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1년은 참혹했다. 기반시설 절반이 파괴되고 1000만 명의 국민이 난민이 됐다. 자원매장량 1경6000조 원의 동남부 영토 15%를 러시아에 빼앗겼다. 물론 러시아의 인적·물적 피해도 천문학적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간신히 회복 중이던 세계경제도 휘청거린다. 에너지와 식량 가격이 요동치고, 국제유통망이 마비된다. 지구촌은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올해 말까지 전 세계의 경제 손실규모가 약 3600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뚜렷한 승자도 없이 희생과 피해만 키우는 소모적인 전쟁은 말 그대로 '대재앙'이다.
'달러 패권'의 균열이 시작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경제전쟁이기도 하다. 미국 중심의 자유자본주의와 중국·러시아 중심의 국가자본주의간 대결 양상이다. 아울러 서방권의 금융자본주의와 사회주의권의 산업자본주의간 진검승부기도 하다. G7과 EU가 연대할 수록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와 OPEC+(원유수출국기 회원국에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으로 이뤄진 기구)도 결속한다.
지난 4월 12일 기준으로 BRICs의 GDP(31.5%)가 G7(30.7%)을 추월했다. BRICs 인구는 전세계의 42%로 G7(9.8%)보다 4배나 많고 영토 면적도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성장 잠재력이 크다는 의미다.
특히 OPEC+는 미국의 대러 제재를 조롱하듯 1일 165만 배럴의 감산을 발표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처음으로 액화천연가스 6만5000톤의 거래대금을 달러가 아닌 위안화로 결제했다. 이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탈냉전 후 미국의 달러패권을 와해시키는 데 진력해 왔던 결과로서 그 상징성이 작지 않다.
러시아는 지난 20여년간 외환보유고를 달러 대신에 금이나 여타 결제수단으로 대체하고 미 재무부 채권 1500억달러를 상환 완료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2000억 달러, 사우디아라비아도 660억 달러를 상환했다. 지난 1년간 중러간 위안화-루블화 결제가 90배로 늘었고 중국과 브라질도 최근 위안-헤알 거래를 합의했다. 각국 중앙은행의 달러 외환보유고는 60% 수준이다. 디지털 결제시스템이 확산됨에 따라 탈달러 움직임은 확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행해진 대러 제재의 이탈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경제적·군사적 연대를 강화하는 가운데 EU·독일·스페인·프랑스 정상들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독자행보를 걷고 있다. 폰 데어 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지난 7일 "중국과의 관계 단절보다 리스크를 줄이는 데 역점을 둘 것(to focus on de-risk not de-couple)"이라고 밝혔다.
헝가리도 EU 최초로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에 참여하고 집권여당은 미국을 3대 주적으로 분류했다. 중립국 스위스는 지난 1년간 대러 의약품 수출 규모를 약 42% 늘렸다. 일본은 G7, EU, 호주가 합의한 배럴당 60달러의 러시아산 원유 상한가를 넘어 69.5달러에 매입하고 지난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도 전년보다 4.6% 늘렸다. G7에서 유일하게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EU의 2022년도 러시아산 LNG 수입량은 전년보다 39% 증가했다. 러시아에는 약 1600개 외국 기업 중 25% 이상이 정상영업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의 2011년 세계경제포럼에서의 진단처럼 세계는 "창조적 파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미국의 단일패권이 붕괴되고 'G제로'의 다극체제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다.
'북방외교 30년' 공든탑이 무너지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뒤따르는 세계 경제현황을 짚은 것은 이 격동의 정세 속 대한민국의 앞길에 대한 비관적 전망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지난 19일 <로이터>에 공개된 윤석열 대통령의 '민간인 대규모 공격시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지원 고려' 발언 이후 한러 관계가 일촉즉발 위기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군사력 6위-경제력 10위의 선진국이다. 최단 기간에 산업화·민주화·세계화를 달성한 나라다. 이러한 발전의 원동력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도 한몫 차지했다. 냉전의 벽을 넘어 러시아·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강의 기적은 가능했겠는가?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방외교 30여 년의 공든탑이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대중국 무역적자 뿐만아니라 대러시아 무역적자도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
러시아의 자동차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현대차·기아차가 고전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자동차공장은 지난해 3월 문을 닫았고 12개 부품업체도 철수했다. LG전자와 삼성의 공장가동은 중단됐다. 지난해 LG의 무역적자는 233억원이다. 매출액이 전년대비 절반으로 줄었다. 러시아에서 스마트폰 점유율 1위를 기록했던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순손실액이 489억 원이다. 유일하게 오리온을 비롯한 식품업체들만 건재하다. 전쟁 특수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 인접국에 대한 수출은 폭증하고 있다. 키르기즈스탄은 6배, 카자흐스탄와 조지아는 각각 2배를 기록했고, 아제르바이잔은 87% 증가했다. 러시아가 병행수입 제도를 도입함에 따른 반사이익이다. 당연히 최종 소비시장은 러시아다.
공급망 단절로 인한 직·간접적 피해도 적지 않다. 인천-유럽간 항공편은 왕복 6시간, 인천-미주동부간 왕복 4시간이 더 소요된다. 시베리아 항로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3월 말 러시아·벨라루스 대상 수출허가 품목을 기존 57개에서 798개로 확대했다. 이런 와중에 윤 대통령의 <로이터> 인터뷰 발언은 한러 양국 관계를 위기로 몰아 넣은 셈이 됐다.
한국과 러시아는 수교 초기부터 러시아의 원천기술을 상용화하는 데 협력해 왔다. 우주발사체 '나로호'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발사장 건설과 로켓 제작에 성공했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배출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천궁과 신궁 같은 '한국형 미사일'은 러시아의 유도조정 센서기술을 도입해 국산화했다. 김치냉장고는 러시아의 탱크 냉각시스템 기술로 만들어졌다.
그뿐인가. 휴대전화 통화잡음 제거기술은 러시아의 통신기기와 레이더 잡음 제거기술을 차용했다. 에어컨의 결로방 지기술은 러시아의 위성표면 처리 기술을 응용했다. 전기밥솥에서 치아 미백까지, 곡물건조기에서 액체렌즈, 복강 내시경, 레이저 암치료기, 자율주행차용 고성능 레이더 등에 이르기까지 성공 사례는 적지 않다.
향후 세계 각국의 운명을 좌우할 4차산업혁명 시대에서 한국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가 누구일까? 미국과 유럽의 높은 장벽에 비해 러시아는 한국과의 기술협력에 가장 개방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러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한국 경제가 입을 타격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된다. 앞선 협력 사례들의 성공적 결과가 무색해질 수도 있다.
윤 대통령 <로이터> 인터뷰 발언이 국제적 논란이 된 이후 용산 대통령실이 "가정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라면서 러시아를 향해 "인터뷰 내용을 정확히 읽어볼 것을 권한다"고 했지만, 인터뷰 기사 보도 직후 러시아가 '발끈'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국제 외교가에서 한반도 상황을 걱정하는 평가가 제기된다. 2차 대전 이래 가장 위험한 상황이란 진단도 나온다. 최근 정세가 '북·중·러 대 한·미·일' 대결로 확대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도 정교한 외교력이 요구되는 과도기적 상황이다. 한국이 분단국·해륙국·통상국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눈치를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외교는 갈등을 자초하지 않고, 그 속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위 아닌가. 대한민국이 지금 국제 정세 속에서 취해야 할 것은 '선악 구분'과 '속 시원한 사이다'가 아니다. 해를 만들지 않고 국익을 도모하는 외교력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박종수씨는 전 주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 전 대통령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