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사유에 있어서의 기본 규칙이다. 그것은 첫 단추를 꿰는 문제다. 두 번째 단추는 첫 단추의 위치에 연동되어 결정된다. 연동되어 결정된다는 것, 바로 그것이 구조다.
바둑의 첫 한 점을 어디에 두느냐다. 아무데나 두어도 상관없다. 쉽잖아. 단 두 번째 둘 자리를 생각하고 두어야 한다. 어렵잖아.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게 구조론이다. 수학이 그렇다. 문제의 계산은 어렵지만 수학적 확신은 쉽다. 죽었다 깨나도 1+1=2다. 흔들리지 말자. 그런 수학적 사고방식이 중요하다.
어려운 계산은 컴퓨터에 맞기면 된다. 구조론의 어려운 부분은 필자가 해결해준다. 초심자에게 필요한 것은 구조론적 확신이다. 구조론자의 사고방식이다. 눈꼽만큼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인생길을 헤쳐가는데 있어서 위안이 된다.
사람들이 긴가민가 하는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게 보통이다. 나는 언제나 똑부러지는 정답을 말해 왔다. 사람들은 나의 그러한 태도에 화를 낸다. 철학은 원래 정답이 없다던데? 틀렸다. 답이 없는게 아니고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언어를 만들어 왔다. 생각의 처음 시작부분을 정확히 세팅해 두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었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구조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서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도미노는 하나가 쓰러지면 전부 쓰러진다. 거미는 거미줄의 진동을 감지한다. 거미줄은 하나가 움직이면 전체가 흔들리게 되어 있다. 서로 맞물리는 구조의 코어 부분을 체크하면 전체의 돌아가는 판도를 알 수 있다.
나의 확신이 틀린 적은 없다. 안방에서 동전을 잃었다면 동전은 그곳에 있다. 보통은 등잔 밑에 있다. 안방에서 등잔 역할을 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움직이지 않아서 주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떨어드린 동전은 접힌 바짓단에 끼어 있다. 그곳에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4차원의 세계로 빠지지 않았다. 동전이 여우로 둔갑해서 도망치는 일도 없다.
이런 기초만 확실히 해도 마음은 편안해진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자신이 어느 부분에 화가 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암환자는 암선고를 받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게 보통이다. 막연한 상황이 고통이다. 고통받는 이유는 호르몬 때문이다. 호르몬을 바꾸면 된다. 호르몬은 무의식 때문이다. 무의식은 피아구분 때문이다. 피아구분은 환경과의 상호작용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정확히 알면 보이지 않는 기세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하다가 죽는다. 인간 역시 무의식에 쫓기고 있다. 동료들의 시선, 가족들의 기대, 집단의 압박, 관객의 응원, 추종자들의 눈빛에 인간은 쫓긴다. 일관된 대응을 하려다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못하고 직진만 계속한다. 폭주하게 된다.
히틀러도 그렇고, 박정희도 그렇고, 푸틴도 그렇고, 권도형 그렇다. 추종자들의 눈빛에 쫓기다가 망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동물이다. 자극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호르몬이 결정하고 인간은 따른다. 인간의 마음을 가두는 무의식의 틀을 깨야 한다.
생각을 하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머리에 힘 주고 가만이 앉아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이 명상을 한다면서 쇼를 하지만 그거 다 속임수다. 인간은 호르몬에 의해 한 번 꽂히면 무턱대고 그쪽으로 계속 가는 동물이다. 장발장에게 꽂힌 자벨경감처럼. 검찰만능주의에 꽂힌 한동훈처럼, 이재명 씹는 똥파리처럼, 기레기 우월주의에 꽂힌 기자들처럼 그들은 직진만 계속할 뿐 방향전환을 못한다.
스스로 자신을 장기판의 졸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의 부재다. 손따라 두는 하수바둑처럼 상대방의 행동에 홀린다. 주체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고 판세의 흐름에 휘둘린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집단을 위한 마루따로 소모시킨다. 인간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통해서만 전진하는 동물이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어떤 물리적 장벽에 도달하여 이 길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을때까지 인간은 폭주한다.
피아간에 게임을 걸고 상대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는 식의 단세포적인 맞대응을 한다. 뇌는 결단코 사용하지 않는다. 인류는 이 방법으로도 용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은 양자역학 시대다. 문명은 기어이 물리적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인류는 문명사 1만년 동안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동물적인 균형감각만으로 전진을 계속해온 것이다. 이제는 수준을 높여야 한다.
구조론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생각은 도구를 쓴다. 도구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다. 수학문제 풀이법과 같다, 종이에 공식을 써놓고 빈 칸을 채우면 된다. 공식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다섯 개의 대칭을 순서대로 세우고 코어를 움직여서 단계적으로 주변부를 장악해 들어가는 것이 의사결정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대칭되는 둘에서 코어가 되는 하나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왼손과 오른손을 쓴다. 왼손잡이냐, 오른손잡이냐? 이렇게 둘로 나누면 망한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는 단절될 수 없다. 둘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왼손으로는 겨냥하고 오른손으로 투척하는게 사실은 하나의 동작이다. 투수는 하체로 받치고 상체로 던진다. 상체와 하체가 하나의 동작을 구성한다.
진보와 보수는 하나의 문명을 이끌고 간다. 여당과 야당은 하나의 국민을 떠매고 간다. 선과 악이 별도로 대립하여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사회성이 변화의 속도에 따라 선으로도 나타나고 악으로도 나타난다. 하나의 국민이 가진 균형감각이 여당도 되고 야당도 되는 것이다. 이에 널리 화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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