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입력 : 2021-08-22 06:00:00 수정 : 2021-08-22 09:14:35
“20년을 낭비했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지난 15일 아프간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국의 침공으로 실각한 지 20년 만의 귀환이다.
이날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은 험비 군용차량과 포드 픽업트럭 등 미국이 아프간 정부군에 지원했던 장비를 앞세웠다.
과거 미군이 주둔했던 칸다하르 공군기지에서는 탈레반이 정부군이 쓰던 미국산 UH-60 헬기에 탈레반 깃발을 꽂았다.
카불 국제공항은 아프간을 탈출하려는 외국인과 아프간인이 몰려들면서 한때 기능이 마비됐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지가 없었던 정부와 군대의 최후였다.
미군이 아프간 군경에 제공한 험비 차량들. 상당수가 탈레반에 넘어갔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미국 무기가 미국 위상에 상처를 냈다
미국은 2001년 탈레반을 축출하고 아프간에 정부를 수립한 이래 20년 동안 정부군 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군과 경찰을 모집해 훈련하고, 미군이 쓰던 장비를 대량으로 제공했다. 미국의 침공으로 아프간에 있던 중화기가 상당수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아프간 방위를 아프간인들에게 맡기기 위해 육군과 공군을 재건했다. 미국이 2005년부터 아프간군 기금(ASFF)으로 지원한 자금은 750억 달러(88조 원)에 달한다.
아프간군을 위해 미국은 제3국에서 무기를 사서 제공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브라질 항공기 제작사 엠브리어가 만든 프로펠러 경공격기 A-29 슈퍼 투카노였다.
미국이 기존에 제공한 MD-530F 헬기는 고산 지형 높이까지 날지 못하고 화력도 약했다. 반면 4억2700만 달러(5211억 원)를 들여 20대가 제공된 슈퍼 투카노는 기관포와 폭탄, 로켓탄 등을 장착할 수 있고, 내구성이 우수했다.
아프간 공군 A29 슈퍼 투카노 경공격기. 브라질에서 만든 것을 미군이 구입해 아프간에 제공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지난 5월 미군 철수 시작 후 개시된 탈레반의 대공세에 정부군이 무기력하게 무너지면서 미국이 정부군에 제공한 엄청난 양의 현대식 무기들은 탈레반에 넘어갔다.
총탄을 막을 수 있는 장갑을 장착한 험비 차량, 미국산 픽업트럭, M113 장갑차, 지뢰방호차량(MATV), M1117 차륜형장갑차, M4 소총, M240 기관총 등이 포함됐다.
UH-60 헬기와 슈퍼 투카노 경공격기, 스캔 이글 무인정찰기도 탈레반의 수중에 넘어갔다.
트위터에는 경비병이 도주한 무기고에서 탈레반이 미국산 소총을 옮기는 동영상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직후에는 미국산 M16이나 M4 소총을 든 탈레반 전투원의 사진이나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아프간 라흐만주에서 탈레반 전투원과 주민들이 험비 차량에 올라가 있다. AFP 연합뉴스
소총은 부품과 탄약을 쉽게 구할 수 있어 사용하기가 용이하다. 험비 차량과 트럭 정비는 인터넷을 활용하고 정부군에서 투항한 사람을 투입하면 가능하다.
미국 무기를 무력하게 내줬다는 점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에는 굴욕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같은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1975년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미국은 남베트남군에 제공했던 암호 기계 수백 대와 관련 자료를 북베트남군에 빼앗겼다. 탈취당한 기계는 옛 소련과 중국에 넘어갔다. 미국 정보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이었다.
정보 공유 수단이 제한적이었던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미국 정부가 모른 척하면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널리 쓰이는 현대 사회에서는 탈레반의 행동을 숨기기 어렵다. 미국의 국제정치적 위상에 흠집이 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탈레반 전투원들이 카불 시내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상당수 전투원들이 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미국산 소총으로 무장했다. AP 연합뉴스
◆“미국 의존은 위험” “아프간과는 달라”
미국의 아프간 철군 결정에 대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군이 자신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지 않는다면 미군이 1년 또는 5년 더 주둔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며 철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독재적인 권위주의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아프간 철군으로 ‘신뢰할만한 동맹’이라는 전제가 깨진 만큼 자주국방 기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내전이었던 아프간 전쟁과의 비교는 부적절하다”며 러시아와 중국의 공세적 행동에 직면한 폴란드, 발트 3국, 일본의 사례를 들어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정부군에서 빼앗은 미국산 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 전투원들이 미국산 픽업트럭을 타고 카불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AP 통신
미국은 동맹국들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바이든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만과 한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아프간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면서 한국 등은 아프간처럼 내전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원국을 침략하거나 그에 반하는 조처를 할 때 미국이 대응한다는 북대서양조약기구 5조를 거론했다. 이어 “일본과도 같다. 한국과도 같다. 대만과도 같다”고 강조했다.
주한미군 2만8500명이 주둔하는 한국은 아프간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관측이 많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 규합을 통한 중국 견제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감안하면,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극단적 카드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낮다는 평가다.
한국은 고도로 정교한 무기와 지휘체계를 갖춘 50만여 명의 병력이 있고, 내정도 안정적이다. 아프간과는 다르다.
한국군 장교가 과학화훈련에 참가해 전방을 경계하고 있다. 육군 제공
하지만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가속화 등을 통해 북한의 위협에 맞서 나라를 지킬 의지와 능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한미 동맹의 미래는 불확실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국익 없는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프간 전쟁처럼 미국이 일방적으로 지원을 하는 동맹 관계는 실효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상호 협력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군이 영국이나 호주, 캐나다처럼 미국이 개입하는 전쟁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여전한 상황에서 병력이나 장비를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남은 방법은 ‘한반도 방위의 한국화’다.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분쟁은 한국 주도 하에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이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충해야 한다.
한반도 유사시 90일 안에 병력 69만명, 5척의 항공모함, 함정 160여척, 항공기 2500여대를 한반도에 파견하는 작계 5027은 이미 효력을 잃었다.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서 고질적인 병력 부족 문제로 안정화 작전에 실패한 미군이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능력은 없다.
미 해병대원들이 헬기에서 강하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주한미군 외에 해군과 공군, 특수전부대와 일부 육군 병력 정도만 실질적으로 파견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독자적인 전력증강의 필요성이 그만큼 높은 셈이다.
전작권 전환은 코로나19 사태로 절차가 늦어지고 있지만, 감시정찰, 지휘 및 전략적 타격능력과 더불어 지상군 전투력 강화 등에도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스스로를 돕지 않으면 남도 돕지 않는다는 교훈은 아프간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군 소식통은 “아프간 정부와 군이 제대로 했으면 미군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가 강해질수록 미국은 우리가 더 필요해진다. 안보 역량을 더욱 강화해 굳건한 한미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美 국무부 "北과의 관계 목표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 (0) | 2021.08.25 |
---|---|
미국서 '백신 경시·반대' 보수 방송인들, 잇달아 코로나로 사망 (0) | 2021.08.24 |
탈레반 '공식 입장' 인터뷰 "합법 정부 인정·한국과 경협 희망" (0) | 2021.08.23 |
셰일혁명의 나비효과..바이든, 시진핑에 탈레반 떠넘겼다 (0) | 2021.08.22 |
부시의 '네오콘'이 쏘아올린 '한국·아프간 비교'...백악관은 "근본적으로 달라" (0) | 2021.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