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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시련"에 직면해있다>>>

중국관련

by 21세기 나의조국 2017. 9. 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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実は中国共産党は結党以来「最大の試練」に直面している
日本が見落としている中国【前編】
 津田塾大学教授中国近現代史・東アジア国際関係論
2017. 08. 30 中村 元哉 




    사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이래 "최대의 시련"에 직면해있다


                                          일본이 간과하고있는 중국
 
                       2017. 08. 30 中村 元哉 (나카무라 모토야)     번역  오마니나



고래 "군주국"이었던 중국이 서구와의 국제관계 중에 편입되어 "공화국"으로서 존재하는 프로세스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거대한 삐걱거림 속에서, 일중관계는 어떻게 자리매김되어 왔는가.


소장파 연구자가, 러일전쟁에서 일중 국교정상화까지, "일중의 대립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 다시 묘사한 역작 "대립과 공존의 일중 관계사"에서, 현대중국 이해의 기본선을 밝힌 서장을 특별히 공개한다.


왕조에서 공화국으로


중국은 예로부터 황제에 의해 통치되어왔다. 진시황을 비롯해, 청나라의 강희제, 건륭제등, 모두 그렇다. 이런 국가의 형태를 "군주국"이라고 한다. 군주의 왕조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이상적인 정치는 "인정(仁政)"으로 여겨져왔다. 요컨대, 황제가 사람들에게 인을 이루는 정치이다."인(仁)"이란, 유교의 덕목으로,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가 무너지던 20세기에 중국은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공화국은 군주국과는 달리, 한 명의 황제가 아니라, 국민(인민)이 주역이다. 이것은 서양의 사고방식에 의한 국가형태이며, 헌법을 제정해, 헌법에 입각해 정치를 행한다. 이를 "헌정(憲政)"이라고 부른다.


중화문명의 중심이 되는 청나라는 물론 군주국이었지만, 20세기를 통해, 서양문명의 공화국, 즉 민국과 인민공화국이라는 두개의 공화국으로 변모해갔다. 인정에서 헌정으로의 대전환이다. 본서( "대립과 공존의 일중 관계사")가 다루는 것은, 바로 이 장대한 프로젝트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를, 주권, 국민, 영토로 이루어진 국민국가에 의해 구성되는, 이른바 근대서양의 국제법에 기초한 국제질서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만큼, 한 번의 혁명에 의해 즉각 이루어질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긴 세월을 요하는 매우 어려운 사업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있는 미완의 프로젝트다.


말하자면, 중국은,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중화문명의 인정과 서양문명의 헌정 사이에서 고민을 계속하고있는 것이다.


현재, 그 고뇌를 가장 상징하고 있는 것이, 시진핑 정권 하에서 2013년 정월에 발생한 "중국의 꿈, 헌정의 꿈"이라는 타이틀의 "남방주말"(南方周末)의 신년 인사말을 둘러싼 일련의 정치현상이었다.


이 책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기위해, 그 정치현상에 이르른 현대중국에 우선은 눈을 돌려보자.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경험하지 않은 지도자


2012년 11월 15일, 공산당 18기 일중전회는 시진핑을 총서기로 선출했다. 여기에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제 1세대인 마오쩌둥, 제 2세대인 덩샤오핑, 제 3세대인 장쩌민, 4세대의 후진타오에서 5세대인 시진핑로 옮겨지게되었다.


       習近平総書記

                                     시진핑 총서기[PHOTO] gettyimages


시진핑 총서기의 탄생은, 공산당에 의한 혁명과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직접적으로 모르는 지도자가 중국에 처음 탄생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1953년에 베이징에서 태어난 시진핑 총서기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공산당 내부에서 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진 팔대원로 중의 하나인 시중쥔 전 국무원 부총리의 혈통을 받아, 이른바 "태자당"으로 불리는 당의 고급간부의 자제인 엘리트 당원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현재의 중국은, 과거의 영광스러운 혁명과 열기넘치던 사회주의 건설 시대를 직접으로는 알지못하는, 엘리트 총서기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진핑 총서기는, 과거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2013년 3월까지 국가주석, 당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당, 정부, 군대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게다가, 공산당 중앙 국가안전위원회가 외교, 안보 및 국내의 치안대책을 강화하기 위해 2014년 1월에 신설되자, 시진핑 총서기는 그 주석에 취임해, 그 어느 때보다 권력을 일극으로 집중시키고 있다고 볼 수있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중국관


이 일극 집중화의 진위 여부는 제쳐놓더라도, 많은 중국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공산당은 현대중국의 빛과 그림자의 조정에 부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공산당은, 새로운 지배구조와 권력구조를 모색 할 수밖에 없는 국면에 몸을두고있다.


21세기에 들어와, 중국은 이미 대국화했다. 국내 총생산이 세계에서 두 번째가 되고, 국제정치 및 글로벌 사회에서의 존재감은 날로 높아지고있다. 현재의 중국은, 역동하고있는 인도와 함께, 21세기의 아시아 시대를 상징하는 국가이기도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국내에서 소득격차와 지역격차도 확실하게 확대하고있다. 복잡한 민족문제는 해결되기는 커녕 점점 표면화되고있다. 내부에 숨어있는 차이와 모순을 통합하기위한 중화 민족주의의 창성조차, 아직 여의치않다.


중화 민족주의를 창성해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대응시키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100년간의 정치과제지만, 아직 달성하지 못하고있다.


거기에, 한자녀 정책에 따른 멘탈리티의 변화나 가까운 장래에 오고야말 급격한 인구 변동, 심지어는 1970년대생("70후"), 1980년대생("80후"), 1990년대생("90 후"), 2000 년대생("00후")라는 신조어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대의 대두와 세대간의 갭은, 민족대립과 계급대립의 맥락으로마 해석할 수없는 새로운 사회현상을 일으키고있다. 그리고, 에너지, 환경, 공중위생, 식품안전 등 각 방면에서, 중국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있다.


이러한 현대중국의 빛과 그림자는, 일본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중국의 다양성과 복잡성 탓에, 공산당 자신이 약 65년의 인민공화국사에서 최대의 시련에 처해있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정확한 의미는, 반중의식에 기초한 중국붕괴론과 중국위협론이 아니라, 학술적인 지식에 근거한 이성적인 중국이해라는 의미다.


공산당은, 개혁개방 정책에 따른 시장원리의 도입과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21세기에 들어오면, 사영기업가의 입당을 인정하고,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이라는 본래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 무엇보다, 1950년대 초반까지의 공산당은, 인민민주주의의 중국판인 신민주주의, 즉 노동자 계급, 농민 계급, 소부르주아 계급, 민족 부르주아로 이루어진 인민 민주통일전선에 의한 연합정권을 과도적으로 인정했던만큼, 그 시대의 신민주주의 단계로 되돌갈 뿐이라는 평가도 가능 할지도 모른다 -.


이러한 자본중시, 윤리경시 풍조가 한몫 한 탓인지, 공산당의 부패는 점점 심각화해, 당의 권위 그 자체가 흔들리고있다.


그 이유는, 장쩌민 시대의 반일적 애국교육과 후진타오 시대부터 계속되는 센카쿠 문제에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공산당의 역사관에 기초한 정당성 확보의 논리가 작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일어선 공산당은, 20세기 전반의 전쟁과 혁명을 통해, 봉건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 지주, 자본가들과 결탁해 온 나쁜 국민당및 민국정부를 타도해, 잡다한 중국을 자신들의 지도력으로 묶어왔다. 그 통합의 논리가, 빛나는 사회주의의 이념이었다. 그러나,이 논리는,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서서히 통하지 않게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통합의 논리로 제기된 것이, 과거의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 기능했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제국주의의 중화민족주의론이었다.


이 논리는, 어떤 입장의 민중이라도 전면부정할 수없다는 점에서, 민족과 계급과 같은 모든 대립을 극복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금과옥조와 같은 논리로 기능할 수있다. 그리고, 그 반제의 맥락에서, 민중의 마음을 가장 울리기 쉬운 것이 반일의 기억이다.


물론 이상과 같은 공산당의 중국 근현대사관---- 일본 근현대사관과 일중관계사관이 아닌 것에 유의하기바라지만-----이,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중국의 실태와 반일 민족주의의 관계성은, 반복해서 확인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이 간과하고 있는 중국


그렇다면, 이것으로 현대중국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있는 것일까. 예를들어, 중국산 식품에 대해서는 어떨까.

물론 중국산 모두가 안전하다고는 할 수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산 모두가 위험하며, 그 반대로 일본산 모두가 안전하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일본기업이 출자하고 있는 중국산 쪽이, 시장인 일본의 여론을 강하게 의식하고 만들어져, 수입시에 샘플링 검사를 거쳐야만 하므로, 제작자의 양심을 믿을 수밖에없는 일본산보다 확률적으로는 더 안전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사례를 하나 들어봐도, "일본이 간과하고 있는 중국"은 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이성에 기초해 생각해야한다.


그러한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현대중국과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중국 근현대사를 다시 바라보면, 몇 가지 간과해 온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 중의 하나가, 현대중국을 해독한 후에 우선순위가 높은 사실은 바로, 중국의 헌법과 헌정의 역사다. 이하, 시진핑 총서기의 중국몽을 돌파구로 삼아, 그 이유를 설명해 가기로하자.


시진핑이 그리는 중국의 꿈
과잉자신의 이면에 숨은 "불편한 진실"


반중의식에 기초한 중국 붕괴론과 중국 위협론이 아니라, 우리가 이성적으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하면 좋은가? 전편에 이어, 소장 연구자가 만들어낸 역작 "대립과 공존의 일중 관계사"에서 그 통찰력에 귀를 기울여보자.


중국의 꿈 - 중화 민족주의의 부흥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진핑 총서기,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중국의 빛과 그림자를 짊어지고, 정권을 운영하고있다. (gendai.ismedia.jp/articles/- / 52722).


이 난제에 직면해있는 시진핑 총서기가 현재 전면에 내세우고있는 슬로건이, 중국의 꿈이다.


총서기 취임 후인 2012년 11월 29일 시진핑 총서기는, 국가 박물관의 "부흥의 길" 전시회를 참관했을 때, 다음과 같은 중요담화를 발표했다.


<누구라도 이상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꿈이 있다. 현재 모두가 중국의 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실현이, 근대이후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 꿈은 몇 세대의 중국인의 숙원이 응집되어, 중화민족과 중국 인민 전체의 이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이 꿈의 실현은 중화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공통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전하고 있듯이 각 개인의 향후 운명은 국가와 민족의 향후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국가가 좋아지고 민족이 좋아지고 나서야 비로서 모두가 잘될 수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영광이자 지극히 어려운 사업이며, 각 대의 중국인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인민망 [일본어 버전] 2012년 11월 30일). >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강조하는 것은, 그야말로 중국의 단결과 통일에 주안점을 두고있는 것을 나타내고있다. 2013년 3월 17일 전국 인민대표 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소강사회를 전면적으로 완성시켜, 부강, 민주, 문명, 조화로운 근대적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노력 목표를 실현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부강, 민족의 진흥, 인민의 행복을 실현해야만 한다.>


시진핑 시대에서, 중국의 꿈은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여기에는 "부흥"이라는 "원래 있던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 이상으로"세계문명의 중심으로 복귀해, 그것을 주도한다"는 적극적인 의지도 담겨있다.


중국 공산당 계 포털 사이트 "중국 공산당 신문망"에는 중국의 꿈에 대한 캠페인 논문이 다수 게재되고 있지만, 그 중 하나로, 캠페인에도 활발히 인용된 공무홍(公茂虹)의"중국의 꿈 - 현대사회에서의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2013년 7월 3일)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계 문명사에서 보면, 중국의 꿈은, 화하문명이 세계문명의 중심에서 전락해, 서양 현대문명이 세계를 이끈다는 조류 속에서 흥했다. 이제 서양 현대문명의 광망에 어두운 그늘이 나타나, 중화문명의 세계적 가치가 재차 크게 개화하려고 하고있다. (중략) 중국의 발전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서 보면, 세계는, 중화의 지혜로 가득차, 중화의 따뜻함을 띄고, 세계의 발전을 촉진하는 중국의 꿈을 갈망하고있다.>


물론, 이러한 중국의 꿈은 과신의 표현이라고 간주할 수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1972년의 일중 국교 정상화 이후, 일중 관계가 가장 차가워져 있는만큼, 중국의 꿈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화제조차 되지않고있다.


그러나,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는, 이것으로 중국에 대한 생각을 정지시켜 버리는 것이다.


예를들어, 공산당은, 권위를 저하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그림자로 덮여있는 거대한 중국을 어떻게든 꾸려나가,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켜왔다. 혹시 거기에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세계기준이 되어 온 서양문명과는 다른,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중국모델이 숨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것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러한 유연한 발상은 끊임없이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20세기의 중국은, 서양문명의 우위를 내세워 온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반봉건, 반 식민지"라고 형용되는 듯한 상태에 몰려왔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양문명 과 접촉해, 그것을 받아들여왔다.


따라서, 관제인 중국의 꿈과는 다른, 서양문명을 추구하는 민간의 "중국의 꿈"이 자발적으로 얘기된다고 해도, 아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인가.


대답은 "예스"다.


그 소리야말로, 2014년 제 2차 천안문 사건("6.4")25주년을 앞두고, 공산당이 인권운동가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던 복선도 되고있는 것이다.


덧붙여, 2차 천안문 사건은, 1989년 6월 4일에 민주화 운동이 무력탄압당한 사건이다. 학생들은, 1989년 4월, 민주화 요구에 관대 한 자세로 임하던 후야오방(胡耀邦)전 총서기의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공산당에게 민주화를 압박했다. 그러나, 공산당 보수파는, 학생들에게 이해를 표시했던 조자양(趙紫陽)총서기를 해임하고 6월 4일에 무력탄압을 단행했다.


헌정의 꿈 - 자유,민주, 입헌의 희구


시진핑 총서기가 중국의 꿈을 말했던 약 1개월 후인 2013년 1월 3일, 광저우에서 발행되는 진보적 주간지 "남방주말"은 신년 특별호에서 "중국의 꿈, 헌정의 꿈"이라는 제목의 새해 인사글을 게재했어야 했다. 이 글은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아 인쇄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직전에 공산당 광동위원회 선전부에 의한 교체 요청이 들어와, 편집부와 기자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가장 꿈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제목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꿈은, 당연히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가리킨다. 그 내용도, 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변조되어 버렸다. 이 사건은 일본언론이 일제히 보도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현재 인터넷상에 계속 남아있는 원문으로 생각되는 문장은 "중국의 꿈, 헌정의 꿈, 자유의 꿈"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이 삽입되어있다. 다소 격조높은 원문의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날,우리는 드디어 쌓이고 쌓인 역사의 먼지에서 가슴을 펴고, 번거로운 일상생활에서 머리를 들고, 선배들이 목표로 한 헌정의 장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 선배들의 위대한 꿈을 다시 배울 수 있게되었다.


170년 전, 우리는 천조[역대 전통 왕조]의 망상에서 눈을 떴다. 우선 영국에게[아편전쟁에서] 패하고, 곧 일본에게 [청일전쟁]으로 패했다. 서민은 점점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게되어, 굴욕감은 중국의 지식인에게 깊숙이 꽂혔다. 국가를 지켜라! 민족을 지켜라! 그리하여, 양무(洋務)에서 군주입헌으로, 나아가 입헌에서 혁명[신해 혁명]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물자에서 제도, 심지어는 문화로도 변혁의 대상은 옮겨가, 격분한자는   애석히 여기기도 않고 "유교"도 철저하게 파괴해, 단호하게, 자신의 문명을 송두리째 뽑아내려고 했다.


신해혁명 후, 청황제는 퇴위하고, 선배들은 마침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자유, 민주, 부강의 헌정에 기초한 중국은 도래하지 않았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결코 물질적 풍요만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충만되는 것을 더욱 희망하고있다. 우리는, 결코, 국력이 강대하게 되는 것만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 자부심을 가질 것을 더욱 희망하고있다. 새로운 국민과 새로운 국가, 구망(救亡:국가와 민족의 멸망을 막는 것)과 계몽, 그리고 아무도 다른 사람과 무관계하지않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없는 것은, 분명하다. 헌정이야말로 이 모든 꿈에 공통되는 근원이다.(중략)


이 문장은, 공산당의 독재체제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정 즉 헌법에 기초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는, 헌법의 내용이 어떻든 법치와는 다른 논리로 지배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냉소도 담겨있다.


그 목표가 현대 입헌주의의 관철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원리와 제도를 창출하려는 기백이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라는 인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함께 ,공산당의 독재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수도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이 문장을 교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년 후인 2013년 8월 7일, 공산당은 "중국에서, 이른바 헌정하는 행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자신들의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게재해, 헌정을 주장하는 것에 못을 박았던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헌정 연구를 둘러싼 학문적 환경은, 당 내부의 통지문 "논의해서는 안되는 일곱 가지"- 인류의 보편적 가치, 보도의 자유, 시민사회, 공민의 권리, 당의 역사 으로 잘못, 특권 자산계급, 사법의 독립 ---- 에 더해 이 문장의 게재에 의해, 이전만 큼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 헌법을 꾸준히 실행하려고 한다면, 그 열쇠는 당의 건설을 단단히 실행해서, 공산당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정당이 되도록하고, 중국의 중앙과 지방의 권력을 쥐고있는 관료가 헌법에 이쓴 핵심원칙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비교하면, 사회주의 사회는 아직 신생아다. 공산당이 진정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정당 만 되면, 인민의 근본적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주의 헌법과 법률은, 철저히 관철되어, 실시될 것이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헌정을 행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다.>


중국 헌정 100년사


이상과 같이, 현대 중국에는, 사회주의 또는 자본주의인가 라는 대립과 다소 다른, 내셔널리즘(민족주의, 국가주의)과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조화와 상극을 둘러싼 대립이 있다. 그 전에는, 양자를 조정하는 것이 인정)(仁政)인가 헌정(憲政)인가라는 쟁점도 있다.


당연히, 데모크라시(민주주의)에 관련된 시비와 그 방식을 놓고도, 또한 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 지를 두고도 다양한 주장이 전개되고있다. 이것들은, 요컨대, 근대 입헌주의를 중국에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싸움이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군주국과 공화국, 인정과 헌정, 덕치(인치人治, , 당치党治)와 법치, 그리고 근대 입헌주의라는 개념이 본서에서는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의 관계를, 법학 및 정치학의 전문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는 입장에서 간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중화문명을 발전시켜 온 역대왕조는, 유교규범을 존중하는 황제의 덕치에 의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은혜를 베풀려고 해왔다. 이른바 중화문명의 중심으로 군림해왔던 황제는, 인정(仁政)을 폈던 것이다. 그러나, 덕치에 근거한 인정은, 이윽고 세계의 추세에 맞지 않게되어, 대신해 법치에 기반하는 헌정이 중화문명의 중심지에서도 요구되게 되었다


헌정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헌법에 의한 정치다. 덕치에 의해 발생할 수있는 악정을 미연에 막는 규칙으로서 헌법이 제정되어, 그 헌법에 의한 정치가 헌정이 된다.


그러나, 당연히, 이 헌정에는 다양한 변형이 있을 수있다. 예를들어, 헌법의 성격에 따라, 법치의 성질이 변화하고, 법치에 기반한는 헌정의 질도 달라진다.


군주의 권력을 법으로 제한하려는 법치주의와, 군주를 포함한 모든 독단적인 권력을 법에 의해 구속해, 법에 의해 인권을 옹호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준별하는 입장에 선다면, 법치주의에 의한 헌정과 법치에 의한 헌정은, 상당히 내용을 달리한다.


이 경우, 종종 연상되는 것이, 전쟁 전의 일본처럼 헌법을 가진 군주국이 법치주의에 기반하는 헌정, 소위 입헌 군주제를, 한쪽은 미국(아메리카)처럼 헌법을 가진 공화국이 법의 지배에 기반하는 헌정, 소위 입헌 민주주의를 채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항대립의 이해는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어, 영국을 예들면 알 수 있듯이, 입헌군주제라도 법의 지배에 의한 헌정는 행해지고있다. 오히려, 입헌 군주제인지를 불문하고, 이러한 입헌주의 모델인 입헌주의의 내용 자체가 법치에 기반하는 헌정에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입헌주의란, 법의 지배, 자유의 보장, 권력의 분립, 인민주권(people)을 골자로 한 근대 입헌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린 곳에서, 입헌주의는 즉시 세분화되어 버린다.

예를들어, 자유와 권리를 헌법으로 직접 보장한다는 의미의 민국기(民国期)의 중국어인 "직접 보장주의"와, 자유와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다는 의미의 민국기인 중국어인 "간접 보장주의"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직접 보장주의는, 법에 의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가능성, 소위 법에 의한 유보를 차단하는 대신, 사법에 의한 헌법 보장을 중시한다. 그래서, 때로는, 입법권을 가진 입법부의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와 대립할 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간접 보장주의는, 민의를 반영하는 법에 의해 자유와 권리를 민주주의 적으로 보장하게 되는데, 만약 입법부와 행정부가 폭주해 법과 명령에 의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 시작했다면, 법의 지배를 근본적으로 해칠 뿐 아니라, 법치주의 마저 침해해, 이름 뿐인 입헌주의를 초래해 버릴 지도 모른다.


즉, 입헌주의의 내용에 의해 권력구조의 형태를 규정하는 헌법의 성질이 바뀌어, 그 헌법에 의한 헌정의 성질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편의적인 개념 정리를 하고나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


중국의 꿈과 헌정의 꿈을 둘러싼 일련의 정치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헌정은 민족, 국가, 자유, 민주라는 불씨를 안고있는 현대중국을 해독하는데, 틀림없이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을 알 수있다.


좀더 보편화해서 말하면, 중국의 헌법과 헌정도 개인, 사회, 국가의 관계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모두 감싸는, 이른바 국가제도라는 확산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정의 역사를 가진 서양조차도,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존재해야 할 헌정을 반영구적으로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인 정치과제인 헌정이 중국에도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서양문명파가 헌정파이고, 중화문명파가 반헌정파라고는 할 수없다는 점이다. 앞에 소개한 "중국의 꿈, 헌정의 꿈"이란 구절에서도 이것은 충분히 읽어낼 수있을 것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중국이 헌정을 추구해 온 역사의 길이다.


다시 한 번, "중국의 꿈, 헌정의 꿈"의 한 구절을 확인하기 바란다. 여기에는 신해혁명이라는 문자가 보인다.


신해혁명은, 1911년 10월부터 남방의 각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속속 선언해 중화 민국을 수립해, 청조를 멸망으로 몰아간 일련의 정치과정을 가르키는데, 이 과정에서 손문이 이끄는 혁명파는 중국을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시켜, 헌정을 스타트시켰다.


무엇보다, 중국헌정의 출발점을 엄격하게 회상한다면, 청말에 흠정헌법 대강이 공포 된 1908년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류샤오 등이 자유, 인권, 평등, 민주, 공화, 헌정을 요구했던 2008년의 "08헌장"도, "올해는 중국입헌 100주년"이라는, 시초로 시작한다.


이처럼, 청말에서 중화민국, 그리고 인민공화국에 이르는 20세기 중국사에는, 헌정을 둘러싼 역사가 새겨져있다. 중국에서 헌정이 성공했는지의 여부, 거기에 의미가 있었는 지의 여부를 논하기 이전의 문제로서다.


그리고, 중국에는 약 100년의 헌정사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의 일본인이 떠올릴 수 있을까.


만약 헌정사를 헌법제정사, 헌법운용사, 헌법학설사, 입헌주의 사상에 의해 구성되는 역사와 엄격하게 정의한다해도, 대략적으로 말해버리면, 중화민국 헌법---현재의 대만 헌법-----이 시행된 1947년부터 반세기 이상의 헌정사가 존재하게된다.


물론, 그사이에 입헌주의 사상은 뿌리내렸는가, 헌법이 없었던 1949년부터 1953년의 신민주주의 단계나, 헌정을 정지상태로 몰아넣은 1966년부터 1976년의 문화 대혁명 기간은 헌정사에 포함되는가 라는 의문이 떠오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말부터 일관되게 입헌주의 사상의 수용은 시도되어, 헌법제정 작업도 거의 끊임없이 계속되고, 심지어 헌법학도 완만하게 발전해 왔던 것이다.


일본의 중국 근현대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하기위해


그렇다면, 왜 중국헌정 100년사라는 중국관이 일본에서는 희박한 것일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2차 대전 전에 중화민국 법제연구회를 세웠던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중화민국 헌법의 특징을 분석하고, 1950년대에는 일본 외무성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의 동향에 관심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중국관은 희박한 것일까?


현대중국이 자유화도 민주화도 하지않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본의 일반적인 중국 관에 따른 모범답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범답에는, 현대중국의 정통성에 관련하는 공산당의 역사관이 스며들어가있다.


과감하게 요약하자면, 공산당이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이야기를 신화화할 수 있으면할 수록, 현재의 통치 정통성은 그만큼 강고하게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1949년의 혁명으로 타도된 국민당과 중화민국 시대는, 폭정으로 이어지는 폭정의 암흑시대여야한다.


중화민국은, 남경을 수도로 한 손문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소위 난징정부를 베이징에서 그대로 이어받은 원세개 등의 베이징 정부기(1912~1928년)와, 이 베이징 정부를 타도해 다시 난징을 수도로--- 중일전쟁시기는 중경--- 한 장개석 등 국민당의 국민정부시기 (1928~1949년)로 나뉘는데, 어느 시기에서도, 현재의 중국인민이 요구하는 헌정의 역사가 있어서는, 공산당에게는 대단히 불편하다.


게다가,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자유와 민주를 요구한 지식인을 탄압한 반우파 투쟁과, 중국사회에 대혼란을 초래한 문화 대혁명이라는, 헌정에 역행하는 중국현대사가 존재하는만큼, 공산당에게는, 헌정의 역사는 보다 더 불편한 진실이 된다.


따라서, 중화민국사든 인민공화국사든, 헌정사가 각광받는 일은 기본적으로는 없었다. 만일 거론된다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않는 공허한 역사로 그려질 뿐이었다.


물론, 중화민국 시대에, 특히 국민당 시대에 준비되었던 헌법과 헌정이, 쌍수를 들어 칭찬되어야할 역사였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20세기 중국사가 민족주의, 혁명, 전쟁, 사회주의의 시대였던 것도 부정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의 대부분이 떠올리는 종래의 20세기 중국사는, 부지불식간에 공산당의 역사관에 접근해, 부분적으로 밖에 중국근현대사를 설명하지 못하고있다.


종종 정치외교 문제로 발전하는 일중 간의 역사인식 문제는, 일본의 중국근현대상과 중국의 일본근현대상에 원인이 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것일까. 양국의 상호 자국사관, 특히 전후사관에 문제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에 학술의 자유가 있다면, 일본은 전쟁 전의 역사도 전후의 역사도, 지금까지대로, 사실에 기초해 이성적으로 제시하면 된다. 만주사변도 난징대학살도 종군 위안부도 충칭폭격도, 도쿄대공습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도 전후의 공해문제도 원전사고도,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이 중국근현대사를, 특히 반우파 투쟁, "대약진"정책, 문화대혁명 등 부정적인 역사를 포함하는 인민공화국사를 이성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일본보다 훨씬 곤란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일본에서 중국근현대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담담하게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을 위한 보조선이 헌법과 헌정의 역사라는 셈이다.


본서는, 1904년의 일러전쟁 직전부터 1972년 일중 국교정상화 직후까지의, 대략적으로 말하면, 일중관계가 대립과 긴장관계에 있던 약 7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일중대립 혹은 일중무교섭으로 포착되기 쉬운 이 시기의 중국사를 헌법과 헌정을 보 조선으로 한 공화국의 역사로서 다시 그린다면, 일본의 중국근현대상은 좀 더 풍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중의 대립과 공존의 역사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국이 헌법과 헌정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러전쟁에서, 다음 장에서는 상세하게 얘기해 가기로 하자.


                                            



                                         http://gendai.ismedia.jp/articles/-/52725?page=5




<오늘 날,우리는 드디어 쌓이고 쌓인 역사의 먼지에서 가슴을 펴고, 번거로운 일상생활에서 머리를 들고, 선배들이 목표로 한 헌정의 장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겨, 선배들의 위대한 꿈을 다시 배울 수 있게되었다.


170년 전, 우리는 천조[역대 전통 왕조]의 망상에서 눈을 떴다. 우선 영국에게[아편전쟁에서] 패하고, 곧 일본에게 [청일전쟁]으로 패했다. 서민은 점점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게되어, 굴욕감은 중국의 지식인에게 깊숙이 꽂혔다. 국가를 지켜라! 민족을 지켜라! 그리하여, 양무(洋務)에서 군주입헌으로, 나아가 입헌에서 혁명[신해 혁명]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물자에서 제도, 심지어는 문화로도 변혁의 대상은 옮겨가, 격분한자는   애석히 여기기도 않고 "유교"도 철저하게 파괴해, 단호하게, 자신의 문명을 송두리째 뽑아내려고 했다.


신해혁명 후, 청황제는 퇴위하고, 선배들은 마침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자유, 민주, 부강의 헌정에 기초한 중국은 도래하지 않았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결코 물질적 풍요만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충만되는 것을 더욱 희망하고있다. 우리는, 결코, 국력이 강대하게 되는 것만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민이 자부심을 가질 것을 더욱 희망하고있다. 새로운 국민과 새로운 국가, 구망(救亡:국가와 민족의 멸망을 막는 것)과 계몽, 그리고 아무도 다른 사람과 무관계하지않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압도할 수없는 것은, 분명하다. 헌정이야말로 이 모든 꿈에 공통되는 근원이다.(중략)


이 문장은, 공산당의 독재체제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헌정 즉 헌법에 기초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는, 헌법의 내용이 어떻든 법치와는 다른 논리로 지배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냉소도 담겨있다.


그 목표가 현대 입헌주의의 관철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원리와 제도를 창출하려는 기백이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라는 인민공화국의 기본 이념과 함께 ,공산당의 독재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수도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당은, 이 문장을 교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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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아마도, 공산당을 해체하고 푸틴식의 대통령제로 나아가는 체제전환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러한 국가 시스템의 변화는,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 조선도 예외는 아니다, 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 배경에는 미군산세력의 철퇴가 근본 동인이라고 봅니다. 중국은 15년 9월의 전승열병식을 통해, 진짜 전승국인 중화민국의 과거역사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나아가 중국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손문의 중화민국 임시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중국의 근대사를 만들 것으로 봅니다. 그래야만 대만을 통일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을 없애고, 공산당 체제로는 감당할 수없는 G2 중국을 만들 수있을 것입니다.  



중화민국은, 남경을 수도로 한 손문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소위 난징정부를 베이징에서 그대로 이어받은 원세개 등의 베이징 정부기(1912~1928년)와, 이 베이징 정부를 타도해 다시 난징을 수도로--- 중일전쟁시기는 중경--- 한 장개석 등 국민당의 국민정부시기 (1928~1949년)로 나뉘는데, 어느 시기에서도, 현재의 중국인민이 요구하는 헌정의 역사가 있어서는, 공산당에게는 대단히 불편하다.


게다가,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자유와 민주를 요구한 지식인을 탄압한 반우파 투쟁과, 중국사회에 대혼란을 초래한 문화 대혁명이라는, 헌정에 역행하는 중국현대사가 존재하는만큼, 공산당에게는, 헌정의 역사는 보다 더 불편한 진실이 된다.


따라서, 중화민국사든 인민공화국사든, 헌정사가 각광받는 일은 기본적으로는 없었다. 만일 거론된다해도,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지않는 공허한 역사로 그려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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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통합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정권의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나아가 이것을 어느 측이 쥐는 가에 따라 통일된 한반도의 이념과 체제가 결정되게 될 것입니다. 그 연장선 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920년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건국으로 주장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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