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김태훈 입력 2021. 10. 30. 10:01
"제2의 아프간 될라".. 불안 증폭하는 우크라이나
20년간의 아프간 지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나
'美 복심' 이스라엘 "우리 힘으로 나라 방어할 것"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모어 댄 투 밀리언(More than two million).”
지난 9월 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우크라이나어로 모두발언을 하던 젤렌스키는 딱 한 번 영어를 썼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코로나19 백신 200만회 접종분 이상을 제공해줘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목이었다. ‘200만회분 넘게’란 표현이 제대로 전달된 건지 불안했던 젤렌스키는 갑자기 영어로 말하고선 통역사를 쳐다봤다. ‘뜻이 잘 통했다’는 신호를 받고서야 그는 안심한 듯 다시 우크라이나어로 발언을 이어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방침 발표 후 아프간을 떠나는 미군 부대가 그동안 게양돼 있던 성조기를 내리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제2의 아프간 될라”… 불안 증폭하는 우크라이나
당시는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 망한지 20일도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인접한 강대국 러시아, 그리고 자국 내 친러시아 반군으로부터 나란히 위협을 받는 우크라이나는 ‘제2의 아프간이 될지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젤렌스키의 언행에선 어떻게든 미국의 마음을 사 그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 보전에 대한 지지는 변함없다”고 했다. 29일 외신에 따르면 바이든은 지난 19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을 키예프로 보내 미국의 군사원조를 확약했다. 다만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우크라이나가 먼저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국방장관을 만난 오스틴은 서유럽과 미국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대서양 기준’의 충족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군에 대한 문민통제 강화, 군수산업 분야의 투명성 확대, 인력관리 체계 개선 등을 주문했다. 내전을 치르며 비대해진 군대는 부패의 온상이 되고, 값비싼 무기 도입 결정 등은 밀실에서 이뤄지며, 이에 실망한 젊은이들의 해외취업과 이민으로 고급 두뇌 유출이 심각한 현실을 질타한 것이다.
◆“20년간의 아프간 지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오스틴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강력한 자문 노력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개혁을 잘 이행하도록 도울 것”이라고도 했다. 약속을 지키는지 무시하는지 미국인 고문들이 옆에서 철저히 감시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서 아프간 붕괴 후 그 대외정책의 변화를 확실히 느낀다. 2001년 탈레반을 타도하고 아프간에 친미 정권을 세운 미국은 이 나라가 자립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공을 들였다. 미국 무기로 무장한 아프간 군대를 미군 요원이 훈련시켰다. 지난 4월 아프간 철군 방침을 밝히며 미국은 “20만에 달하는 아프간 군대와 경찰이 탈레반의 공격을 막아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틀렸다. 막상 미군 철수가 본격화하자 부정부패에 물든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의 상대가 안됐다. 수도 카불이 탈레반 수중에 떨어진 뒤 바이든은 배신감을 토로했다. “아프간 대통령한테 정부와 군대, 사회 전반의 부조리 척결을 주문했다. 내 앞에선 ‘그러겠다’고 해놓고선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철군 반대론자들을 향해선 “아프간군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미군이 싸우고 죽어선 안 된다”고 했다. 지난 20년간의 아프간 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음을 자인한 꼴이다.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국의 복심’ 이스라엘 “우리 힘으로 나라 지킬 것”
따지고 보면 미국 입장에서 아프간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1940년대 장제스의 중국에 대한 지원, 1960∼1970년대 베트남 전쟁 기간 월남 정권에 쏟은 노력 등도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중국군과 월남군 지휘부는 미군이 제공한 무기를 되레 적군에 팔아 제 잇속만 챙기는 등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중국이 대만으로 쫓겨 가고 월남이 패망한 뒤 미국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이번엔 미국이 제대로 달라진 걸까. 아프간 사태 이후 미국의 변화한 낌새를 가장 먼저 알아챈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아프간 붕괴 직후인 8월 27일 백악관을 찾은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는 바이든 면전에서 “이스라엘은 이제껏 한 번도 미국에 우리를 지켜줄 군대를 보내달라 요청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이스라엘을 지키는 건 우리가 할 일이고, 우리는 안보를 ‘아웃소싱’ 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미국이 “한국과 아프간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지만 우리도 안심할 수만은 없다. 최악의 경우 미군 없이 우리 힘만으로도 북한 침략을 격퇴할 수 있다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할 때 미국 등 국제사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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