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도쿄(일본)·공군1호기=박준식 기자 입력 2019.10.26. 12:05 수정 2019.10.26. 14:59

# 제1국 - 첫 점 포석
이낙연 국무총리는 24일 오전 11시로 예정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면담을 위해 도쿄 총리 관저에 예정보다 20분 이른 10시 40분에 도착했다. 이 총리는 접견실로 이동하면서 동행한 한일 취재진을 향해 엷은 미소를 보였다. 다소 부담감이 있던 탓인지 바닥을 보며 대기실로 이동했다.
아베 총리는 11시 2분께 리오 버라드커 아일랜드 총리와 면담을 끝냈다. 예정보다 다소 늦어진 것으로 아베 총리는 이 면담을 마치고 잠시 이석하면서 이낙연 총리와 다음 면담이 몇 분간 지연됐다. 아베 총리가 돌아오고 11시 11분에 일본 수행진이 접견장에 입장해 도열했다.
이 총리는 약속 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가 예정된 11시가 됐는데도 호출이 없자 초조히 기다린 것으로 전해진다. 10분 후에 일본 측 에스코트가 이뤄지고 11시 12분에 정운현 비서실장과 조세영 외교부 1차관 등 이 총리 수행진이 입장했다. 10분쯤 늦어진 것을 두고 외교적 실례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다리던 아베 총리는 이 총리 일행을 맞아 손으로 앞으로 가시라고 길을 안내했다. 양국 국기 앞에서 두 사람은 기념촬영 했다. 처음엔 엷은 미소를 보였지만 이후 자리에 앉자마자 두 총리는 표정이 굳어졌다. 첫 만남엔 긴장감이 팽팽했다.
# 제2국 - 친밀 탐색전
아베 총리는 지일파(知日派)인 이낙연 총리에 상당한 배려를 보였다. 최초 인사말 시작 부분에 "일본에 대해 많이 아시는 이 총리가 오셔서 고맙다"고 한국 정부대표로 일본을 아는 지도자가 온 것에 감사했다.
아베 총리는 또 "지난해 9월 러시아 동방경제포럼에서 이 총리와 만났다"며 "서울에서도 수년 전 만난 인연을 갖고 있다"고 개인적인 친분을 나타냈다. 이낙연 총리는 "저와 인연을 언급해 친밀함을 나타낸 작은 배려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낙연 총리는 "제가 특파원 시절 이제 선왕이 된 아키히토 일왕 즉위식을 한국에 타전했고, 이제 그 아들인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을 정부 대표로 축하하게 됐다"고 왕실과 인연을 소개했다. 이 총리는 서로 나눈 인사말이 "인연을 자유롭게 얘기하면서, 어떤 얘기(본론)를 하는데 불편하지 않게 마음을 써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제3국 - 가일수 vs 만패불청
예상한 대로 초반은 수읽기와 탐색전이었고, 본론은 공수가 명확했다. 선공은 일본이 기존 견지한 입장을 반복하면서 이뤄졌다. 본론 대화는 일문일답이 아니라 초청자인 아베 총리가 한국에 대한 일본 입장을 중단 없이 얘기해 통역이 이어지고, 이에 대해서 이 총리가 조목조목 답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아베 총리가 강조한 일본 주장은 구체적으로 3가지다.
먼저 첫째는 한국이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 인용 판결을 내려 기존 조약을 파기하면서) 국제법을 위반했고, 둘째 그런 위반이 양국 관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며, 셋째 (한일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한국이 먼저 잘못 내린 결정을 일본 표현으로 '시정(是正)'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교 정상화의 근간인 국가 간 약속(조약)을 먼저 깨뜨린 측은 한국이니, 잘못된 원인을 고쳐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이었다. 한국에 씌운 '위반자 프레임'을 반복한 셈이다.
아베 총리 공격은 가일수(加一手)였다고 볼 수 있다. 대국에서 세를 얻거나 자신의 모양을 지키기 위해 한 수를 더한 것이다.
일본적 방식을 이해하는 이낙연 총리는 상대편 수를 상당부분 예상하고 대화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세 가지 공격에 대해 하나하나 예를 갖춰 답한 것을 보면 준비했던 바를 엿볼 수 있다. 일본 측 인사들에게 귀띔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총리는 (강제징용 한국 대법원 판결이) 첫째로 (국제법 위반이 아니라) 일부에 국한된 서로의 입장차이며, 둘째 한국은 일본과 관계에 있어 1965년 한일기본관계조약(국교 정상화 협정) 협정을 준주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셋째 (일본의 시정 조치에 대해서는) 서로가 늘 그래 왔듯이 이견차를 좁히기 위해 지혜를 짜내자고 대응했다.
이낙연 총리가 응한 전략은 상대방이 아무리 공격해도 그를 가시 돋친 대꾸가 아니라 포용의 품격으로 껴안는 만패불청(萬覇不聽)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제4국 - 본심
두 총리 모두 근본은 정치인이다. 국민감정을 의식해 표면적으로는 공방을 주고 받았다하더라도 서로가 존중하는 사이인 만큼 이날 만남의 목적을 이루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베 총리는 "(한일관계) 상황을 이대로 둬선 안되고, 양국간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며 "특히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한·일, 한·미·일 공조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총리는 여기에 "북한 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공조하자"고 보탰다.

한일 분쟁은 강제징용 판결→일본 수출규제 보복→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로 이어져 왔다. 아베 총리가 지소미아를 돌려놓으라고 간접적으로 얘기하자, 이 총리는 관계회복부터 하자고 돌려 말한 셈이다.
두 사람은 이후 "어려운 상황일수록 양국 청소년 교류를 포함한 민간교류가 중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했다. 이 총리는 마지막으로 품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 친서를 꺼내어 "경색된 한일관계 개선돼 한일 두 정상이 만나게 되신다면 좋지 않겠냐"고 덕담처럼 가볍게 제안했고, 아베 총리는 이를 들으면서 친서를 받았다.
# 제5국 - 장외 언론전
서로를 존중한 품격있는 대담이 끝났지만 그동안 팽팽히 맞섰던 두 나라 사이 반목은 회담과는 별개로 오히려 이 만남을 폄훼하는 식의 장외 언론전으로 이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은 회담이 끝나자마자 문 대통령이 친서에 "가능하다면 곧 둘이 만나 미래지향의 양국관계를 위해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을 썼다고 보도했다. 외교 관례를 깬 추측보도로 한국 대통령이 먼저 일본 총리에 만남을 제의했다는 내용을 밝혀 이른바 '정신승리' 분위기를 주도한 것이다.

일본 신문들은 이후에도 회담의 전후 관계를 오인한 보도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 친서가 회담 말미에 전달됐는데도, 친서를 받은 아베 총리가 그 자리에서 열어보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징용 관련 입장을 적시했다고 보도하는 것이다. 24일 50여 개국 정상과 만나야 했던 아베 총리는 이 총리와 회담은 10분으로 예정했다가 이후 21분으로 연장했고, 한국도 이를 감안해 자세한 내용은 친서로 갈음하기로 했다. 친서를 초반에 받지도 않았고, 그를 짧은 회담 중에 열어보면서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낙연 총리를 기다리게 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친서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거나 '친서를 그 자리에서 읽지 않았다'는 표현은 자국 총리 위상을 높이기 위한 일본 미디어의 관영언론적 속성을 엿보이게 한다. 이런 편향성을 회담을 직접 현장에서 취재하지도 않은 한국 언론 일부가 일본 신문을 그대로 번역해 국내에 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낙연 총리는 귀국길 비행기 내에서 가진 간담회를 통해 정상회담과 관련해 "제가 언급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얼음장 밑에서도 강물은 흘러간다'"고 답했다. 총리를 의전한 조세영 외교부 1차관은 "일본 언론들이 보도한 것을 두고 한국 정부가 맞다 틀리다를 답하는 것은 외교적 관례가 아니다"며 "일본과 관계개선과 정상회담 가능성에 있어 한국 정부는 항상 열린 자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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