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2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현장.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만났다.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에 동참한 김예지 의원은 "정치권을 대신해 사과한다"며 무릎을 꿇었다.
김 의원은 시각 장애인이다. 무릎을 꿇은 김 의원 옆을 안내견 조이가 지키고 있었고, 휠체어에 앉은 박경석 전장연 대표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경석 대표는 심상정 대표가 대선 토론 마지막 발언에서 소개했던 사람이다. 정의당 소속 장혜영 의원도 이날 시위에서 김 의원과 만나 악수를 나눴다.
다음날인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전장연 간담회에서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도 박 대표를 만나 허리를 굽히며 장애인들에게 사과했다. 박 공동위원장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않고 갈등만 부추기는 이들이 있다"며 "곧 집권당이 될 국민의힘 대표가 장애인 시위를 두고 '서울시민을 볼모로 삼는 시위'라고 했다"고 국민의힘 정치인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전장연 시위를 수일째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소위 갈라치기 정치가 전선을 넓히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자의 '여가부 폐지' 공약은 이 대표 작품이라 알려져 있다. 여성혐오를 넘어 이 대표의 갈라치기 정치가 소수자와 약자 전반으로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대척점에 20대 박지현 위원장을 필두로 여성 정치인들이 앞장섰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특히 장애인과 여성 정치인의 연대라는 측면에서 40대 초반인 국민의힘 소속 김 의원이나 30대 진보정당 여성 정치인인 장혜영 의원이 손을 맞잡은 장면 역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를 넘어, 20대 대선 직후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는 이들이 2030 여성들이라는 사실은 신선한 혁명이다.
'다시 만난 세계'와 '기도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지난 24일 여의도 대로에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밭갈이 운동본부' 등이 주최한 '민주당 개혁' 집회에 참가한 참석자들이 부른 시위 곡은 투쟁가나 민중가요가 아닌 바로 '다시 만난 세계'였고, 일부 유튜버들을 통해 생중계됐다.
이 장면은 2016년 7월 이화여대 학생들이 최서원(최순실)씨 딸 정유라의 입시비리에 항의하며 학내에서 진행한 평화집회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이 '다시 만난 세계'가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후 6년이 시간이 흘렀다. 다시 여의도에 울려 퍼진 '다시 만난 세계'는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를 촉발시켰던 이화여대 시위 및 탄핵 촛불과 최근 2030 여성들의 민주당 개혁 시위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구호는 바뀌었다. 소위 '개딸'(개혁의 딸들)이라 일컬어지는 2030 여성 '민주당 개혁' 시위 참가자들은 '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민주당 개혁' 딱 세 가지를 요구하는 중이다. 이들은 20대 대선 전까지 민주당이 완수하지 못한 개혁 과제 완수와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진 민주당의 개혁을 부르짖는 중이다.
무엇보다 과거 투쟁 중심이나 비판 일색의 네거티브한 집회가 아닌, 파란 풍선을 들고 "민주당은 할 수 있다"는 구호와 함께 포지티브 한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다시 만난 세계'는 이러한 긍정적인 개혁을 상징하는 노래다.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개딸'들의 정치개혁 목소리도 '신박'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기업인들은 사람을 존중하게 하시며, 언론인들은 진실을 말하게 해 주시고, 법조인들은 양심을 지키게 하소서."
이 개딸들이 매일 저녁 온라인에서 게시하는 '기도스'(기도+디도스의 합성조어)의 일부다. 상식적인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한국사회의 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의 언어다. 아이돌이나 대중문화에 천착했던 이들마저도 급속도로 한국정치사를 공부하면서 소위 정치의 언어를 깨부수는 중이다.
삶도, 정치도 계속된다
만만치 않은 화력과 숫자를 자랑하는 2030 여성들이 20대 대선 직후 정치개혁에 목소리를 내고 직접 뛰어드는 현상은 사실 낯설지 않다. K-트럼프의 탄생이 우려되는 지금, 그 트럼프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 뉴욕 주 연방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OC)는 1989년생으로, 트럼프 시대이던 지난 2018년 당시 민주당 서열 4위라 불리던 조 크롤리를 누르고 당선됐다. 역대 최연소 여성 연방 하원의원의 탄생이었다.
당시 미국 중간선거는 여성을 비롯해 소수인종 및 사회적 약자들의 선거 참여가 도드라졌다(넷플릭스 다큐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에 이러한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이 공식화된 트럼프 시대를 참을 수 없던 정치적 소수자들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지지자였던 AOC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2030) 여성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년 전 미국의 AOC 지지자들이나 2022년 민주당 박지현 위원장을 '불꽃대장'이라 부르는 여성 유권자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을 의회로 보낸 뒤 정치 효능감을 맛보는 것. 그리하여 세상을, 미국이나 한국의 민주당을 개혁하는 것. 그러한 정치 효능감을 바탕으로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사회와 정치를 개혁하고 싶은 열망, 그리하여 조금이나마 안전하고 상식적인 나라에서 살고 싶은 염원 말이다.
0.73%p, 24만 표 차이로 승패가 갈린 20대 대선 직후, 정치적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뉴스를 끊었다는 이들이 넘쳐난다. 현직인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차기 윤석열 당선자보다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윤 당선자를 찍은 쪽이나, 찍지 않은 쪽 모두 그러한 피로감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런 이들에게 '개딸'들이, 새로운 유권자들이 열어젖히는 '다시 만난 세계'는 신선한 충격이다. 이들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결과를 좌지우지할 것이란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그렇게, 20대 대선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