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획연재에서는 현재의 대규모 전염병 사태의 역사적 맥락과 그 이면에 숨어있는 잔인한 경제논리, 그리고 이것이 실제 서민대중들에게 어떤 문제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 기자말
사실 인류가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지구의 나이에 비해보면 매우 짧은 순간이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탄생한 순간은 36억만 년 전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비해 인류의 조상인 영장류의 탄생은 6500만년 전, 현생 인류의 탄생은 고작 2백만년 전으로 추산되며 인류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10만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최근에 마주치는 전염병이라는 것은 이러한 인류역사의 초기부터 함께 해 왔다. 말라리아나 수면병 같은 전염성 질환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고 인간 본유의 유전적, 심리적 특징은 전염병과의 지난한 투쟁과 공생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소위 판데믹(pandemic), 그러니까 대규모 전염병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당연하면서도 또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인류가 대규모로 확산되기 전까지 판데믹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대규모의 인구집단이 존재해야 유행이 가능한 것이 판데믹인 것이다. 역사기록 초기 아테네 역병으로 그리스 문명이 사그라들고 페스트로 로마문명이 문을 닫았으며 페스트의 2차 대유행은 중세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근대사회로 가는 길을 열었던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염병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도시인구가 증가하고 공중위생이 열악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인구집단과의 접촉으로 새로운 병원체가 유입되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영양상태가 취약한 인구집단이 대규모로 희생되고, 혼란해진 사회상을 틈타 대규모 이주와 전쟁이 일어나면 전세계적인 판데믹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판데믹의 발생을 매우 축약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병원체의 변이, 새로운 병원체에 대한 인구집단의 면역력, 그 사회의 주체적 사회운영능력 등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띠었다.
최근의 역사만 돌아보더라도 20세기 초반 최소 2천만 명, 최대 6천만 명을 희생시킨 스페인독감 역시 1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대규모 전선을 따라 바이러스가 전파되었고 그 과정에서 독성이 강해진 인플루엔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홍역이나 천연두 등이 유라시아지역에서는 수천 년 동안의 반복 유행으로 인해 풍토병 수준으로 면역력을 획득했으나 신대륙의 원주민에게는 최초 감염인 탓에 치명적인 독성을 발휘했다. 그 결과, 신대륙 인구의 90%가 사망한 무서운 역사를 보면 인류역사와 전염병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의 극복, 그리고 병원체의 응전, 다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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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류 문명은 이런 대규모 전염병을 끝내 극복한 듯 보였다.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한 힘은 병원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같은 현대의학보다 오히려 공중위생을 통해 깨끗한 물과 공기를 공급하고 생산력 증대와 부의 분배를 통해 영양상태가 개선된 것이 근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류가 정주문명을 이루고 대규모 집단을 이룬 이래 단 한번도 승리한 적 없었던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사회경제적 발전을 통한 인류 문명의 힘으로 일시적인 승리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전염병을 극복했던 역사는 사실 그리 길지 않으며 채 극복하기도 전에 인류는 새로운 전염병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최근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광우병, AI(조류인플루엔자), 신종플루, 구제역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전염병들은 다시 인류가 잊고 있던 대규모 판데믹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현재의 문제는 지나친 환경개발과 생태계의 변화 등 인간의 활동이 야기한, 예측할 수 없는 전염병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전염병의 도래는 새로운 습지의 개발과 가축생산의 변화 같은 생태계의 변화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바이러스의 적응도를 뒤흔들어 다양한 종을 넘나드는 바이러스 변이를 촉발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새로운 전염병>의 저자 마크 제롬 월터스는 인류의 지구 환경 및 자연의 순환 과정 파괴가 신종 전염병의 등장과 전염병 확산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전염병(epi-demic)이 아닌 환경전염병(eco-demic)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거대 목축 기업의 축사는 들판이 아니라 기업형 공장이다. 가축(livestock)이 아니라 동물단위(animal units)로 취급된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축사에는 배설물이 쌓여있고 사육동물들은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협소한 공간에 갇혀있다. 쌓여 있는 동물 배설물은 살모네라균을 비롯한 병원균의 서식처이고 악취와 오염물질, 폐수의 원천이다. 이런 오염에 노출된 동물들에게는 질병에서 보호하고 몸집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광범위한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투여된다.
단시간에 몸집을 키우기 위해 고도로 집약된 사료를 먹이는데 사료는 경제적 효율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생산되어 수만키로를 이동해 몇 달, 심하게는 몇 년씩 창고에 쌓여있다. 이 과정에서 변질을 막기위해 많은 항진균제 등이 섞인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동물들은 면역체계가 극도로 취약해 질병발생 위험이 높고 집단으로 사육되기 때문에 일단 질병이 발생하면 급속도로 전염병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병원체 변이는 전 세계적 규모로 벌어지는 농축산물 생산방식의 변화가 야기한 새로운 자연환경에 병원체가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최근 유행하는 전염병들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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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광우병, 조류독감, 신종플루, 그리고 이번의 구제역은 모두 가축에서 유래한 질병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물론 구제역은 인간에게 감염을 일으키지는 않으나 사회경제적 충격은 인간감염 전염병을 뛰어 넘는 수준이다.
특히 인플루엔자 같은 바이러스성 감염질환 세균보다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어 변이가 쉽기 때문에 치료제나 예방백신의 효과가 매우 약하다. 게다가 환경변화에 따른 변이속도가 매우 빠르고 종간 간격도 쉽게 넘나든다. 구제역 바이러스 역시 종류가 7종인데다가 변이가 매우 빨라 백신과 치료제 생산이 어려울 뿐더러 전파속도 역시 매우 빠르기 때문에 무서운 가축질환인 것이다.
한편 구제역은 치사율이 상당히 낮은 전염병임에도 무자비한 살처분을 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저항감이 상당하다. 죽기직전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동물들의 사진을 보면 이런 마음은 더욱 커진다. 일반적으로 구제역은 매우 빠른 전파속도와 가축생산량의 축소를 가져오는 질병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감시대상이고 초기에 적극적인 살처분이 유일한 대책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정확한 역학조사결과가 나와야 하겠지만 초기 대응이 늦었던 것이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형국이다.
반면 구제역이 확산되고 나서도 살처분을 하는 이유는 의심 동물이 전부다 죽지 않는 한 구제역 청정지역의 지위를 잃게 되어 경제적 상품으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살벌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상품으로만 키운 가축이기 때문에 경제적 효용 측면에서 살처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례로 2001년 영국의 경우 영국은 구제역으로 양과 소, 돼지 등 460만 마리를 살처분했다. 6억 5천만 달러의 산업을 위해 2백억 달러를 썼고 그 과정에서 심리적, 환경적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큰 문제를 야기했다. 2002년 EU조사 보고서에서는 구제역 유행의 원인으로 조밀한 축산환경, 무역량증가, 동물 이동량 증가가 원인이라고 지적했지만 구제역 파동이 끝난 이후 영국에는 공장식 축산업이 더욱 확대되었고 보고서가 지적한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바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끔찍한 죽음의 행렬이다.
하늘이 내린 천재 아닌, 자본주의 축산업이 낳은 인재
조류독감 역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류독감>의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조류독감의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는 밀집된 환경에서 사육되는 가금류들 사이에서 대규모 역병으로 발전할 기회를 얻는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대규모 가공공장 주변에 가금류 농장들이 조밀하게 위치하는 사육 형태를 갖고 있는 현대의 축산업 혁명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축산업 혁명으로 집에서 소규모로 키우던 가금류가 세계적 차원에서 대규모로 생산하는 공장으로 바뀌면서 닭이 수억 마리씩 모여 있는 지역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런 곳들이 곧 조류 인플루엔자 대유행의 진원지로 부상하고 있다.
가금류 뿐만이 아니다. 돼지의 경우는 더욱 큰 규모의 공장에서 키워지고 있다. 돼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돼지의 호흡기에서 바이러스의 재조합이 이루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돼지의 호흡기에는 인간독감 바이러스, 조류독감 바이러스, 돼지독감 바이러스가 모두 결합할 수 있는 수용체가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뒤섞이는 혼합용기(mixing vessels)로 불려왔다.
1957년과 1968년에 발생한 전염병 대유행 바이러스들은 돼지를 매개로 섞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번 신종플루 역시 돼지를 매개로 여러 바이러스가 섞인 형태라고 최종결론 내려졌다. 작년 신종플루 시작지인 멕시코 지역에는 미국 내 최대 양돈회사로 연간 매출액이 110억 달러에 달하는 냉장 돼지고기 및 가공육 생산 회사인 스미스필드사가 존재한다.
자, 이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스산한 현실은 무슨 종교적 계시처럼 역병이 돌고 그 다음에 인류의 죄를 벌하기 위한 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는 '천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 문명의 거대축산업과 극단적인 이윤추구 속에서 만들어진 '인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문명의 발전방식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앞으로도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까지 대대손손 계속해서 이런 대규모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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