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와 의리
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09. 15
의리의 '의'가 의무라면 '리'는 법칙이다. 의리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 의무다. '리'는 옥을 가공하는 장인이 결따라 가공하는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결이 어긋나면 옥이 깨진다. 의리는 법칙을 지켜서 꾀하는 일이 성공하도록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의무다.
결을 어기면 옥이 깨지듯이 법칙을 어기면 일이 실패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연결 아니면 단절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건이 계속 연결되도록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향을 틀 때 그러한 연결성이 드러난다.
관계를 끊으려 할 때 마음 속에서 붙잡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의리다. 군신의 의리, 부부의 의리, 가족의 의리, 동료와의 의리가 있다. 천하와의 의리, 신과의 의리도 있다. 의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모르는 사람과는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남이면 의리는 없다. 우주 안에서 완전히 남인 경우는 없지만 맡은 임무 안에서는 남이다. 일어난 사건 안에서 그리고 주어진 임무 안에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라운드 안에서 패스를 하는 것이다. 사건이 흘러가는 방향과 범위 안에서 의리를 지켜야 한다.
제자의 '제'는 동생뻘이고 '자'는 손자뻘이다.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팀원은 패스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회사의 동료와는 업무로 연결된다. '구조론의 제자'라는 말은 '구조론의 세력화'라는 임무로 연결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냥 이익을 빼먹고 제 갈 길 가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다.
예수의 사랑은 포지티브다. 예수는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시도한다. 공자의 의리는 원래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한다. 예수의 사랑이 가족처럼 다가간다면 공자의 의리는 배신자를 죽인다.
진행하는 방향이 다르다. '제자'라는 말은 그 진행방향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냥 동등한 무리가 아니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고 세력화는 고참에서 신참으로 간다. 예수의 사랑은 그냥 둥글게 모이고 공자의 의리는 엔트로피에 따라 패스가 전달되는 순서대로 간다.
구조론의 권력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일에 뛰어든 사람에게 주어지고, 패스를 전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에게 권력이 간다. 구조론은 전쟁을 한다는 점이 다르다.
필자는 초딩시절에 종교를 경멸했지만 중딩이 되고 생각이 바뀌었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므로 없앨 수 없다. 철학으로 대체해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는 사람을 연결시키고 연결은 이익이 된다. 동물적 본능의 충족으로 이득이 되고 인맥의 연결로도 이익이 된다.
철학가라면 거짓말을 지어낼 수는 없다.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연결을 시도하면 결례다. 공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는 원래부터 연결되어 있음을 찾아내야 한다. 신이라는 개념을 붙잡고 있는 이유다. 근원까지 추궁해 들어가면 문명의 진보라는 임무에 의해 인류는 모두 연결되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종교와 다르고 강단 위주의 학계와도 다르다. 학계와 종교계는 공존하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암묵적인 룰을 어기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창조과학회에 지적 설계론자다. 학계는 단지 지식을 전수할 뿐이다. 돈과 명성을 받고 그 댓가로 지식을 판매한다.
구조론은 지식을 팔지 않는다. 돈 주고 살 사람도 없고. 구조론은 피아를 구분하고 세력을 만들고 적과 싸운다. 본능에 의지하는 종교의 길과, 댓가를 받고 지식을 판매하는 과학의 길과, 널리 사람을 연결하여 야만을 타격하고 문명을 성취하는 철학의 길 중에서 구조론은 세 번째 철학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은 학계의 방법이고 구조론은 다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적과 싸워서 게임에 이겨야 한다. 그것이 진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부단한 상호작용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서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상호작용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가만 있으면 안 되고 싸워야 한다.
역사는 진보와 보수가 싸워서 보수를 이겨온 기록이다. 정치는 변방에서 중심을 치는 것이다. 구조론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적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는다. 적을 달고 다니며 언제나 51 대 49의 우위를 유지한다. 그래야 기세가 붙기 때문이다. 동적상태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다.
적을 제압하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오고 무장을 해제하고 소집을 해제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싸우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망한다. 우리는 계속 소집된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연결되어 있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치고나가는 기세를 잃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전쟁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기려면 연결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의리이며 문명과 야만의 기나긴 싸움에 참가하는 자가 제자다. 전투를 하면 명령계통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명령을 전달하는 '제'와 명령을 전달받는 '자'가 있다. 쓸데없이 내전을 유발하는 자는 제거된다. 적군에 가담하는 배신자는 죽인다.
구조론은 광장이 아니다. 아무나 와서 무질서하게 떠드는 곳이 아니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곳이 아니다. 입에 달달한 말을 립서비스 하는 곳이 아니다. 돈 받고 지식을 판매하는 곳도 아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부단한 싸움에 임하여 장교단이 되고 성직자가 될 중간허리를 길러내는 곳이다. '제'는 패스를 전달해야 하고 '자'는 패스를 전달받아 슛을 쏴야 한다.
구조론을 만만하게 보고 소동을 벌이면 심심하던 사이트가 잠시 활력을 얻을 수도 있으나 오래가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상대의 반응을 끌어낼 의도를 가지고 공연한 말로 사람을 자극하는 소인배 행동을 하는 자는 구조론의 제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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