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화 대 KBS
용기의 법칙과 비겁자의 법칙
(구조론닷컴 / 김동렬 / 2010-10-26)
강자와 약자가 싸울 때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공식은 정해져 있다. 늘 그렇듯이 이 또한 법칙대로다. ‘제 3자 개입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개입이 유효한 쪽에 가담한다. 유효한 경우는 두 가지다.
보통 게임에서 둘이 팽팽할 때 중간에서 관망하던 그룹은 약자를 편든다. 강자는 어차피 이길 것이 뻔하기 때문에, 편들어줘 봤자 조금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입이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약자를 편든다. 약자가 이기면 크게 생색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덕분에 이겼잖아.’ 하고 큰소리칠 수 있다. 그 재미다. 이는 힘의 균형추가 제 3자에게 있는 경우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쪽으로 승부가 완전히 기울어진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승복하지 않아 매가리없이 갈등이 장기화될 때는, 강자 쪽에 붙어서 약자를 같이 공격한다. 상어떼처럼 몰려들어 약자를 물어뜯는다. 비열함의 극치를 보인다. 이는 제 3자가 힘이 없어서 균형추 역할을 못할 때다.
사람들은 보통 만만한 쪽에 개입한다. 약자가 만만하다. 왜냐하면 강자는 어차피 말해봤자 꿈쩍도 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자 쪽에 개입하고 싶어도 어차피 씨알이 먹히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게 비겁한 거다.
여기에 구조의 문제가 있다는 거다. 어젯밤 SBS 시사프로그램 ‘긴급출동 SOS’에서는 서남해의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진, 장애인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는 ‘섬에 갇힌 사람들’편을 보도한 모양이다. 그곳에서는 해경이나 행정관청이나 마을주민들이 다 한통속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서서 장애인 편을 들어줘 봤자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다. 이게 비겁이다.
만약 미국이나 유럽이라면 어떨까? 그곳은 시장이 크다. 방송국에 기삿거리를 제보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곳을 찾아내서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제보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황당한 일은 일어나기가 어렵다.
한국은 좁은 바닥이다. 바닥이 좁으면 ‘좁은 바닥의 법칙’이 작동한다. 그것은 보편적 규범보다 마을의 특수한 사정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 경우 약자를 희생시키려 든다. ‘너 하나 참으면 돼!’ 하고 약자의 희생을 강요한다. 심지어는 집안 내에서 성폭행이 벌어져도 덮어놓고 무마하려고만 한다.
큰 도시에서는 이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웃집 사람이 알게 되면 바로 경찰서에 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골에서는 다 안면이 있기 때문에, 고발하였다가 갈등이 생기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야 한다. 그래서 차마 고발을 못 한다. 포기하고 만다. 그게 비겁이다.
헌법재판소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필자는 탄핵 전후로부터 연이은 몇 건의 헌재판결을 거의 맞춘 예가 있다. 법칙이 정해져 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헌재는 존재의의를 밝히는 쪽으로 판결한다. 탄핵을 인용하면 헌재의 위상이 국회에 밀리는 결과가 된다. 이 경우 헌재의 존재감이 사라질 수 있다. 헌재는 자기 존재가 유효한 쪽으로 판결했다. 생색이 나는 쪽으로 판결한 것이다.
행정수도 문제에서는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명판결을 내놓았는데, (전체적인 판결내용과 상관없이 ‘관습헌법 인정’ 자체만으로 논한다면 액면으로는 진보적 판결이다.) 역시 헌재의 존재감을 살리는 판결이었다. 그전에 탄핵을 막아서 청와대 편을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청와대에 한 방을 먹이는 판결을 내놓아서 힘의 균형을 잡은 것이다. 역시 승리자는 헌재가 되었다. 수구꼴통들 앞에서 헌재의 위상은 높아졌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판결이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 결과가 비슷한 경우, 이 원리를 적용하여 예측하면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다. 근래에 미네르바 판결을 비롯하여 사법부가 좋은 판결을 많이 내놓았는데, 이 역시 사법부의 존재감을 살리는 방향에서 판결하였다고 본다면 대략 맞다. 결론은 이게 다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보나 마나 정답이 정해져 있다.
김미화와 KBS의 싸움을 보면, 의외로 거대방송국 편을 들어 악플을 다는 수구꼴통 무리들이 득세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비겁한 거다. 그들은 섬마을에서 ‘어차피 이 바닥에서는 씨알도 안 먹혀’ 하고 선주 편을 드는 마을 주민과 같다. 왜 좀 더 크게 보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다. 선주 편을 들어 체념하는 것보다 방송국에 제보하여 상금을 받아가는 것이 더 짭짤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터넷은 개방의 무기다. 고립된 섬이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된다. 인터넷은 사통팔달이다. 좁은 바닥에 살다 보니 한국인 마음이 소심해졌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 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김미화의 고독한 싸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김미화 개인의 거대방송국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 아니다. 새로운 사회의 규범을 만들어가는 즐거운 싸움이다.
결론은 이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냐다. 좀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김미화 편을 드는데, 이는 지난 50년간 계속되어온 민주 대 반민주 투쟁의 연장선 상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김미화가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기 때문에, 에너지의 흐름을 이어갈 겸, 김미화를 편드는 것이다.
이 게임은 져도 이기는 것이고 이겨도 이기는 것이다. 본질은 우리 안에서 민주주의 역량을 키워가는 문제이며, 져도 우리의 역량은 커지고 이겨도 우리의 역량은 커진다. 이기면 기세를 얻고 지면 경험을 얻는다. 유효성의 법칙을 적용할 때 유효하다.
좀 모르는 사람들은 김미화를 비난하는데 그 이유는 섬마을 주민들과 같다.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자기네의 방관, 무관심, 무지, 거짓말, 비겁이 추궁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어느 포지션에 설 것인가이다. 거기에 따라 인간의 격은 결정된다. 어차피 인간은 격이 맞는 사람끼리만 소통한다. 좀 아는 사람은 좀 아는 사람과 소통하여 영감을 얻고 거기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비약한다. 더 높은 세계로 치고 올라간다. 좀 모르는 아저씨들 역시 통 모르는 아저씨끼리 대화하며 서로 공감을 나눈다. ‘너도 꼴통이냐? 나도 꼴통이야’ 하며 동병상련의 애틋함 속에서 혼미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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