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강혜란 입력 2021. 03. 18. 11:01 수정 2021. 03. 18. 18:59
'영어는 도구일 뿐' 주눅 들지 않고 구사
"문법·발음보다 유머 섞은 소통에 초점
배우로서 리액션, 감정 표현 두드러져"
지난해 1월 선댄스 영화제 당시 '미나리' 홍보 사진차 카메라 앞에 섰던 윤여정. [연합뉴스]
“전 한국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연기를 해 왔습니다. 근데 이번 영화는 하기 싫었습니다. 독립 영화라는 걸 알았거든요. 그 말은 즉 제가 고생할 거라는 뜻이죠.”(I’ve been in this business such a long time in Korea. I didn't wanna do it. Because I knew this was going to be an independent movie. That means, I'm going to suffer with all the things.)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윤여정이 지난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영화 상영 뒤 Q&A 시간에 한 말이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농담조로 쏟아낸 솔직한 고백에 객석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저예산 독립영화의 제작 환경이 열악한 것은 뻔한 사실이라서다.
무대에 올라 ‘미나리’ 출연진과 나란히 소개받을 때부터 그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이 “한국에서 온 전설적인(legendary) 배우”라고 운을 떼자 몸둘바 몰라 하면서도 “아이작, 전설적이란 말은 내가 늙었단 뜻이잖아(Isaac, ‘legendary’ means I am old)”라며 나무라듯 눈을 흘겼다. 다른 배우들이 촬영 과정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난 뒤 마이크를 잡았을 땐 “다른 분들은 너무 심각한데 전 안 그래요(They are so serious, I am not that serious)”라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영화 속 할머니 순자 뿐 아니라 배우 윤여정 자체가 이날 무대의 신스틸러였다.
연기 경력 56년차의 74세 배우라 해도 라이브 현장에서 관객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다. 게다가 윤여정은 이 모든 걸 스스로 영어로 한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가수 조영남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11년 살다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다. 서른 안팎에 해외로 가서 아이 둘을 키우며 영어를 익힌 것도 대단한데 귀국한 지 30여년째 그의 영어는 막힘이 없다. 이미 TV예능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서 외국인과 자연스레 소통하는 모습을 과시해왔다.
“미국에서 상당히 살았던 교포의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국어란 게 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단 걸 알고 있다. 미국에서 살았다고 다 그렇게 잘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고 한국말을 다 잘하는 게 아니듯. 오히려 웬만한 미국인보다 듣기도 말하기도 잘하는 것 같다.”
12일 공개된 팟캐스트 '배우 언니' 스페셜 1탄, 뉴요커가 본 미국 '미나리' 현상. [사진 A24, 판씨네마]
경력 22년의 동시통역사 홍희연(프리랜서)씨의 말이다. 홍씨가 첫손에 꼽은 윤여정의 능력은 외국인의 유머코드를 잘 안다는 것. “‘독립영화 안하려고 했다, 고생할 게 뻔하니까.’ 이렇게 미국인도 공감하는 상황을 현지어를 적절히 섞어 무
겁지 않게 풀어낸다. 한국인들이 집착하는 문법, 발음보단 전달력에 집중하는 태도와 자신감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 소감도 마찬가지다. AP통신과의 화상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과 함께 자가 격리 중인 친구 이인아 프로듀서와 둘이서 자축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면서 “문제는 인아가 술을 전혀 못 한단 거다. 혼자 마셔야 한다. 그녀는 쳐다만 보게 될 거다.(The problem is Inah cannot drink any alcohol. so I need to drink by myself. She will be watching me drinking)”라는 깨알 유머를 잊지 않았다.
‘윤스테이’에서 윤여정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며 손님들과 어울린다. [사진 tvN]
이런 유머 감각은 올 초부터 방영 중인 한옥 체험 리얼리티쇼 ‘윤스테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외국인 손님들이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메뉴를 조심스러워 하며 “우리 독살하는 거 아니죠?”라고 짓궂게 물었을 때 그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오늘밤은 아니고, 내일은 모르죠(Not tonight, maybe tomorrow)”라고 재치 있게 답했다. 부부이자 연구실 동료라는 이들에겐 “24시간 붙어 있는 게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남편이 “축복이죠”라고 답하자 “아내 생각은 다를지 모른다”며 귓속말로 따로 묻는 시늉을 했다. 티키타카식 농담과 재치에 손님들은 일제히 “사랑스럽다(sweet, lovely)”는 반응을 보였다.
꾸준한 학습 의지도 돋보인다. 손님에게 우엉차를 대접하자 우엉이 뭐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뉴요커 출신 이서진도, 캐나다 시민권자 최우식도 몰라서 난색을 표할 때 윤여정은 일단 “전통차다. 몸에 좋다(good for your health)”며 권했다. 그리고선 돌아서서 인터넷 어학사전을 검색했다. “영어로는 Burdock이다”고 알려주는 모습에서 수십년간 몸에 밴 습관이 묻어났다.
예의 차리느라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다.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뒤 미 ABC ‘굿모닝 아메리카’와 인터뷰 했을 때 앵커로부터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는 말을 듣자 그는 “우선 저를 한국의 메릴 스트리프라고 하셨는데… 스트리프는 그런 말 들으면 싫어할 것이다(웃음). 칭찬으로 듣겠다”고 말해 진행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홍씨는 “통역할 때도 언어 뿐 아니라 비언어적인 걸 포착해서 녹여내는 게 중요한데 윤여정은 오랜 배우 생활에서 그런 훈련이 잘 돼 있다”고 짚었다. “대답할 때 태도나 말에 감정을 싣는 것, 문장의 어떤 지점에서 쉬어주면서 상대 반응을 보고 리액션하는 게 능숙하다. 고급 단어를 쓰지 않고도 영어를 잘 한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다.”
지난해 ‘봉준호의 입’으로 국내외의 관심을 한데 받은 통역사 샤론 최(최성재)와는 사뭇 다른 영어 스타일이다. 홍씨는 “샤론 최는 소통도 뛰어날 뿐 아니라 언어를 고르는 감각이 탁월하다”고 감탄했다. 대표적으로 꼽은 게 미 NBC ‘지미 팰런 쇼’ 출연 때다. 봉 감독이 ‘기생충’에 대해 “(스토리는) 되도록 여기서 말을 안 하고 싶다. 스토리를 모르고 가서 봐야 재밌다”라고 하자 샤론 최는 이를 “I'd like to say as little as possible here because the film is the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라고 옮겼다.
홍씨는 “(go) cold의 용법이 기가 막히게 적절했다. 통역사로서 내가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윤여정은 그처럼 인상적인 ‘현지 영어’는 없지만 주눅 들지 않는 태도와 소통하려는 진실함이 돋보인다. 동시에 내가 나라는 데 당당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어도 그렇다”고 했다.
정작 윤여정은 자신의 영어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남의 나라 말은 끝이 없다. 내가 거기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완벽하게 할 순 없다. 그래서 ‘윤스테이’를 안 본다. 내가 틀린 거 알기 때문에. 틀린 걸 막 썼을 거다. 아우 짜증난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그의 화술이 언어 장벽을 뛰어넘는 것은 매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일 터다. ‘윤식당’에서 그가 손님들에게 자주 했던 말처럼. “우리는 프로 요리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어요(We are not professional chefs but we did our best).”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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