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확률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지만 가만 들어보면 그게 변형된 결정론이다. '우주는 확률에 지배된다.'가 아니라 인간이 기술의 한계로 확률로밖에 접근할 수 없다는 식의 현실론이기 쉽다.
인간의 입장은 배제하고 근본적으로 우주의 본질이 확률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자도 있지만 그게 양자역학으로 규명된 물질의 성질이 그렇다는 건데 이는 확률론이 아니라 불가지론의 일종인 결과론의 타협이다.
우주는 결정되어 있지만 인간이 알 수 없게 확률로 결정되어 있더라는 식이다. 신이 주사위를 굴린다면 역시 결정론이다. 주사위를 굴리기로 결정되어 있다. 양자의 중첩을 근거로 확률론을 말하면 그게 결정론이다.
진정한 확률론은 없다. 양자의 중첩성질은 확률과 관계가 없다. 구조론이 확률론을 미는 것은 양자역학과 관계가 없다. 그때는 양자역학이 알려지기 전이다. 확률론의 근거는 우주가 시뮬레이션이라는 대전제에 있다.
물질은 성질을 갖지 않는다. 우주가 확률에 지배되는 이유는 물질이 성질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정하고 싶어도 결정할 수 없다. 애초에 물질은 이 논의와 관계가 없다. 물질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물질은 매개한다. 우주의 본질은 수학이고 수학이 확률이다. 수학은 결정론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만약 결정론이 옳다면 무한대 같은 해괴한 개념은 수학에 없어야 한다. 해석학은 원래부터 결정론 반대편에 서 있다.
물질은 성질이 없고 성질은 수학에서 나오며 수학의 최종결론은 해석학이고 해석학이 결정론을 온 몸으로 거부하므로 확률론인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이다. 관측자가 객체를 따라잡는다.
방정식은 미지수를 찾는 것이다. 이건 결정론이다. 구조론의 결론은 미지수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이다. 미지수는 계속 변화하며 관측자는 계속 추적한다. 여기서 관측자와 미지수의 관계는 등식이 아니라 부등식이다.
부등식이므로 비대칭이고 따라서 결정될 수 없다. 우주는 등식이고 그러므로 대칭이라는 전제 하에 결정론이 성립한다. 수학은 변화를 추적한다. 이는 존재가 그 자체로 변화라는 대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존재는 사건이고 사건의 내용은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변화를 내포하며 그것은 주체가 객체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때 변화는 계속 어깃장을 놓는다. 변화는 상대적인 관계가 결정한다. 상대와 반대로 간다.
어떤 A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상대를 교란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우주는 승부에 지배되며 이기려면 상대를 속여야 한다. 속이려면 마음을 읽히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읽히지 않으려면 난수를 써야 한다.
난수를 만들려면 확률을 써야 한다. 이기고 진다는 것은 한 번의 결정으로 정할 수 없다. 의사결정 장치가 없는 확률론은 가짜다. 이러한 대전제 없이 논의되는 확률론은 이름이 그러할 뿐 결국 결정론의 변종이다. 우주가 확률에 지배되는 이유는, 존재가 사건이며 사건은 상호작용구조 속에 의사결정단위가 있으며 판독기 센서의 민감도를 아무리 높여도 무한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대가 되면 신의 컴퓨터가 고장난다.
우주의 대원칙은 비용이 이득을 초과할 수 없다는 거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노가다 뛰는 비용은 누가 지불하지? 신은 일당을 안줘도 괜찮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신의 컴퓨터가 과부하로 뻗으면 어쩔겨? 우주는 시뮬레이션이다. 물질은 성질이 없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둘의 상호작용이다. 사건은 단계적 의사결정을 거친다. 의사결정 지점에 판독기가 있다. 수학은 비대칭이므로 판독되지 않는 정보가 있다. 판독되지 않는 정보는 확률로 처리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정확도 무한대인 저울로 정확히 계량하여 처리하는게 아니고 대충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만 보고 판단한다. 애매한 것은 묶음으로 처리한다. 농부가 과일을 수확해도 품질의 차이에 따라 별도포장을 할 때 애매한 것은 어떻게 하느냐? 확률로 간다. 중요한 것은 과일을 검사하는 검사기가 있느냐다. 단계적인 검사기가 있다고 해야 진정한 확률론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려면 곤란한 것은 빅이다. 무승부가 나오면 피곤해진다. 신은 무승부가 나오지 않는 룰을 만든다. 확률이 작용하는 승부차기를 두는 것이다. 신은 애초에 결정론을 존재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다. 우주는 비대칭이다. 결정론은 대칭론이다. 우주는 대칭일 수 없다. 대칭이 비대칭을 만들기 때문이다. 승부는 무승부를 만든다. 결정하려고 하면 확률이 필요하다. 확률은 계의 리셋이다. 전원을 꺼버린다.
애매한 것은 정확한 판정을 하지 않고 모아서 묶음으로 팔아버린다. 의사결정은 단위가 있고 소숫점 아래는 잘라버린다. 그러므로 결정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확률이 의사결정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다.
일정한 수치 이하인 것은 다음 판독기에 맡기고 그냥 버려도 되기 때문이다. 일일이 계산하지 않는다. 확률론의 핵심은 게임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판정관과 판정장치가 있다. 의사결정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 신은 가부로 판단하는게 아니라 가, 부, 유보로 판단한다. 가는 승인, 부는 거절, 유보는 조건부 승인이다. 애매한 것은 조건부 승인을 받고 확률로 들어가서 동전을 던져서 구제되거나 혹은 최종탈락하는 것이다.
우주를 시뮬레이션으로 보는 세계관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떠들어도 그게 변형된 결정론이다. 나는 지금까지 왼벽히 말이 되는 진짜 확률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양자중첩과 상관없다.
우주는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둘의 게임이며 게임에 이기려면 상대의 의도를 넘겨짚어야 하는데 그게 확률이다. 확률은 상대의 패를 보지 않고 미리 결정하므로 비용을 절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