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2. 09. 18
뭐든 잘못되는 이유는 프레임 때문이다. 프레임은 집단 안에서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행동이다. 주식이라면 다 필요없고 종목만 찍어달라고 하고 정치라면 이게 다 누구 때문이라며 비난하려고 한다. 문제는 거기에 액션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액션에는 관성이 걸려 있다. 관성이 걸리면 자신의 뜻대로 못하고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직진만 계속한다. 인간의 사유 역시 집단을 의식하며 긴장이 걸려 있다. 문제는 그게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프레임에 갇혀 있는 사실을 모른다. 생각을 못하고 법칙에 끌려가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집단 속에서 어색함을 피하는 사회적 기술을 구사하다가 무의식에 낚인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사회적 기술이 떨어지는 아스퍼거는 어색함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충돌하여 진실을 드러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적응하여 집단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되면서 진실에서 멀어진다. 무의식적으로 집단과의 마찰을 피하여 사유에 제한을 건다.
일기를 쓰는 초딩은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이 원하는 내용을 쓰게 된다. 자유로운 사고를 못하는 것이다. 매일 뭔가를 저지르고 반성문을 쓴다. 천편일률로 프레임에 박힌다. 선생님과 나의 상호작용이 그 안에 숨어 있다. 무의식적으로 일기를 검열하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그럴수록 문장력의 수준이 떨어진다.
인간은 주체와 객체의 대칭을 통해 사유한다. 대칭은 짝짓기다. 선과 악의 짝짓기, 히어로와 빌런의 짝짓기, 우리편과 적군의 짝짓기다. 이 방법으로 인간은 어색함을 피하고 자연스럽게 집단에 녹아드는 것이다. 우리편이면 추종하고 적군이면 미워한다. 이는 집단 안에서 역할을 찾아먹는 권력적 기동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오적은 무지, 거짓말, 고립, 패거리, 차별이다. 이 다섯에는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권력적 동기가 숨어 있다. 인간이 차별하는 이유는 그래야 집단 내부에 사설권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약자를 고립시키는 이유는 그래야 만만하기 때문이다. 약자를 제압하려는 권력행동이다. 이는 자신을 프레임에 가두어 집단의 부속품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집단에 적응하는 사회적 장치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긴장을 조절하여 집단과 긴밀하게 결속하는 대신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프레임은 축과 대칭의 구조다. 대칭은 피아구분이다. 우리편을 찾고 적과 맞선다. 그래야 한 방향으로 늘어서서 동료의 패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축은 발을 빼고 중립적 위치에서 양자간에 균형을 만들어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하도록 교착시킨다. 정치를 혐오한다며 중도를 자처하지만 그게 심판자 포지션을 차지하려는 얍삽한 정치적 기동임은 물론이다.
진리 앞에서 사회적 기술을 구사한다면 진지한 자세가 아니다. 선생님을 놀려먹는 방법으로 급우들 사이에서 일진으로 떠보려는 태도다. 배우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
인간이 망가지는 이유는 환경 안에서 자신을 종속적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을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장기판의 졸로 규정하는 사람과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어린이와 학생은 종속적 존재다. 어른의 지도를 받고 선생님의 지시를 따른다. 그게 익숙해져서 어른이 되어서도 그러면 문제가 된다. 그런 무의식을 끊어낸 사람이 진리와 대면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기 전에 관점과 포지션을 얻어야 한다. 사회적 기술을 버리고, 상대의 말을 받아치는 말대꾸 태도를 버리고, 이죽거리는 방관자 태도를 버리고, 사람을 제압하는 주도권 잡기 행동을 버리고, 타인을 길들이려는 태도 혹은 자신이 적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집단 속의 보이지 않는 권력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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