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메리카' 시대의 파국…미·중 충돌은 '제국들의 충돌'이다
[장석준 칼럼]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익'이 지배하는 세계
요즘 언론 지면에서 빈번히 접하는 신조어 가운데 하나는 '신냉전'이다. 등장한 지는 한참 된 말이지만, 올해 들어 더욱 절박하게 인용되거나 언급되고 있다. 오랜 패권국 미국과 신흥 도전국 중국 사이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탓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대만해협 긴장 고조는 이 갈등이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적신호로 해석되기까지 한다.
지난 달 열렸던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는 덩샤오핑 이래의 전통인 집단지도체제를 폐기하고 노골적인 시진핑 개인독재체제를 다짐으로써 이런 비관과 우려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 정도의 퇴행을 정당화하고 오래 유지하려면 일종의 전시비상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이들이 이 대목에서 '신냉전'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쪽 사정도 결코 만만치 않다. 며칠 전 중간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공화당 내 트럼프주의 세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어 온 세상이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다. 그러나 트럼프주의자들이 유럽 극우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푸틴 체제에 대해 갖는 기이한 연대 의식과는 별개로, 중국을 향한 매파적 태도에서는 트럼프주의자들과 바이든 정부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미국 정치에서 '신냉전'은, 마치 1950년대에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게 '냉전'이 그랬듯이, 이제 초당적 합의사항이다.
암울한 정세다. 더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기정사실화되고 남한 정부가 외치 면에서 유례없는 무능을 노정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암울함의 정도가 한층 더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되물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이 과연 '신냉전'이 맞는가? 미-중 충돌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이게 정말 '신냉전'이라 불릴만한 현상인가? 시대착오적 이름 탓에 우리는 정작 사태의 핵심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훙호펑의 <제국의 충돌>이 말하는 미-중 충돌의 진실
훙호펑의 <제국의 충돌: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2)는 이 물음의 답을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책이다. 아니, 다소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신냉전'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끔 독자의 상식을 뒤흔드는 도발적인 저작이다. 한국어판 부제에 비록 '신냉전'이라는 말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미-중 충돌을 '신냉전'이 아닌 다른 틀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훙호펑(孔誥烽, 한국 한자음 '공호봉')은 홍콩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과학자다. 중국 경제의 현황과 향후 전망을 명, 청조 이래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파악한 그의 저작 <차이나 붐: 왜 중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는가>(하남석 옮김, 글항아리, 2021)가 이미 작년에 우리말로 나온 바 있다.
<차이나 붐>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인상 깊게 기억하겠지만, 훙호펑은 뚜렷한 좌파적 시각으로 중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본다. '좌파'라고 하니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공산당을 칭송하는 '관방'학자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훙호펑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는 지구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대안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현 중국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신랄하게 폭로한다. 말하자면 그는 홍콩 민주화 시위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독립 좌파 그룹들에 가깝다.
<제국의 충돌>에서 훙호펑은 1989년 천안문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세계시장에 참여하려는 중국의 의지를 적극 수용하여 '차이메리카'라는 공생 관계를 이루다가 2010년대 들어 급격하게 경쟁-대결 관계로 전환하는 과정을 정리, 분석한다. 새삼 80년대 말-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을 지정학적 경쟁자로 바라보며 의심하고 견제하는 시각이 미국 정부 안에서 최근 갑자기 부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시각은 미국의 국가기구 안에 오래 전부터 늘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90년대-2000년대에는 중국과 경제적 공생 관계를 이루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만든 힘은 다름 아닌 미국 기업들에서 나왔다. 훙호펑은 <제국의 충돌> 제2장 "공생"에서 '인권'을 앞세워 중국과 거리를 두려던 클린턴 정부 입장이 대기업들의 로비에 의해 뒤바뀌는 과정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거대한 중국 경제를 세계시장에 통합함으로써 활로를 찾으려던 미국 자본의 이해가 미국 정부의 지정학적 전략을 압도했던 것이다.
정반대로 미국 정부가 중국을 향해 대결의 자세를 다지는 과정에서도 미국 기업들의 로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국의 충돌> 제3장 "자본 간 경쟁"이 이에 관한 분석인데, 중국 기업이 성장하여 미국 핵심 산업 부문에 도전할수록 중국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태도가 돌변하여 정부를 과거와는 반대 방향에서 압박했음을 잘 보여준다. 즉, 미국의 국가기구 내부에 유독 지금 들어 '냉전' 노선이 부활한 게 아니다. 이런 흐름은 늘 존재했지만, 단지 이를 억제하던 미국 자본의 입장이 2010년대 들어 정반대로 돌변한 탓에 '차이메리카' 시대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언제나 핵심적인 역할을 한 변수는 자본의 이해관계였다. 이것은 미국의 반대편, 즉 중국 쪽에서 바라봤을 때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제국의 충돌> 제4장 "세력권"은 중국의 자본주의적 성장이 무르익은 2000년대 이후에 중국이 추진한 자본 수출, 남반구 시장 확보, 미국 핵심 산업에 대한 도전 등을 정리한다. 명색이 '사회주의'인 중국이 19세기 말 제국주의 국가들을 연상시키는 이런 시도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부의 과잉축적 모순을 해소해야만 하는 탓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강경 대외 전략 이면에는 심각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다.
훙호펑은 패권 대립의 두 당사국 모두 국내의 경제적 모순을 대외 전략으로 해소하려 하며, 그래서 지구 전체를 놓고 세력권 투쟁을 벌인다고 해석한다. 이 상황은 지난 세기 벽두에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J. A. 홉슨이 당시 열강들의 첨예한 긴장과 대립 이면에 도사린 현실을 진단하며 내놓은 결론과 너무도 유사하다. 국내 재분배라는 또 다른 해법을 한사코 거부한 제국들이 "과잉자본과 과잉생산 능력"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대안이 오늘날 우리가 '제국주의'라 부르는 자본 수출, 식민지-세력권 확보 투쟁 그리고 열강 간 전쟁이었다.
훙호펑의 결론은 미-중 대립이 '신냉전'보다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열강 간 충돌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다. 이를 <제국의 충돌> 첫머리 소개 글(영문판 편집자가 작성했는지 아니면 우리말 번역자가 붙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이 명쾌히 요약하고 있다. 좀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많은 사람이 최근의 미중 관계 악화가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기원하는 '신냉전'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두 나라가 경제 통합과 지정학적 협력을 추구하는 것에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방해되지 않았다.
저자는 미중 관계 변화의 기저에 있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기업 간 관계 변화라고 주장한다. 2010년 이후 중국의 경제 침체에 이어 국가가 배후에 있는 중국 기업들은 국내 시장과 세계 시장 모두에서 성장하면서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왔다. 중국 기업의 성장은 미국 기업의 쇠퇴를 대가로 한 것이었으며, 미국 기업들은 워싱턴에서 기존의 대중국 사업을 위해 강도 높게 진행하던 로비를 중단했다.
동시에 중국 산업의 과잉생산 능력 수출은 미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을 촉발시켰다. 저자는 그 지정학적 경쟁의 결과로 인해 형성된 동학이 20세기 초 강대국들 사이의 제국 간 경쟁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신냉전'이 아니기에 다시 생각해봐야 할 논점들
작금의 미-중 다툼이 20세기 중반의 냉전보다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열강 충돌과 더 가깝다면, 이제껏 '신냉전'이라는 틀에 익숙해온 우리의 시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시간을 들여 여러 측면을 검토해봐야겠지만, 당장 다음 두 가지 논점이 떠오른다. 둘 다 우리의 운명에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논점이다.
첫째는 이른바 '이념' 동맹 혹은 '가치' 동맹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이 대미 동맹을 여전히 냉전 시기의 틀로 바라본다. 마찬가지로 대중 긴장 역시 이 틀로 해석하려 한다. 마치 과거에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이 반공 혈맹이었듯이 이제는 자유주의 국제 규범을 수호하는 동맹국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은 자유주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대적해야 할 상대라는 것이다.
비록 아주 소수이지만, 이런 주류적 틀에 반발하며 이를 뒤집은 시각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중국을 여전히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라 바라보며 시진핑 체제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의 제국주의 패권에 맞서 남반구 국가들 혹은 다극화된 새 세상을 위해 분투한다고 믿는다. 이들 중 일부는 이 시각을 연장해, 우크라이나 침략을 자행한 푸틴의 러시아조차 다극화 세계를 열기 위해 싸우는 전사라 추켜세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냉전 향수병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21세기 지구정치경제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훙호펑의 진단처럼, 미국과 중국이 반세기 전 미국과 소련보다는 한 세기 전 영국과 독일에 더 가깝다면, 어느 쪽을 향해서든 '이념' 동맹이나 '가치' 동맹의 청구서를 들이미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 시대에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철저히 냉소적인 '이익' 동맹뿐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에도 양 진영의 최고위층은 겉으로는 이념을 내세우면서 실은 이익만을 탐하는 냉혈한들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에 비해 그때에는 그래도 최고위 결정권자들에게 냉소만이 아니라 일말의 신앙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말 이익의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지키려 한 '이념'과 '가치'가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 사이의 냉전이 오늘날과는 또 다른 불안과 공포('광신'과 결합된)를 수반했던 것이고, 정반대로 각 진영 내부에서 하위 동맹국들에게 상위 동맹국들이 후하게 이익을 양보하는 일도 일어났던 것이다.
가령 한반도는 이 '명'과 '암' 모두를 경험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비극적인 전쟁의 한복판에 있기도 했고, 남과 북 모두 상위 동맹국에 대해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며 예외적인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신냉전'이 아닌 오늘날의 전 세계적 대치에서는 이런 광경이 반복될 수 없다. 신, 구 제국들 사이의 적나라한 이익 충돌이 지배하는 전선에서는 하위 동맹국들에 대한 이런 관대한 처분은 기대하기 힘들다. 오랜 동맹국들의 경제적 이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이제 우리가 살아야 할 일상의 풍경이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의 시민들은 지금보다 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 시각으로 현재의 동맹국과 그 반대편 국가를 바라봐야 한다.
이 논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두 번째 논점은 그럼 '이념'이나 '가치'를 추구하는 시각이 향해야 할 대상이 누구냐는 것이다. 급속히 퇴보하는 중국은 당연히 아니고, 더는 '이념'적 동맹국으로 봐서는 안 될 미국도 아니라면?
해답의 실마리는 지정학적 사고방식 자체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신, 구 두 제국 중 어느 한 쪽의 지정학적 지배 전략에 맞서겠다고 다른 쪽의 지배 전략에서 자유나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것은 지배자들이 만들어놓은 가상 세계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짓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정학 비판'은 필요하지만, '대항 지정학'은 필요하지 않다. 해방의 가능성은 오직 지정학 세계 바깥에 있다.
백 년 전, 진지한 혁명가들은 이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표현했다.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번안하면, "제국 간 투쟁을 내부의 투쟁으로 전환하라" 쯤 될 것이다. 홉슨의 해법을 계승한 훙호펑의 정식화로는, 각 진영이 제국 간 전쟁이 아닌 내부 재분배를 통해 과잉축적, 과잉생산 능력을 해결하게 만드는 세계사적 전환이다. 지정학적 충돌과는 달리, 이 전환의 열쇠는 양 진영의 지배자들이 아닌, 각 진영과 국가 내부의 민중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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