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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리를 알아야 인간이다

◆의사결정학

by 21세기 나의조국 2021. 9. 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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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를 알아야 인간이다

구조론연구소  김동렬  2021. 09. 14

 

 

여러분은 의리를 지켜서 구조론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아무나 구조론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킬 의리가 있는 사람이 제자가 된다. 의리가 없는 사람은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 구조론에서 얻은게 없다면 지킬 의리도 없는 거다.


    누구나 짐승으로 태어나지만 의리를 배워서 인간이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게 의리다. 그런데 의리를 영어로 옮길 수 있는 말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리를 선점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영어로 된 문장에서 의리 한 단어만 한글로 쓰고 한글발음으로 읽으면 된다. 범어로 쓰는 불경의 다라니와 같다.

    의리의 의는 의무다. 리는 연결이다. 정확히 말하면 연결과 단절의 갈림길이다. 연결이 되면 이득이 있고 이득이 있으면 의무가 있다. 그것이 의리다.

    서세동점 이후 공자의 인기가 떨어져서 의리는 대다수 서양인에게 여전히 생소한 개념으로 남아있다. 다시 동양이 서양을 추월하면 동양적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다. 유교권의 가치는 한 마디로 의리다. 의리는 타인과의 공존이다. 

    부모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의리다. 국가에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의리다. 동료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게 의리다. 타인과 공존함으로써 유무형의 이득을 얻었다면 그 만큼 내놓아야 한다. 구조론에서 얻은게 없는 사람은 그냥 가던 길 계속 가면 된다. 얻은게 있는 사람은 의리를 지켜야 한다. 


    공자의 의리는 마이너스다. 예수의 사랑은 플러스다. 방향이 다르다. 사랑은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이 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다. 의리는 그런게 없다. 의리는 연결이며 연결이 끊어지면 의리도 없다. 

    의리는 계약이다. 모르는 사람, 신세진 일이 없는 사람, 낯선 사람에게는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다같은 편의 동료에게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국힘당은 적이므로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다. 윤석열이 망하면 '그거 꼬시다' 하고 세 번 웃어주면 된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와는 가는 길이 다르다.


    우리가 다친 사람을 구조하거나 약자를 돕는 것은 암묵적인 계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리는 원래 도원결의를 맺고 천지신명 앞에서 맹세를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만 많은 경우 요란하게 맹세를 하지 않아도 이미 맹세한 셈이다. 

    적은 보는 즉시 죽이는게 원칙이므로 뻔히 보고도 죽이지 않았다는게 이미 공존의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 자체로 맹세다. 교육을 받은 사람은 맹세하지 않아도 이미 맹세한 것이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세례를 받은 셈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우주의 근본은 게임이다.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승자가 패자를 제압함으로써 우주는 비로소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단체전이냐 개인전이냐다. 단체와 개인이 겨루면 단체가 이긴다. 단체전을 하려면 적을 외부에 두어야 한다. 같은 편끼리 내전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


    단기전이냐 장기전이냐, 국지전이냐 전면전이냐다. 전쟁이 개인전으로 끝나고, 단기전으로 끝나고, 국지전으로 끝난다면 의리는 필요가 없다. 각자도생이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받은 만큼 일하면 되고, 가게에서는 돈을 지불한 만큼 물건을 챙겨가면 된다.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장기전이고 전면전이면 누군가 희생하게 된다. 하필 폭탄이 내 앞에 떨어졌다면 내가 그 폭탄을 덮쳐서 동료를 살려야 한다. 의리는 같은 편끼리 편을 먹고 이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우리편이 이긴다면 죽는게 맞다. 그것이 의리다.


    의리가 핸들이다. 우리는 환경과 연결되고, 사회와 연결되고, 가족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 이미 연결되어 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 연결을 끊는 것이다. 죽음에 의해, 이별에 의해, 이동에 의해 연결이 끊어진다. 연결은 내가 결정하지 않지만 단절은 내가 결정한다. 

    의리는 내가 결정하지 않지만 배신은 내가 결정한다의리는 연결되어 있음의 이득을 누리는 만큼 단절에 앞서 신중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결국 끊게 된다. 죽으면 다 끊어진다. 실패하면 끊어진다. 내가 연락을 끊지 않아도 상대방이 먼저 주소록에서 내 연락처를 지운다.


    기독교의 사랑이든 공자의 의리든 같다. 마이너스로 보느냐 플러스로 보느냐의 차이다. 플러스로 보는 사람은 매일 기도를 플러스 한다. 마이너스로 보는 사람은 묵묵히 배신자를 처단한다.


    우리는 의리를 지켜서 환경과의, 사회와의, 동료와의 긴밀한 연결이 유지되는 상태, 지렛대가 박혀있는 상태, 핸들을 거머쥔 상태, 치고나가는 기세가 유지되는 동적 상태, 권력이 작동하는 상태, 상호작용이 이어지는 상태,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조금이라도 연장해야 한다. 결국은 핸들을 놓치고 죽는다.


    자선을 베풀라거나, 봉사활동을 하라거나, 십일조를 내라거나, 기도를 하라거나 하며 무언가 플러스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유난을 떨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배신자는 죽인다. 선을 실천하지 않아도 좋다. 악은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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