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하나 가지고 왜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축구 없이 2018년 베트남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75년 통일 이후 베트남이 이렇게 뜨거웠던 해는 없었다. 축구는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땅의 사람들을 한 깃발 아래 뭉치게 했고, 젊은이들에게는 어렴풋하지만, 조국 베트남에 대한 ‘애국심’이라는 것도 느끼게 했다. ‘베트남도 하면 된다’는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신감을 베트남 국민 모두가 올해 확인했다.
◇ 축구가 붙인 불
베트남 안팎에서 관찰되는 자신감의 근원은 다양하겠지만, 올해 베트남을 달군 축구에서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베트남 사회학 박사인 이계선 탄롱대 교수는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애국심’ 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올해 축구 경기를 통해 느낀 청년들이 많다”며 “이것이야말로 올해 베트남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트남 언론들도 젊은 국민들이 자비를 들여 국기를 구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실제 지난 1월 아시아 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의 결승전에서 연출된 한 장면은 경기에 지고도 승리한 베트남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줬다. 석패한 베트남의 주이 만 선수가 금성홍기(베트남 국기)를 경기장 한 편에 쌓인 눈에 꽂고 경례하는 장면에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여행사 직원 응우옌 반 짠(35)씨는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기대 이상의 성적이었고, 그 성적은 베트남을 긴 잠에서 깨운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 경기에서 준우승 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4강으로 베트남 축구역사를 새로 쓴 데 이어, 15일 2018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 2차전에서 우승컵을 넘보고 있다. 올 한해 베트남 이야기는 축구로 시작해서 축구로 끝난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박충건 베트남 사격 국가대표팀 감독은 “베트남 정부는 스포츠를 통해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고, 국민 통합을 도모하고 있다”며 “1980년대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성장의 동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년 전 스즈키컵 준결승전 당시 체육부 장관이 응원에 나섰지만, 지난 6일 필리핀과의 준결승전에서 응우옌 쑤언 푹 총리가 직접 경기관람과 응원에 나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푹 총리는 현재 베트남 권력서열 2위다.
◇긴장하는 이웃 국가
베트남이 축구를 중심으로 응집된 국민적 에너지를 발판 삼아 국력 신장에 나서자, 이웃 국가들도 긴장 속에 주시하고 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ㆍ동남아경제연구소(ERIA)의 히데토시 니시무라(66) 소장은 “보통 아세안 의장국은 각종 의제설정을 위한 작업을 수임 1년 전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2020년 의장국인 베트남은 내년 의장국인 태국과 같은 지난 1월부터 ERIA와 관련 작업을 논의 중”이라며 “내부 에너지를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 제고로 연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등에서 비교적 중국과 대등한 수준에서 펼치는 외교도 베트남의 앞날을 밝게 하는 대목이다. 익명을 요구한 태국 한 매체의 편집장은 “베트남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성실한 데다, 이번에 축구를 통해 뭉치는 모습을 보고 베트남의 앞날을 밝게 보는 이들이 많다”며 “아세안 의장국을 맡게 될 2020년이면 지금과는 다른 나라가 될 것이고, 아세안에도 큰 변화를 줄 것”이라고 말다. 그들이 베트남을 예의주시하는 까닭인 동시에 ‘잠룡’이 모습을 드러날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국민 평균연령이 30세일 정도로 젊은 나라다. 또 근면하며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올해 6.8%의 경제성장률(GDP)을 기록한 견고한 경제성장세로 주변국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는 지난달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베트남 같은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곧 추월당할 것”이라며 자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한 바 있다. 인구 1억의 베트남 경제규모(GDP)는 2,238억달러, 인구 3,000만의 말레이시아 GDP는 3,145억달러 수준이다.
◇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2%
사실 이 같은 경제 성장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 간 통상분쟁에 따른 어부지리 성격의 운도 있었다. 애플 등의 글로벌 기업들이 베트남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내 중국인 수도 급증했다.
베트남은 내년부터 고유 브랜드 자동차 생산국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아세안에서는 말레이시아에 이어 두 번째가 된다. 일본 브랜드들에 잠식되다시피 한 시장 상황에서 자국 브랜드 자동차 생산의 의미는 상당하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신남방경제실장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철강 등 첨단 소재, 전장 부품 등 여러 유관 산업을 동시에 키우겠다는 뜻”이라며 “역내에서 베트남의 존재감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안팎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작 베트남 현지에서는 이 같은 자신들의 모습과 현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것이 이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한 단계 더 위상을 높이는 과정에서 결정적 한계로 지적된다. 익명을 요구한 베트남 현지 매체의 중견 기자 P씨는 “축구는 단순 오락에 불과하다”며 “응원전에서 본 베트남의 모습을 다른 분야로 확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한 국제 인수합병 자문사 관계자는 “베트남의 첫 자국 브랜드(빈패스트) 자동차에서 베트남 기술은 찾아보기 어렵고, 기술 확보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다른 많은 분야서도 내실보다는 광고, 홍보, 겉치장에 치중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호찌민ㆍ자카르타=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mailto: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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