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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21세기 나의조국 2020. 4. 1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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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URPRISE.OR.KR / 탁류 / 2020-04-11)



고칠 거 고치고 몇 번씩 확인한 다음 연구실로 가 은사님께 논문을 건넸다. 중간과정 생략하고 한 방에 심사까지 갈 요량으로 나는 완성본을 제출했다. 기대감에 차 있었다. “아마 읽어보고 놀라시겠지...”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일주일쯤 지나서 전화가 왔다. 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 은사님은 논문을 툭 던지며 “아이고 ... 이 자슥아 ... 내가 니꺼 읽느라고 머리 깨지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나 논문을 펼쳐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얀 여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새빨간 글씨와 화살표가 가득했다. 인용문이 포함된 쪽을 제외하고 온통 빨갰다. 어찌할 줄 모르는 내 손에 들린 논문을 도로 건네받은 은사님은 접힌 부분을 펼쳐 “다른 데도 고쳐야 할 부분이 수두룩한데 ... 특히 여기 여기서 니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 아니냐?”라고 확인하셨다. 그 외에도 내가 중대한 실수가 있었던 부분을 몇 군데 더 찾아 내 생각과 은사님이 고쳐놓은 부분이 일치하는지 확인하셨다. 그리고 “집에 가 읽어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봐라.”라고 하시며 논문을 건네주셨다. 그날 집에 돌아가 빨간 글씨를 읽으면서 나는 내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어떤 존재를 느꼈다.


특히, 내가 글을 쓰는데 있어서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습관인 “에라 모르겠다..”식의 방임형 단어 선택과 논지 전개 때문에 은사님은 정말 고민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았다. ‘얘가... 앞에 나온 내용으로 미뤄보면 틀림없이 그 다음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나왔어야 하는데 ...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이런 단어나 문장이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와 같은 성격의 수정된 문장들이 수두룩했다. 머릿속에 생각은 있는데 그것이 글로 제대로 표현되려면 정확한 단어와 정확한 문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내가 쓴 문장들은 한 번에 계단을 네다섯 개씩 건너뛰고 있었고 그걸 읽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할 말을 압축해놓거나, 얘기를 꺼내놓았다가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거나, 그것을 읽는 사람의 관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한나절이 걸려서야 나는 다 읽었다. 중간 중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했고 내 생각의 흐름을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해 경외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거나 아예 표현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이게 니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냐?”는 말을 볼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생각을 글로 옮기는 방식을 이해했고 다음부터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지 명료하게 이해했다. 내가 그때 깨달은 것은 생각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머릿속에 거울을 하나 놔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생각을 자기가 선택한 낱말로 조합한다고 해서 그게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글은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타인이 되어 자신의 글을 읽어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주관적 확신에 찬 생각이라도 그것이 글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타인에게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객관화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관대하다. 그때 사람들은 ‘이 정도면 다들 이해하겠지...’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아래와 같다.



1.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써라.


인터넷 공간에 매일 생산되는 글의 양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20세기까지 인류가 구축한 정보의 양을 뛰어넘은 건 말할 것도 없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정보의 홍수다. 그러나 거기에 정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글쓴이의 상당수는 자신들이 쓴 글이 읽을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글쓴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


보편적으로 관심이 있거나 인기가 있는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글의 제목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열어봤을 때 내용이 독자들에게 원만하게 수용되지 않으면 이전화면으로 돌아가기 버튼이 눌러질 것이다. 아무리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2. 생각은 개인의 것이지만, 글은 사회적 소통을 위한 약속이다.


글로 표현되기 전의 생각이나 느낌은 표현된 글과 실제로 다르다. 절대 완벽히 같을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아침에 본 사과를 글로 옮겨도 내가 본 사과와 글로 표현된 사과는 같을 수 없다. “한쪽 면이 햇빛을 많이 받아서 빨간색이 많은데 ... 그게 사실은 빨간색이 아니라 보랏빛이 약간 가미된 빨간색인데 ... 그것도 가운데 부분은 더 진하게 빨갛고 주변부로 갈수록 옅어지는 사과인데 표면에 점이...” 어떤 단어를 사용해도 내가 아침에 본 사과의 색과 형태적 특징을 완전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다. 만 개의 단어를 사용해도, 열 개의 단어를 사용해도, 이 문제는 언어가 해결할 수 없다. 이 둘 사이를 아주 가깝게 하는 것만이 글쓴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래서 완성도의 문제가 개입된다.


겨우 사과 한 개를 글로 옮겨도 우리는 그 사과의 개별적 특성을 생략한 채 단지 사과라고 씀으로써 아침에 본 사과의 실체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여기엔 글로 표현하는데 필요한 시간적 제약이라는 문제가 있고 언어 자체의 한계라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글을 쓸 때는 그런 낱말들이 수없이 결합될 뿐 아니라, 그런 낱말들이 결합된 문장들이 가지는 더 복잡한 의미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최초의 생각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완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글쓴이는 글을 최초의 생각에 근접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은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다.


3.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가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적지다. 가다가 옆길로 새더라도 금방 다시 돌아오면 독자들에겐 큰 실례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적지에서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게 되면 독자들은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러운 데서 그치면 다행인데 독자들은 이윽고 화가 나게 된다. 글이 무성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화를 내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독자들은 갈팡질팡하는 글을 읽게 되면 글쓴이가 독자들에게 “배가 어디로 갈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밑에서 노나 열심히 저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때 독자는 답답함을 느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글을 계속 읽는다면 답답하지 않겠는가. 이런 답답함이 계속되면 독자는 화를 내게 된다. 목적지는 하나여야 한다.


4. 쉽게 써라.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쓴다. 난해한 어구들은 글쓴이의 지적 성취보다는 무지를 드러낸다. 자신의 글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제한된 사람들만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이다. 어렵고 복잡하거나 미묘한 문제들을 다루는 경우에 그것을 쉽게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도전이다. 쉽게 쓸 수 없으면 그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쉬운 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5. 과장하지 않는다.


과장은 왜곡을 낳는다. 도라지는 도라지고 산삼은 산삼이다. 글쓴이는 자신이 아는 것을 효모와 막걸리를 부어 부풀리는 것을 삼가야 한다. 겉은 산삼처럼 보이는데 속은 도라지라면 독자들은 속았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글쓴이가 도라지를 산삼이라고 기만할 생각은 없었는데, ‘도라지나 산삼이나 다 먹으면 좋은 음식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라는 생각으로 분별없이 글을 쓰는 경우다. 이런 경우엔 성의가 없으므로 독자가 글에 집중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6. 필요한 만큼 쓰되 불필요한 것은 지워라.


열 개의 문장이 필요한 얘기를 한 문장으로 줄이지 마라.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대게 글쓴이가 복잡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다. 글쓴이의 머릿속에는 있되 아직 생각이 글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인데도 글쓴이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으로 인해 독자들로 자기처럼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 듣겠지.’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써야 할 말을 채 시작조차 하지도 않았거나 미처 이야기를 끝내지도 않았는데 끝냈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거지?’라고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7. 쓴 다음엔 수정하라.


글쓴이는 타인과 공유하기 전에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귀찮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차분히 독자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다시 읽어보라. 독자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는 말의 뜻은 글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의 관점에서 글을 읽어보라는 것이다. 자기가 쓴 글을 마치 타인이 쓴 글인 것처럼 읽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다른 관점을 가지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드시 모자란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독자들이 모자라거나 잘못 표현되었다거나 혼란스럽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 수정하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또 수정해야 할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런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어야 한다.


수정의 범위는 맞춤법에서 글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전부다.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 있어서 글쓴이가 요리사라면 수정하지 않은 글은 마치 요리사가 손님에게 먹으라고 툭 던져둔 대충 조리한 음식과 같다.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느끼고 글을 공공의 공간에 올렸다면 다시 읽어보라. 그러면 수정해야 할 곳이 또 보일 것이다. 그 이유는 게시판에 올려진 게시물을 읽는 순간 우리는 사적 생각이 아니라 독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읽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글의 수정은 완성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끝이 없는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글은 현실적인 타협이다. 글을 수정하는 것은 원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높은 순도의 광물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불순물의 함유량이 적고 순도가 높을수록 글은 선명해지고 독자의 의식과 직결된다.


8. 맺음말


수정본을 받아 든 그날은 내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들 중 하나였다. 그것은 처음으로 내가 나를 내가 아닌 남이 되어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까지 나는 막연하게 ‘내 생각이 중요해.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대로 글은 써나가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므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던 그것을 글로 전달할 때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무의미하다.>로 글쓰기에 관한 생각을 수정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겐 거의 새로 태어나는 것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은사님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만신창이의 내 글을 읽으며 굉장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얘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야 ... ’ 나 같으면 다시 가져가라고 했을 것 같았다. 정확히 쓰이지 않은 타인의 생각을 재구성하는 것은 엄청난 양의 노동을 요구한다. 그 힘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내 생각의 실체를 명료하게 드러내 주신 은사님의 노고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지적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에 나는 그 지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사님은 내가 낳은 첫 생각의 산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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