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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痛敏感型(고통민감형)’ 인간

◆자연운명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10. 12. 17.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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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痛敏感型(고통민감형)’ 인간

2010.12.14 호호당의 김태규님

 

 

일요일 오후에 출발해서 경상남도 함양의 용추계곡에 사는 제자를 찾아가 하룻밤 묵고 왔다. 내려갈 적에는 날이 맑았으나, 아침에 깨어보니 겨울비가 산촌 마을을 촉촉 적시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에 젖어 더욱 선명한 황갈색 잔디 마당 저편 아래 계곡에선 雲霧(운무)가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었다.

 

零上(영상)의 기온이라 비가 좀 그치면 운무가 올라와 앞산을 가리고, 비가 잦아지면 운무가 가시면서 앞산이 고개를 내밀곤 했다. 용추계곡 전체가 구름바다 속에서 遊泳(유영)하고 있었다.

 

한참 구경하던 나는 어느새 머릿속에 화선지를 펼쳐놓고 손가락 붓을 놀리고 있었다. 머리로 그리는 그림은 실제 손으로 그리는 그림보다 언제나 뛰어나다. 다시 말해서 머리로 그리는 그림을 한 번이라도 손으로 그려보는 것이 내 소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의 그림은 종이가 저항하고 붓끝이 마음과 달리 놀며 먹색이 의도했던 색이 되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다. 종이가 나쁘고 먹이 탁하고 붓이 둔해서가 아니라, 그리는 내 스스로가 문제인 것이다.

 

아직도 먼 내 솜씨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幻想(환상)의 그림은 거주지가 내 가슴 속이고 머릿속이기 때문이다.

 

평소 나는 삶이 苦海(고해)라고 말한 싯다르타의 설법에 대해 異議(이의)를 제기하며 산다.

 

그런데 문득 山家(산가)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다 보니 그 말이 갑자기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同義(동의)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항상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지하철로 출근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지하철이 끊기면 짜증이 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려고 하겠지만 당연히 불편하고 또 돈이 많이 들 것이다. 평상시에 잘 다니던 지하철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안기는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평상시 지하철을 고맙다고 느끼는 법은 별로 없고 그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행복을 느끼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것들은 이처럼 행복을 주지는 않으면서 때때로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니 삶에는 苦痛(고통)이 있을지언정 幸福(행복)은 없는 것이다. 고통만이 있고 행복은 없는 삶이다. 행복도 있지만 그거야말로 일순간이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敏感(민감)하게 반응하고 행복에 대해서는 鈍感(둔감)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생각이니, 그런 점에서 싯다르타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고통민감형’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우리이고 또 나아가서 생명이라면 평상시 우리들은 많은 행복을 느끼지는 못해도 실제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가 ‘고통민감형’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그저 그런 식사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고통민감형이기 때문이다. 매일 그저 그런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면 당연히 배가 고플 것이고 그러면 그때서야 우리는 한 끼 식사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매일 식사를 거르지 않고 하고 있으니 최선 그리고 최상의 상태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 제법 말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최상과 최선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고통민감형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분명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만이 조금만 안 좋아도 즉각 더 좋은 쪽으로 움직이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그 숱한 트릭과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는 이유, 그 시시한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살아가는 이유도 우리가 최상과 최선을 지향하기 때문인 것이고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가 아침에 엄마가 깨우면 ‘10 분만’ 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계속 늦장을 부리는 이유도 깨어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뭐 있겠는가.

 

아울러 돈이 많으면 행복하지 않지만, 돈이 없으면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고통민감형’의 우리가 근원적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결론인 즉 싯다르타의 ‘인생고해설’에 동의한다.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동의‘는’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군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면 ‘음, 이 친구 최선을 다하고 있군, 사실은 행복한 거야’ 하고 넘어갈 작정이다.

 

山村(산촌)의 아침을 차 한 잔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구름이 노는 구경도 하고 덩달아 그림놀이도 했으며 또 인생고해설에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동의도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오후 차표를 문의하고자 전화를 하면서 일행이 네 명이라고 했더니 터미널의 늙은 아저씨는 표가 딱 마침 넉 장 남았다고 했다. 서둘러 터미널로 가서 표를 산 다음에 기다렸다가 차를 탔더니 아니 웬걸 그때서야 뻥이었음을 알았다. 차는 승객이 별로 없고 한산했다.

 

터미널 아저씨 역시 한 장이라도 더 팔지 못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겠지. 아저씨,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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