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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경협

by 21세기 나의조국 2017. 6. 18.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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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에서 돈 냄새 맡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에게 통일은 '진짜 대박'이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2017.06.17 14:13l최종 업데이트 17.06.17 14:13l

            

일제강점기 때였던 1932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감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 마을의 어느 가난한 농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건은 밤중에 벌어졌다.

이 농가에서 절도 범죄에 대한 실행의 착수가 개시됐다. 금고처럼 사용되는 나무 궤짝에 손을 대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검은 물체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틈을 타 궤짝을 조심히 열었다. 그리고 돈 다발을 꺼내들었다.

범인은 이 집의 열여덟 살짜리 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인생관이 무척이나 싫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농사일밖에 몰랐다.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도회지에 나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허황된 생각이 자기 집 공기에 스며드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매일 새벽 4시만 되면 아버지는 곤히 자는 아들을 깨워 15리나 떨어진 농토로 끌고 갔다.


소 판 돈 들고 도망간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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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런 생활이 싫었다. 한편으론 아버지가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 돼 보였다. 아버지의 인생관에 자기 인생을 맞추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가출을 결심했다.

어둠 속에서 돈다발을 쥔 아들은 그 금액이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궤짝에 40원이 들어가는 장면과 30여 원이 들어가는 장면을 각각 목격했다. 도합 70여 원이었다. 40원은 아버지가 황소를 팔아서 받은 돈이고, 30여 원은 작은아버지가 자기 송아지를 팔아서 맡긴 돈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맡긴 돈까지 훔쳤으니, 피해자는 두 명이었다.

소년의 절도 범죄는 이렇게 무사히 종료됐다. 돈을 챙긴 소년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송전역으로 달려가 서울행 밤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 현행 형법 제328조 및 제344조에 따를 것 같으면, 소년의 절도 범죄는 형벌 면제 대상이거나 친고죄 적용 대상이다. 직계혈족이자 동거가족인 아버지의 돈을 훔친 행위에 대해서는 제328조 1항에 의해 형벌이 면제되고, 작은아버지가 동거친족이 아닌 일반 친족인 경우에는 그 돈을 훔친 행위에 대해 제328조 2항에 의해 친고죄 규정이 적용된다. 친고죄는 피해자 등이 고소를 해야만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범죄다.


 아산 정주영. 서울시 송파구 풍납2동의 서울아산병원 내에 있는 아산기념전시실에서 2012년에 찍은 사진.
 아산 정주영. 서울시 송파구 풍납2동의 서울아산병원 내에 있는 아산기념전시실에서 2012년에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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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소년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다. 위 이야기는 그의 회고록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소개된다. 이때 감행된 가출은 제3차 가출이었다. 경성(서울)에 있는 덕수부기학원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동아일보> 광고를 보고, 회계원이나 경리가 돼 출세하겠다는 동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지만 제3차 가출은 실패로 끝났다. 뒤처리가 깔끔하지 않았던 탓이다. 처음에 그는 평양의 부기학원에 갈 목적으로, 그쪽 학원에 연락해서 안내서를 우편으로 받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돈만 챙기느라 그것을 폐기하지 못했다. 결국 안내서는, 돈 들고 달아난 아들의 방을 뒤지던 아버지의 서슬 퍼런 눈에 포착됐다. 

아버지는 아들을 추적하러 평양으로 황급히 이동했다. 하지만 아들은 없었다. "경성에 있는 부기학원에 갔을지 모릅니다"라고 그곳 직원이 말했다. 아버지는 경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결국 찾아냈다. 아들의 입에서 "어떻게 또 아셨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두 부자 사이에서는 "월급쟁이는 붕어 밥알 따먹는 신세인데 그 월급쟁이가 뭐가 좋아, 이 녀석아!", "농사꾼보다는 낫지 뭘 그러세요"라는 대화가 오갔다. 이렇게 해서 아산리로 도로 끌려간 아들은 이듬해 제4차 가출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추적자'한테 붙들리지 않았다.       
 

소 1000마리가 아니라 1001마리였던 이유

아버지 형제의 소 판 돈을 들고 가출한 적이 있는 정주영은 64년 뒤인 1998년 6월 16일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섰다. 소들은 편안하게 트럭에 모시고, 그 자신은 두 다리로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것이 정주영의 제1차 소떼 방북이다. 제2차는 그 해 10월 27일이었다. 이때는 501마리를 끌고 갔다.

84세에 목동이 된 그는 제1차 때 대국민 인사말씀 중에서 "가출할 때 아버님의 소 판 돈 70여 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제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꿈에 그리던 고향산천을 찾아갑니다"라며 역사적인 순간의 주인공이 됐다.

만약 작은 아버지가 그 인사말씀을 들었다면, 무척 서운했을 것이다. 70원 중의 30여 원이 작은아버지 돈이라는 점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인사말씀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절도 범죄를 제328조 1항의 형벌 면제 대상으로만 국한시키고, 제328조 2항의 친고죄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은 봉쇄했다. 제4차 가출 뒤에 고시 공부를 하려고 육법전서를 외웠으니, 1998년 당시의 그는 이런 법 규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1001마리를 보내면서도 1000마리라고 말한 것은, 처음엔 1000마리를 보내려 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자서전2>에 따르면, 6월 16일 아침의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강인덕 통일부장관은 "원래는 1000두였습니다"라며 "그런데 정 회장이 0을 붙이는 것은 끝자리이니까, 하나로 다시 시작하겠다고 해서 1001두로 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1000이란 숫자는 뭔가 끝나는 느낌을 주니까,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을 주고자 1001로 했다는 것이다.


 소떼 방북 장면. 서울아산병원의 아산기념전시실에서 찍은 사진.
 소떼 방북 장면. 서울아산병원의 아산기념전시실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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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이 북한에 눈길 돌린 까닭

정주영은 소 판 돈을 훔친 것으로 인한 빚을 갚고자 소떼 방북을 하게 됐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언급이겠지만 그의 진짜 동기는 사업 확장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의 경제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남북 경제협력을 통한 현대그룹의 사세 확장을 꿈꿨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전략은 1970년대 후반부터 한계에 직면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80년에는 경제개발계획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경제적 돌파구 중 하나를 남북경협에서 찾고자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1년 국정연설에서 김일성을 '주석'으로 부른 데 이어,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금강산 이남에 자유관광지대를 만들려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졌다. 한국 경제는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 덕분에 1980년대 중반에 잠시 호황을 누리다가 후반에 다시 어려워졌다. 여기다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전반적 임금상승으로 기업들이 예전만큼의 수익을 거둘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때 추진했다가 이루지 못한 남북경협과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한편, 중국·동구권을 상대로 북방정책을 펼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이 같은 1980년대 분위기를 가장 잘 활용한 기업인 중 하나가 바로 정주영이다. 1977년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그는 1980년의 전경련 활동 방향을 '중국과 동유럽 진출을 위한 정보활동사업 확충'으로 설정했다.

그는 전경련 회장을 그만둔 뒤인 1989년 1월 6일 소련을 방문해 시베리아 개발사업 논의에 불을 지피고, 1월 23일에는 현대그룹 차원의 남북경협을 목적으로 북한까지 방문했다. 정부 정책과 국제정세를 이용하거나 거기에 편승하면서 남북경협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주영은 남북경협을 현대그룹 전체의 명운과 연결했다. <역사비평> 2015년 8월호에 실린 정태헌의 논문 <1998년 소떼 방북, 21세기 한반도 대전환의 문을 연 메가이벤트>에 따르면, 정주영은 어느 한 분야만의 남북경협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친 총제적 경협을 추진하면서 각각의 사업을 현대그룹 계열사들과 연결시켰다. 건설·해운·조선·관광·플랜트(설비 구축) 같은 여러 분야의 경협을 통해 현대그룹 전체의 동반 도약을 꿈꿨던 것이다.

하지만, 1989년 방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의 대북 창구인 박철언에 대한 민정당 내부의 견제로 인해 남북경협이 훼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정주영 본인이 1992년 대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집권당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정주영의 대선 출마가 확실해지자, 노태우 정권은 경제 분야 대북 창구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 바꿔버렸다.

어차피 1990년대 초중반에는 남북경협이 불리했다. 1993년 시작된 제1차 북한·미국 핵대결로 인해 북한에서 성과를 얻어오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고 해빙의 훈풍이 불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주영은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버렸다. 위의 자서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소떼 방북을 이렇게 평가했다.

"역시 정 회장다웠다. 통이 큰 만큼 추진력도 대단했다. 84세(원문은 '83세')의 나이에도 상상력과 꿈을 지니고 있었다. … 그에게 축복이 함께 하길 바랐다. … 판문점을 넘는 장면은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했다. 그는 동화 속의 큰 목동 같아 보였다." 


 소떼 방북 당시의 정주영.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된 한국 현대사 관련 사진들 속에서 찍은 사진.
 소떼 방북 당시의 정주영.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된 한국 현대사 관련 사진들 속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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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대박'의 진짜 원조는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정경 유착과 노조 탄압으로 부의 상당 부분을 축적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비판받아 마땅한 재벌 총수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웬만한 재벌들은 생각도 하지 못한 '통일이 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통일은 친북 혹은 종북 좌파만 추구할 게 아니라, 이윤을 쫓는 기업가도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초에 '통일 대박'을 외쳤다. 사람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방법 중 하나는, 어디에 돈을 많이 쓰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박근혜는 문화·체육 분야에 나랏돈을 과도하게 많이 썼다. 박 정권의 VIP 예산(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예산)은 그쪽에 집중됐고, 그렇게 해서 조성된 자금 중 상당액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통일 사업 쪽으로는 돈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통일 대박' 주장은 허울뿐이었던 셈이다.

그에 비해 정주영은 통일을 위한 남북경협에 많은 돈을 썼다. 그리고 그룹의 미래를 거기에 걸었다. 그러려고 1998년 6월 16일 소떼를 끌고 판문점을 넘은 것이다.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은 돈이다'를 감지하고, 돈과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주영만큼 돈의 흐름을 잘 포착한 인물은 드물다. 그런 사람이 민족통일에서 돈 냄새를 맡았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가 낌새를 맡은 것처럼, 통일은 종북 좌파나 추구하는 몽상적인 일이 아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투자해 볼만한, 지극히 현실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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