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10. 26
사상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노예제보다 소작제가 낫고 소작제보다 자영농이 낫다. 그런데도 노예제를 하는 이유는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이다. 관건은 철제 농기구다. 농기구는 대장간을 소유한 귀족의 것이다.
귀족은 아침에 농기구를 배분하고 저녁에 회수한다. 농기구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작제로의 전환은 불가능하다. 청동기로 전쟁하고 철제품은 농기구로만 쓰던 시대다. 농사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함에 따라 소작제로 바뀌었다. 대장간이 마을마다 들어섰다.
봉건제는 국가의 동원력이 낮아 대중을 정치에 동원할 수단이 없으므로 권력을 나눠가진다. 왕은 귀족에게, 귀족은 기사계급에, 기사는 농민에게 권력의 일부를 나눠주고 다단계 수법으로 동원한다. 미디어와 교통통신의 발달로 국가의 동원력이 증대된게 절대왕정의 대두다.
중국은 평지가 넓어 인원을 동원하기 쉬우므로 절대권력이 이르게 등장한다. 일본은 섬으로 나눠져 있어서 봉건제가 오래 간다. 조선은 중국의 침략 때문에 왕정이 자라잡았다. 동원력 한계로 권력을 나눈 것이 봉건제라면 반대로 동원력이 증대하자 권력을 합친게 제국주의다.
칸트의 이성은 엘리트를 동원한다. 기층민중을 동원하는게 사회주의다. 러시아는 땅이 넓어 도시 노동자 위주로 동원하고 중국은 인구가 많아 농민을 동원한다. 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다들 동원에 미쳐 있었다. 백만 받고 천만, 1억 받고 10억이다. 그게 전체주의 광란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탈근대 사상이 대두된다. 동원중독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너무 많이 동원되자 낯선 사람과 충돌한게 인종주의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똘레랑스가 주장된다. 똘레랑스를 악용하는 자가 등장하자 앵똘레랑스에는 똘레랑스가 필요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탈근대든 똘레랑스든 정치적 올바름이든 시대상을 반영하는 지식인의 유행어다. 밑바닥에서는 물리적 충돌이 일어난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계몽되지 않은 우매한 대중이 뭐를 몰라서 화를 내는게 아니다. 책상물림 지식인들이 무관심할 뿐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마찰은 현장에서 물리적으로 일어난다. 난민이 쏟아지고 이민이 급증하고 일자리가 사라진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똘레랑스는 수동적 대응이다. 탈근대는 방어적 대응이다. 다들 미쳐서 날뛸 때 어지간히 좀 해라 하고 말리는 행동이다. 그런데 차별주의는 공격적이다.
적은 현장에서 신무기로 공격하는데 우리는 살롱에 죽치고 앉아서 입바른 말로 방어만 한다? 선제대응이 아니면 안 된다. 공세적 대응이 아니면 안 된다. 진실을 정면으로 말한 사람은 공자와 니체 뿐이다. 다들 점잖은 척 하며 말을 돌려서 하고 유행에나 편승하는데 말이다.
그 시대에 진짜배기는 없었다. 샤르트르는 공산주의를 비판하지 못했고 까뮈는 알제리를 배반했다. 생텍쥐뻬리는 프랑스를 탈출한 자유프랑스군과 프랑스에 남은 배신자들 사이에서 번민했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시대였으니까. 시대를 뛰어 넘는 초인은 원래 없는 것이었다.
필자도 한 때는 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지성인이 있는줄 알았다. 세월이 흘렀고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운명의 굴레 앞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서 어설픈 삐에로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에너지 흐름에 휘둘리고 있었다. 춤은 추는데 박자는 맞아주지 않았다.
줄을 잘 서서 겨우 망신을 면할 뿐 앞장서서 횃불을 들고 광야를 밝히는 한 사람의 진짜배기는 없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대였다. 자네 혹시 영웅이 되어 보지 않겠는가? 이러면 그래! 어쩌면 내가 영웅일지도 몰라. 까짓거 세상이 영웅을 원한다면 내가 영웅 연기를 해주지.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던 시대. 스탈린도, 모택동도, 낫세르도, 김일성도, 박정희도 영웅놀이에 분주했다. 부나방처럼 뛰어들어 부나방처럼 타죽었다. 김동길, 이문열, 진중권, 강준만, 홍세화, 최장집, 마광수. 리사이틀이 반짝 흥했을 뿐 잽싸게 본래의 바보를 회복했다.
영웅을 찾는 분위기에 주제넘게 영웅 역할에 도전했다가 시대가 변하자 꼴이 우스워진 것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공자가 말한 것은 권력이다. 니체는 신을 물어뜯었을 뿐 인간을 그 자리에 세우지 못했다. 공자는 우상이 떠난 자리에 인간을 세웠다. 권력이 이 게임의 본질이다.
권력을 디자인하는 것은 의리다.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은 사기다. 시대가 먼저 변하고 철학자들이 뒤늦게 그 시대에 맞는 해석을 제출하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 사상가들은 언제나 과거를 예언했다. 앞서간 나라의 유행을 후진국에 보급하고 우쭐하곤 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는 60년대 낭만일 뿐이다. 그때 그러고 놀았지. 마약에 취했고 혁명에 취했고 통기타에 취했고 청바지에 취했지. 그래도 좋았어. 워낙에 그런 시대였으니까. 비료가 보급되고 지구촌을 짓누르던 맬서스트랩이 깨지자 일제히 긴장이 풀린게 베이비붐 시대의 낭만이었다.
권력은 실제로 존재하고 동원력은 현장에서 작동한다. 게임은 현장에서 일어난다. 자동차가 변하면 운전기술도 변한다. 생산력과 문화의 상호작용하는 게임이 벌어진다. 그것을 디자인하는 것은 의리다. 시험을 치르듯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중에 하나를 찍으면 되는줄 안다.
앉아서 찍는 것은 가짜다. 자동차는 익숙해져야 한다. 현장에서 핸들을 쥐어야 진짜다.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인간이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는 데는 어쩔 수 없다. 왜 항우는 실패하고 유방은 성공했을까? 우리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지만 만약 일본이 친절하게 조선을 대하면?
일본이 진정성을 가지고 조선인을 사랑으로 대했다면? 전혀 차별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천황폐하 만세를 부를 참인가? 의리가 진짜다. 부모와 자식의 의리, 부부의 의리는 무의식으로 맺어지고 호르몬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일본이 잘해도 조선은 거부한다. 왜?
인간은 원래 그런 동물이다. 그게 의리다. 의리는 선천적으로 주어지고 후천적으로 맺어진다. 의리있는 팀이 이기고 의리없는 팀은 진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의리가 없다. 호르몬이 없다. 동물도 그렇다. 사자는 무리생활을 하고 호랑이는 단독생활 한다.
사파리에 호랑이와 사자를 함께 풀어놓으면 언제나 우두머리 자리는 사자가 차지한다. 호랑이가 지배한 시기도 있었지만 짧았다. 형제 호랑이 두 마리가 붙어다니면서 사파리를 지배한 시절이 있었지만 발정기가 오면서 끝장이 났다. 인간은 의리를 배워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똘레랑스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탈근대니 하는 반짝 유행어로 인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보다 공격적이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물리적이고 밀도있는 방법으로 선제대응해야 한다. 사상은 관념이고 의리는 물리다. 팀플레이를 잘하는 독일팀이 언제나 이긴다.
패스를 잘하면 축구를 이긴다. 의리는 일체의 차별에 물리력으로 맞선다. 권력을 장악하고 적을 제압해 보인다. 차별은 공격이고 똘레랑스는 방어다. 뭘 하지 말자는 똘레랑스나 탈근대로 일베의 야만을 쳐부술 수 없다. 공격적인 야만에 맞서는 공격적인 문명이 필요한 거다.
우리는 군자의 의리로 소인배의 야만에 맞서서 이겨야 한다. 제압하고 권력을 틀어쥐고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정치는 하나의 균형에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또다른 균형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한다. 튀어나온 못대가리를 두들겨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정치의 다스림이다.
한국 정치의 위기는 경상도 쪽수에 의한 불균형 때문이다. 군자의 의리로 연결하여 맞서야 한다. 똘레랑스니 탈근대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하는 골방 지식인의 푸념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공격적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튀어나온 못대가리를 매우 쳐서 다스려야 한다.
세력간 힘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정의다. 이미 벌어져 있는 사건을 심판하는 뒷북 정의 말고 선제대응하는 힘센 정의가 필요하다. 공자의 의리를 배워야 진짜배기 정의가 가능하다. 역사는 게임의 기록이다. 우리는 부단히 이겨보여서 문명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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