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업이 아닌 사람에게 투자한다. 최정예 창업멤버가 없어도 되고 사업 아이디어가 부족해도 된다. 훌륭한 예비 창업가로서의 자질만 충분히 갖고 있다고 판단되면 저희는 선발한다. 다만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엔 자신의 것을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한 건 저희가 전부 돕는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글로벌 벤처캐피탈(VC) 앤틀러가 지난해 10월 한국법인 앤틀러코리아를 설립했다. 지난달 1기 참가자 데모데이를 끝낸 앤틀러코리아의 정사은 공동대표는 앤틀러코리아를 VC가 아닌 ‘스타트업 제너레이터’라고 소개했다.
스타트업 후속투자에 참여하는 일반 VC와 달리 앤틀러코리아는 창업가 선발부터 시작한다. 이후엔 선발된 창업가들이 삼삼오오 팀을 꾸려 사업모델을 만들도록 지원한다. 앤틀러코리아의 매니저는 이들의 가까운 곳에서 창업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도우며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투자할 분야를 정해두고 이에 부합하는 스타트업을 골라 투자하는 관행도 깼다. 분야 제한없이 창업가가 가는 길을 따라가겠다는 게 엔틀러의 방식이다.
1기 창업팀의 후속 투자 유치를 지원하기 위한 데모데이에는 추운 날임에도 투자자 500여명이 찾아왔다. 총 14개 팀이 무대에 올랐고 기업설명회가 끝나자 15개의 미팅룸이 가득 찼다. 정 공동대표는 “제가 무대에서 떨면 창업팀들도 실수를 할 것 같아 3분의 스피치를 위해 연습을 40분 넘게 했다”며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다음 문제지만 꽤 멋지게 첫 시작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를 서울 마포구 서울창업허브에서 만났다.
-앤틀러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한 이유가 궁금하다.
“앤틀러 창립자 매그너스 그리멜란드는 한국의 특징으로 두 가지로 본다. 먼저 소프트웨어든 하드웨어든 엔지니어링 파워가 강하다. 전 세계에 내놔도 통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 파워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브랜딩 파워다. 전 세계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만들어진 특정 브랜드 또는 특정 콘텐츠를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킬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스타트업이 해외로 나오는 걸 앤틀러가 도와준다면 그 파급 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판단해 한국에 지사를 세우게 됐다.”
-앤틀러코리아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
“직전엔 GS리테일 CVC 팀장으로 있었다. 팀장이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공동대표 제안이 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투자자로 일하면서 느낀 결핍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합류하게 됐다. 보통 대기업에서 투자하면 시리즈 B, C 정도의 투자를 한다. 그럼 사실 이미 여러 주주 중 하나일 뿐이고 지분율도 높게 가져가기 쉽지 않다. 창업팀과 거리가 멀어서 협업하거나 소통할 기회가 적어서 그들로부터 인사이트를 얻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또 한 가지는 투자 결정을 할 때 재무분석, 경쟁분석은 하지만 창업가들에 대해 깊이 있게 관찰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창업가들에 대한 실사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상태에서 투자를 결정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항상 아쉬웠다.”
-앤틀러는 다른가.
“앤틀러는 저희가 선발한 사람들 3개월 동안 지켜보고 난 다음에 투자를 결정한다. 물론 지켜보는 과정에서 사업모델이 바뀔 수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가 가면 ‘그 팀은 뭘 해도 할 팀이야’라는 확신이 들면 투자하므로 사업모델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 점이 매력적이었다.”
-앤틀러코리아는 VC지만 창업 지원을 하고 있다. 바탕이 되는 철학이 있나.
“세상에는 더 많은 창업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풀어야 할 문제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데 그 문제를 풀어낼 창업가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VC 투자 유치를 기준으로 봤을 때 국내 창업가는 전체 인구의 0.001%에 그친다. 전 세계 평균의 10배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5분의 1수준이다. 같은 문제를 우리는 한 명이 풀고 있다면 미국은 똑같은 문제를 다섯 명이 풀고 있다.
선진국에는 좋은 대기업이 많기 때문에 인재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기업체에 취직해 일하고 있는 근성 있고 똑똑한, 돌파력 있고 전문 분야 경험도 많은 인재들이 나와서 창업하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직장인들도 뜻만 있다면 창업할 수 있도록 창업 문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하려 한다. 스포츠의 경우 종목별로 잘하는 나라들을 보면 저변이 두껍다. 축구 강국인 유럽엔 동네마다 축구장이 너무 잘 돼 있다. 내부에서 경쟁 체제가 유지되니 그 안에서 우위를 점하면 해외에서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앤틀러는 창업의 저변을 두텁게 만들려 하고 있다.”
-프로그램을 소개해달라. 창업팀이 아니라 창업가를 선발하고 있다.
“그렇다. 앤틀러코리아는 훌륭한 예비 창업가의 자질이 있다고 판단되면 선발한다. 선발 후 5주는 팀을 꾸리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여러 기회를 만드는데, 48시간 이내에 특정 주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해커톤 대회를 10번 이상 진행한다. 이곳에 모인 참가자들은 매번 다른 주제에 대해 밤을 새워 치열하게 토론한다. 힘든 환경에 맞닥뜨려야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에 일부러 힘들게 하는 측면도 있다. 처음엔 임의로 파트너를 짜주는데,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팀이 구성된다. 이 기간에 창업가들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이야기를 나눈다.”
-팀이 안 꾸려지는 경우도 있나.
“100명 중 5명꼴이지만 간혹 있다. 투자심사 직전까지도 같이 할 사람을 못 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엔, 수십 명의 참가자 중 단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한 것이니 본인의 역량 문제로 볼 수도 있다. 여기 있는 사람도 설득을 못 시켰는데 투자자는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파트너를 못 찾았지만 외부에서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 허락한다. 대신 공동창립자로 정식으로 인정해주지는 못한다. 앤틀러는 직접 선발한 창업가들을 관찰한 결과만 믿고 그들에게 투자하기 때문이다.”
-팀 구성 이후엔 어떤 과정이 남았나.
“이들을 팀으로 인정해주는 ‘트랙아웃’ 단계가 있다. 팀으로서의 결속이 정말 단단한지를 보는 건데 결속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탈락한다. 이후에는 투자심사를 거쳐 투자를 집행한다. 최종적으로 투자 유치까지 가는 비율은 절반 정도다. 그러나 투자심사에 떨어졌다고 해도 투자받은 다른 팀에 합류하는 등 기회는 남아있다. 일단 저희가 한 번 뽑은 창업가들은 계속해서 좋은 창업을 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참가자들은 보통 18개월 정도 걸리는 그 경험을 6개월 만에 하고 나가게 된다. 올해엔 1200명이 지원해 그중 80명을 선발했다. 3월 6일에 2기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선발 기준은 어떻게 되나.
“소통과 배움에 열린 자세를 가진 성숙한 사람인지를 중요하게 본다. 정량적인 기준은 없다. 이 때문에 1기 참가자들은 연령도 27~52세로 폭이 넓다. 평균은 35세 정도 된다. 경력도 1~25년으로 매우 다양하게 선발이 됐다. 다만 그 안에서도 전체적인 경향성을 보면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30~40대가 가장 많다. 3~6개월의 과정 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는데, 이를 쉽게 쉽게 해결할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사회 경험이 필요한 측면이 있다. 또 앤틀러코리아 펀드는 만기도 8년으로 길다. 최대로 연장하면 12년이다. 이 기간에 투자사를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기 때문에, 장기간의 호흡을 가지고 성숙된 자세로 발전해나가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유니콘을 꿈꾸는 창업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매우 많은 창업가들이 ‘이런 게 있으면 좋지 않겠어?’ 하는 마음에 일단 본인이 할 줄 아는 걸 만든다. 그런데 제품 자체보다는 수요 검증이 훨씬 중요하다. 시장에 어떤 문제가 있고, 누구의 문제이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이 문제를 풀었을 때 고객이 지갑을 열 것인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해서 손뼉 쳐줄 사람이 국내에 최소 200~300만명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과정을 생략하는 초보 창업가들이 많은데, 나쁘게 말하자면 ‘예쁜 쓰레기를’ 만든 것일 수 있다.
검증을 통해 수요를 확인했으면,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개가될 수 있다. 그중에 이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푸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이 순서대로 생각해야 한다. 이 고민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먼저 만들어 버리면 다른 선택지를 들고 시장에 뛰어든 경쟁자를 이길 수가 없다. 사고의 순서가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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