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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악의 도쿄올림픽에서 발견한 가능성, 한국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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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21. 8. 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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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도쿄올림픽에서 발견한 가능성, 한국은 달라졌다

[하성태의 인사이드아웃] 20세기 국가주의와의 결별

오마이뉴스(시민기자) 21.08.10 07:24l최종 업데이트 21.08.10 07:24l

하성태(woodyh)

 

 

우리 국민 대다수는 그간 국가 스포츠의 결정판이었던 올림픽에 대한 인상적인 기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집단의 기억이 완성된 첫 번째 올림픽은 물론 1986 서울 아시안게임과 연이어 개최된  88 서울올림픽일 것이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강렬하냐면, 40대 이상 세대 중 86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인 임춘애 선수의 (훗날 왜곡‧허위 보도로 알려진) '눈물 나는 라면' 스토리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언론이 오래오래 확대 재생산한 집단의 기억이 그렇게 무섭다. 서울올림픽은 직전 84 LA올림픽과 달리 당연히 시차 없이 시청과 관람이 가능했다. TV 보급률도 이전보다 월등히 상승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개최가 확정됐던 서울올림픽을 노태우 정권은 '국격 상승'과 함께 높아져가는 민주화 열기를 잠재우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때부터 올림픽 정신은 국가주의와 동의어로 자리 잡았다. 올림픽 금메달은 국위선양의 척도였고, 이를 완성한 이들이 방송과 언론이었다. 금메달 순위경쟁이 메인뉴스를 매일 장식했고, '한국은 몇 위, 일본과 중국은 또 몇 위'와 같은 아시아 국가 간 경쟁 보도가 일상이었다.

엘리트 스포츠로나마 선진국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던 심리의 발로가 아닐 수 없었다. 시청률과 판매 부수 경쟁이 일상인 언론도 그런 경쟁 구도가 여러모로 이득이었을 터다. 그 국가주의, '저개발의 기억'은 올림픽을 그저 스포츠 자체로만 즐기고픈 국민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으레 올림픽은 메달 색깔을, 순위경쟁을 먼저 챙겨야 할 것 같은 무의식에 지배당했다고 할까.

하지만 이번 2020 도쿄올림픽은 달랐다.

콤플렉스 극복하기
 


선수들 걱정부터 앞섰다. 무관중 개최니 코로나19 확진자 급증이니 일각의 보이콧 목소리도 무리는 아니었다. 2016년 리우올림픽 폐막식 당시 슈퍼마리오 복장을 하고 등장해 도쿄올림픽을 홍보했던 아베 전 총리마저 개막식을 불참해 버렸으니 오죽했으랴. 일본 스가 정부와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연이은 헛발질과 불협화음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폭염과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신음하던 국민의 근심을 날리게 해준 것은 역시 선수들이었다. 구태여 투혼을 강조하지 않아도 선수들의 투혼은 스스로 빛이 났다.

3관왕에 빛나는 여자양궁 안산 선수를 비롯한 금메달리스트뿐만이 아니었다. 1988년에도, 2021년에도 선수들은 일부 노장을 제외하곤 20대가 주축이요, 10대들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달랐다. 과거 소속 협회를 위해, 국민적 관심으로 인해 메달 경쟁에 부담을 갖고 주눅이 들었던 예전 그 선수들이 아니었다.

여자배구팀이 그랬다. 대표팀 주축 선수들의 퇴출 및 부상 등 악재와 세계 12위란 비교 열세에도 '김연경 보유국'임을 자랑하듯 9년 만에 '4강 신화'를 다시 썼다. 이들은 주눅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타 종목도 마찬가지였다. 프로 선수들은 프로 선수대로, 실업팀 소속이나 10대 학생 선수들은 또 그들대로, 모든 선수들은 개개인의 노력의 결실과 그에 따른 성취감에 만족하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코로나19로 인해 꼼짝없이 '방구석 1열'에서 시차 없이 중계를 만끽한 국민들이 이에 감동한 건 당연지사.

그 결과, 육상 높이뛰기 우상혁 선수처럼, 기계체조 마루 류성현 선수처럼 결승 도전과 그에 도달하는 노력 자체에 의의를 부여하는 시선이 부각됐다. 4위를 차지한 선수들에게 '4위여도 괜찮다, 감사하다'는 반응이 쇄도했다. 자신을 이긴 결승전 상대에게 웃으며 '엄지척'을 전했던 태권도 이다빈 선수가 주목을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경기 자체를 즐긴 국민도 다르지 않았다. 메달경쟁에 굳이 목맬 필요가 없어 보였다. 자기가 보고 싶은 종목의 중계를 온라인으로 찾아보고, 경기 자체에 집중하며, 응원하는 선수들을 향한 '팬질'에 몰두하기 바빴다. 선수들도, 국민들도, 20세기식 '국가주의' 올림픽을 강요받지도 함몰되지도 않은 결과였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듯, 스포츠지 등 일부 매체를 제외하고 '노메달', '노골드'를 앞세우는 보도행태도 비교적 줄었다. 원인이 어찌됐든, 과거 신문 1면과 메인뉴스를 달궜던 종합 순위 집계도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도쿄올림픽의 순기능  

사상 최고의 적자를 걱정하는 것도 모자라 폐막식 중계 화면에서 한국과 아시아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의심을 받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이제 선수들과 국민들이 메달에 연연해 하지 않고 축제를 축제로 즐길 여유를 갖췄다. .

물론 다른 시각도 있었다. 신치용 선수단 부단장은 8일 폐막 기자회견에서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한국 엘리트 스포츠는 내리막을 타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도쿄올림픽에서) 어린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낸 만큼, 한국 엘리트 스포츠가 다시 상승세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올릭픽에서 메달권의 경쟁력을 확인한 23세 이하 선수가 20명이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나이와 경험, 훈련량에 좌우되는 투기 종목이 전통적 강세 종목임에도 불구하고 부진했다는 체육회 분석이 그 근거였다.

그게 옳은 분석인지는 모르겠다. 매번 올림픽이 끝난 이후 부각됐던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스포츠의 균형에 역행하는 분석이 아닌지 해서다. 또 축제 기간이라 잠시 잊었지만, 그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체육계 폭력의 온상이라 지적받는 것도 사실 아닌가. 체육회는, 체육계 전체는 종합성적이 중할 수 있다. 허나 이번 도쿄올림픽은 그 종합 성적이 선수 개개인의 관심도, 국민의 관심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것 아닐까.  

아울러 '나라 망신'까지 자처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 장면들도 없지 않았다. 대회 첫날 터진 MBC의 중계 참사나 안산 선수를 비롯해 일부 여성 선수들을 향한 연이은 '온라인 폭력'은 선수들과 무관하게 터져나온 잡음들이었다.

또 여자배구가 국민적 관심 속에 3-4위 전을 치르던 같은 시각, 귀화한 마라톤 오주한 선수의 부상 기권 소식에 "(메달 획득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망언을 내뱉은 MBC 해설가는 어떠한가. 이밖에 '노메달', '노골드'라거나 '완패', '수모', '망신'과 같은 표현을 기사 제목에 내건 일부 미디어들 또한 선수들이, 국민들이 앞장서 일궈낸 변화의 물결을 따라잡지 못하고 타성과 관성을 반복하고 있었다. 
 

 
'태권도 노골드'를 둘러싼 <뉴욕타임스>의 해석이 눈에 들어온 것도 그래서다. 종주국인 한국이 부진하자 <뉴욕타임스>는 그 자체로 태권도가 우즈베키스탄, 태국, 대만, 세르비아, 터키 등 '메달 소외국'들에 희망을 줬다는 분석을 내놨다. 이러한 메달 국가의 다변화가 태권도의 '성공적인 세계화'의 반증이란 상찬과 함께. 

먼 나라 스포츠 강국의 훈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국가주의에 시달리고 금메달 하나하나에 목을 매던 30년 전 서울올림픽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세계 10억 명 중 1명'이라는 '김연경 보유국'이고, 앞서 '김연아 보유국'이었으며, 현재 'BTS 보유국'이기도 하다. 과거 국가주의와 결별을 고할 필요가 있고, 그 변화는 벌써 시작됐다.

아울러 미디어나 중계진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인권 감수성이나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관성과 타성을 반복할 때, 또 익명의 누구들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일상적인 혐오나 폭력, 경쟁적이고 선정적인 시각으로 피해를 줄 때, 시청자들은, 국민들은 즉각 반응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도쿄올림픽은 누가 그 변화에 둔감한지 확인시켜줬다. 예상치 못한 순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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