공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교육의 공적 가치를 포기할 경우 우리 사회는 둘로 쪼개져 버릴 것이며, 잘된 사람만 점점 더 잘되고 힘없고 약한 사람은 점점 더 낙오하는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낙오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방어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이 나라 교육정책은 노 대통령이 우려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비극은 정확히 MB교육정책과 궤를 같이합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은 살인적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이명박식 영어 몰입교육, 징벌적 등록금제 등은 교육적 가치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형입니다.

 

청와대와 교과부는 서남표 총장의 ‘카이스트 개혁’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하나의 성공사례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흔적이 역력합니다. 한 일간지는 “서 총장이 청와대와 교감을 나누며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교육 당국자들은 노골적으로 “미국식 사고로 무장한 서 총장 덕에 한국 대학사회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칭송했습니다.

 

서남표 총장, 혹은 카이스트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6월 ‘대학총장과의 토론회’ 그리고 같은 해 4월 EBS 특강을 통해 간곡하고 절박하게 호소했던 교육적 가치의 본질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퇴행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승자만을 위한 사회, 결국 분열

 

요즘 도덕적 가치를 얘기하면 별로 인기가 없고 반면 경쟁력 전략을 얘기하면 잘 통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국가와 국가 사이의 경쟁을 얘기할 때 항상 가장 우수한 사람, 가장 우수한 지도자 집단 또는 사회 지도층 집단의 역량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구성해 왔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경쟁력을 평가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보편화되고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정보의 공유 수준이 아주 높아져 버린 이 사회에서는 이제 엘리트 간의 경쟁만으로 국가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의 경쟁력과 전 국민 개개인의 경쟁력 등이 전체적으로 통합돼서 국가적 경쟁력을 구성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의 자율을 강조하시는데, 물론 대학자율을 존중해야 합니다. 아무도 대학자율을 반대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국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대학의 자유도, 대학의 자율도 규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국민과 더불어서 자율의 권리를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어느 집단만 자유를 누리고, 어느 집단의 자유를 위해서 나머지 집단의 자유가 제한받게 됐을 때, 매우 큰 불편을 겪어야 하고 기회를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창의성교육, 인성교육, 다양성교육, 민주주의교육과 같은 미래의 가치를 훼손시키면서까지 대학의 자율을 주장하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교육정책을 얘기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증진시켜 나가는 것이 결국 국가경쟁력으로 귀결됩니다.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기업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할 수 있지만 대학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육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육정책에서 전 국민의 경쟁력, 국민적 통합, 균형 있는 사회, 다양성 있는 사회와 같은 가치를 함께 살려나가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 신뢰가 부족한 사회라는 겁니다. 통합성도 부족합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다양성도 아직 부족합니다. 다양성이야말로 자유와 창의의 기본입니다. 이것이 미래에서 기업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강자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너무 일방통행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저를 포함해서 다 성공한 사람들이고 우리 사회에서는 강자들입니다. 강자가 강자의 이익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강자를 위한 정책이 일방통행하게 됐을 때 우리 사회는 결국 분열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분열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자랑스러운 사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주의를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회를 통합해 나가기 위한 배려가 항상 그 속에 있어야 합니다. 배려가 부족한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교육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키워야 하고, 교육정책 자체에서도 배려가 있는 교육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지성사회에 대해서 저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 2007년 6월 ‘대학총장과의 토론회’(발췌)




교육은 낙오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중요

 

부잣집, 많이 배우고 돈이 많은 사람은 대학교를 가고 아닌 사람은 못 가고, 그렇게 해서 몇몇 일류대학교를 나온 사람만이 한국 내 모든 요직은 독점하는데, 국제적인 경쟁력은 뚝 떨어져 버리고. 이런 식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대학자율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수 연구의 자유라고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가장 쉽게 뽑겠다는 것이지요. 수능 하나 가지고 1번부터 맨 마지막 번까지 한 줄로 쫙 세워주거든요.

 

그러면 학생들은 자기 숫자 맞춰서, 머릿수 맞춰서 1번부터 4천 번까지 딱 끊어서 서울대학교 가고 그다음에 4천 번부터 만 번까지 끊어가지고 연고대 가고, 이런 방식으로 학생들을 뽑아가겠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대학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항상 가장 우수한 사람 데리고 가는 결과가 되는 것인데, 실제로 그런 결과로서 우리 대학이 세계적 대학이 됐느냐,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있습니다마는 그 시절에 우리 대학교가 교육에 있어서 세계적인 우수한 대학은 아니었거든요.

 

고등학교에서도 시험만 잘 치는 학생 그 시험성적만 가지고 대학교에서 평가를 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교육적으로 효율적이지 않고, 그다음에 시험점수만 가지고 뽑으면 결국은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인성도 반영할 수 없을뿐더러 환경이 나쁜 사람을 다시 어떻게 도와줘서 계층을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이런 기회, 교육을 통해서 계층 이동을 도와줄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전부 봉쇄해 버리는 것이거든요.

 

성적으로 반영할 수 없는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 본인의 역량이라든지 취향, 다양한 능력 이런 것들을 반영하기 위해서, 그래서 학생부를 가지고 입학 사정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유독 성적만 보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자꾸 성적 변별력 내라고 하거든요. 고등학교 학생기록에 성적 이외의 많은 변별력을 우리가 드릴 테니까 좀 다양하게 학생들을 뽑아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리고 싶고요. 그래서 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 그래서 지금 성적은 나쁘지만 앞으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좀 뽑아서 교육을 시켜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우리 사회가 현재 말하자면 많이 배우고 성공한 사람들만 사는 사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또 그들만이, 그들의 자식들만 앞으로 계속 성공해야 하는 사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여건이 나쁘더라도 그 아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서, 또 그들이 나중에 가서 성공하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성공하는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데 대학들도 도와주시면 좋겠어요.

 

우리 대학 욕심만 자꾸 부리지 말고, 그것도 고작 해야 열 개 대학 아닙니까? 우리 열 개 대학, ‘제일 잘하는 아이들 싹쓸이해 가지고 뽑아가겠다’ 그것도 ‘시험 잘 치는 아이들 상위 3만 명만 싹쓸이해 가겠다’ 그런 방식으로 대학교의 목표를 잡으면 안 되죠.

 

우리가 국가 제도를 운영할 때는 당장의 답답함, 또 소수의 답답함도 다 돌봐야 하지만 크게는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내다보고 그렇게 가는 것이 옳습니다. 보다 높은 교육목적, 교육 결과에 있어서 보다 높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그리고 그 교육의 결과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또 교육의 결과가 계층을 고착화시키지 않도록, 교육이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신분상승, 계층상승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어야지 그걸 자꾸 막아버리는 교육이 됐을 때 우리 사회는 나중에 하나로 갈 수 없고, 결국은 두 개로 쪼개질 수밖에 없지요.

 

누구라도 우리 대학 좋은 아이들 뽑아가지고 또 일류하고 싶고, 같은 값이면 좋은 아이들 뽑으면 가르치기 쉽죠. 쉽게 일류 대학 되고 싶고, 그렇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좀 모자라는 사람도 뽑아서, 힘이 들더라도 뽑아서 만들고, 내 자식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식’이 모두 함께 서로 어우러져서 같이 평등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의지하고 돕고 이렇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가도록 어른들이 지도해 줘야 돼요.

 

오늘날 서울대학교, 연세대, 고대 이렇게 하면요, 우리 사회에 엘리트들 배출해 온 학교이고, 지금도 엘리트를 배출하고 있는 학교인데 자꾸 이 엘리트 교육기관이 자꾸 ‘내 학교’ 내 학교만 좋은 학생들 뽑아가지고 쉽게 일류학교가 되겠다고 입시제, 본고사, 자율이라는 이름하에 본고사를 주장했을 때 결국 우리 사회가 끝내 힘 있고 잘된 사람만 점점 더 잘되고 힘없고 약한 사람은 점점 더 낙오하는 사회로 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낙오하는 사람이 자기를 다 방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불어 함께 가고, 이 사회 갈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함께 가는 사회를 우리가 함께 구상하고, 그렇게 해도요 대한민국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고 경쟁력 최고의 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 2007년 4월 ‘EBS 특강’(발췌)

 

양정철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25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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