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1. 11. 07
전략은 옳고 전술은 그르다. 전술이 옳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전술이 전략 안에서 기능할 때다. 전략과 전술이 충돌할 때는 반드시 전략을 따라야 한다. 바둑의 사석작전과 같다. 전략은 당장의 작은 것을 내주고 미래의 큰 것을 얻는 바꿔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작은 것을 내주지 않고 끝까지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하는 소인배 행동이 전술집착의 병폐다. 보통은 그러다가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다. 초반에 기습 한 번을 이기고 의기양양해 하다가 이쪽의 전력을 들켜서 패배하게 된다. 그런데 무리한 전술적 기동을 했는데도 계속 이기면 어떨까?
그 경우는 운이 좋은 경우다. 미국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미국은 복 받은 나라다. 미국은 영토가 넓고 자원이 많고 인구가 적어서 서로 마찰할 일이 없다. 내부의 갈등을 외부로 돌려서 인디언 땅을 빼앗고 서부로 진출하면 된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이 지갑을 연거푸 주우니 기쁨 두 배다.
이 경우 무리한 전술적 기동을 해도 이긴다. 계속 이기다 보면 나사가 빠져서 잘못된 이론을 만들게 된다. 그게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영국식 공리주의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미국식 실용주의 병폐다. 전성기의 영국도 결과가 좋았다. 나빠지기 전까지는.
공리주의, 실용주의는 진지한 철학이 아니다. 소피스트의 궤변에 불과하다. 구조론은 수학으로 보는 것이다. 판을 키우면 강체가 유체로 바뀌면서 수학이 작동한다. 자원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의미가 없어지고 자원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 경우는 확률이 지배하게 된다.
구조론은 확률을 믿는다. 그런데 공리주의 결과론도 확률처럼 보인다. 착각이다. 구조론은 원인이 맞아서 확률이 맞는 것이고 공리주의는 결과가 맞아서 확률이 맞는 것이다. 원인이 맞는데 결과가 옳지 않으면 그 확률은 어디로 갔을까? 이웃에게 갔다. 혹은 후손에게 갔다.
승산이 51 대 49인 게임에서 51의 확률을 선택했는데 재수가 없어서 졌다면? 큰수의 법칙에 따라 나중에 이길 확률이 그만큼 올라갔으므로 손해는 없다. 나중이 없다면? 후손이나 동료가 그 확률을 가져갔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동료가 같은 방법으로 내게 확률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률을 동료가 챙겨가도 미련은 없다. 승산이 높은데도 내가 졌다면 다음에 동료가 이길 확률이 약간 상승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공리주의는 결과만 본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 그것은 확률이 보장한다. 확률은 믿을 수 있다. 언뜻 봐서 말되는 것 같지만 과연 그게 결과일까?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문명의 역사는 길다. 수레바퀴는 천천히 구른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입자나 힘이나 운동 단계에서 샴페인 터뜨리기 다반사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된다. 좋은게 나쁜 것이고 나쁜게 좋은 것이다. 히틀러도 베를린 올림픽까지는 좋았다. 소련은 한때 20퍼센트 경제성장을 찍었다. 박정희도 한때는 좋았고 김일성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모택동도 대약진운동 직전까지 좋았다.
누구나 한 번 쯤 좋은 시절이 없었겠는가? 이명박도 박근혜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청나라도 강희제 때는 좋았고 징기스칸도 세계를 호령할 때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결과가 좋았던 것이다. 망하기 전까지는 전두환도 결과가 좋았다. 심판받기 전까지는 윤석열도 결과가 좋았다.
도박꾼도 오링되기 전까지는 좋다. 공리주의가 영국에서 일어난 이유는 그때 영국이 좋았기 때문이고 실용주의가 미국에서 유행하는 이유는 미국이 현재 좋기 때문이다. 유럽이 양차세계 대전에 자멸하자 미국은 지갑을 주웠다. 일본도 90년대까지 좋았다. 러일전쟁, 청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했지만 그게 오히려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는 과거 잘 나갔던 영국과 현재 잘 나가는 미국의 허세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미국이 중국에 역전당하면 어쩔 것인가? 스푸트니크 쇼크를 한 방 더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미국인들은 망하기 전까지 실용주의를 숭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좋으니까.
산적도 해적도 마적도 망하기 전까지는 공리주의에 실용주의로 간다.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야. 그러나 세상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공리주의가 공리功利를 추구한다면 구조론은 공의功義를 추구한다. 공리주의는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것이고 공의주의는 원인이 좋으면 다 좋다는 것이다. 원인이 좋은데 결과가 좋지 않은 부분은 확률에 맡겨서 처리한다. 방향을 올바르게 잡고 상호작용을 높여가면 닫힌계 안에서 용해된다. 51 대 49로 계속 이겨서 결국 100대 0으로 저울을 기울어지게 만든다. 문제가 해결된다.
구조론은 원인 차원에서 답을 알고 간다. 올바른 방향을 찾은 다음 부단히 맞대응을 해야 한다. 현장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야 한다. 상호작용을 증대하면 확률이 증가한다. 그래서 결과가 나쁘면 불운한 경우다. 재수가 없으면 경영을 잘해도 망한다. 별수 없다. 노무라 증권 보고서 한 장 때문에 망한 김우중도 재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확률을 누가 만들었지? 오너 리스크가 누적된 것이다. 운도 실력의 일부다.
공리주의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백 년 단위, 천 년 단위의 긴 호흡으로 보면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게 맞다. 그러나 인간은 중간단계에 이미 결과가 나왔다고 착각하고 만세 부르다가 망한다. 인류문명 단위로 크게 보지 않고 마을 단위로 좁혀서 보면 결과가 좋다는 착시가 일어난다. 뒤로 리스크가 누적되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일본인들은 지금 현재상태에 만족한다. 그들 입장에서 결과가 좋은 것이다. 앞으로 망하게 될 것을 모르고 말이다. 정리하면 공리주의는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결과가 좋으니까 좋다고 만세 부르다가 망하는 것이고, 구조론의 공의주의는 원인이 좋으면 결과는 신경쓰지 않는 것이며, 원인이 좋은데 결과가 나쁘다면 확률에 달린 것이며 이때 좋은 원인이 만든 높은 승률은 후손이나 동료에게 돌아갔으며 우리는 의리로 결속하여 동료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또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동료가 확률을 내게 양보했기 때문이므로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합리적인 결정을 계속할 뿐이다. 집단의 상호작용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동하면서 수학이 답을 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