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명의 생계가 달린 일인데 인기투표식으로 결정할 수 있나.”(정동식 전국상인연합회장)
“이런 식이면 앞으로 진행되는 정책의 신뢰성에도 금이 갈 거다.”(김상기 전국이마트노조위원장)
“기대가 컸는데 상황이 오히려 애매하게 돼버렸다.”(대형마트 관계자)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 중인 전통시장 상인들과 유통업체들이 하루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정부가 국민제안 방식을 통해 10년 전 도입된 대형마트 의무휴업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 왔는데, 투표 절차에 오류가 있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찬반 입장을 떠나 이해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정부가 오히려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여론에 기대 정책을 추진할 게 아니라 현장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갈등을 최소화할 대안을 숙의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2일 업계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지난 6월 국민제안 코너를 신설해 1만3,000여 건의 민원을 접수받아 정책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10건에 대해 지난달 31일까지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가 57만7,415표를 얻어 1위를 기록했다.
유통업계에선 "10년 묵은 족쇄가 드디어 풀리게 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정부가 표를 많이 받은 상위 3개 정책은 국정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반면 규제 폐지에 반대하는 전통시장 소상공인들과 마트 노동자들은 잇따라 성명서를 내고 집회 개최 의사까지 밝혔다.
그런데 투표가 끝난 다음날 대통령실은 "투표 과정에서 어뷰징(중복 전송)이 확인돼 순위를 선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약속도 없던 일이 됐다. 대형마트 업계 1위인 이마트 주가는 6% 가까이 급락했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중복 투표도 할 수 있고 실명도 아니어서 시스템이 너무 허술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결국 문제가 발생했다"며 "의무휴업 폐지가 1위를 기록했다는 건 그만큼 소비자들의 불편이 컸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마저 퇴색되는 게 아닌가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통시장 상인들도 당혹감을 숨기지 않았다. 정동식 전국상인연합회장은 "며칠 사이에 '제발 살려달라'는 상인들 전화를 하루 200통씩 받았다"며 "무효가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러잖아도 어려운 영세소상공인들한테 정부가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기 서울 금천구 현대시장 상인회장도 "선거 때는 소상공인 지원에 앞장서겠다고 해놓고 지금은 완전히 내팽개친 것"이라며 "무슨 정책을 이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규제 폐지를 국민투표에 부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접근"이라며 "뜻대로 안될 것 같으니 국민정서에 호소하는 식으로 규제를 없애려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마트 노조도 이날 성명서를 내고 "정부가 설명 한 줄 없이 졸속으로 국민투표에 부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에 반영하겠다”는 정부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의무휴업 규제를 없애려면 유통산업발전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회 통과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형마트 의무휴업 폐지는 새 정부 국정과제나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 포함되지 않았다. 야당 의원실 관계자는 “국회에 개정안이 10여 건 발의돼 있고 결국 의견 수렴을 거쳐 논의가 돼야 하는 사안”이라며 “소상공인 숫자가 600만 명에 달하기 때문에 여당도 무작정 폐지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국무조정실은 뒤늦게 현장 의견을 듣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4일 열리는 첫 번째 규제심판회의에서 대형마트 영업규제를 안건으로 올리고,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는 것이다. 규제심판회의는 민간전문가와 현장 활동가 등 100여 명으로 구성된 규제심판부가 주축이 돼 규제 관련한 각종 의견을 수렴하는 회의체다. 또 대형마트 규제와 관련해 5일부터 18일까지 2주간 '규제정보포털'에서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온라인 토론도 실시한다.
단순히 규제를 없애냐 아니냐를 넘어 제3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역 롯데마트처럼 관광상권에서는 마트의무휴업 규제를 없애되, 전통시장 주변에 대형마트가 많아 의무휴업으로 인한 실익이 있는 상권에서는 점진적으로 규제를 푸는 등 상권특성에 따른 맞춤형 규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상기 전국이마트노조위원장은 "이 문제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며 "국민 편의를 중심에 두고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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