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센 타선의 선봉장, 고종욱과 이정후(사진=넥센).
[엠스플뉴스]
| 박병호와 강정호는 없지만, 목동야구장처럼 홈런이 펑펑 터지지 않지만, 여전히 넥센 히어로즈 타선은 투수들에게 공포감을 선사한다. 높은 컨택트율과 라인 드라이브 타구로 무더기 안타를 쏟아내는 넥센 타선의 특별한 매력을 살펴봤다.
박병호도 있고 강정호도 있던 시절, 목동야구장을 쓰던 시절, 넥센 히어로즈 타선은 투수들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2013시즌 팀 홈런 125개로 리그 1위, 2014시즌엔 199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린 데 이어(역대 6위) 2015시즌엔 역대 5위에 해당하는 203개의 팀 홈런을 날렸다. 스치기만 해도 담장을 넘어가고, 제대로 맞으면 다음 날까지 타구가 날아가는 넥센 타선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그리고 박병호도 없고 강정호도 없는 지금. 넥센 타선은 또 다른 의미에서 투수들에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작은 4월 7일 잠실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전. 리그 최고 투수 더스틴 니퍼트를 무너뜨린 경기가 도화선이 됐다. 이날 넥센은 니퍼트를 5회 2아웃까지 7안타(1홈런) 3볼넷 6득점으로 일찌감치 끌어내린 끝에 7-3으로 승리, 길었던 개막 5연패에서 벗어났다. 11안타 가운데 2루타만 6개, 3루타와 홈런도 각각 하나씩 기록하며 갭 파워로 두산 마운드를 두들겼다.
막혔던 혈이 뚫린 넥센 타선은 다음날부터 더 크게 터졌다. ‘판타스틱 4’의 일원인 유희관을 6회 2아웃까지 9안타 5득점으로 녹다운 시켰고 김명신, 이용찬, 김승회, 김성배 등 나오는 투수마다 족족 난타했다. 홈런 2방 포함 장단 20안타로 13득점. 9일 두산전에선 2회에만 10점을 뽑아내는 등 19안타로 13점을 뽑아내며 3연전 싹쓸이를 달성했다.
그리고 11일, 고척 홈으로 장소를 옮긴 넥센은 팀 평균자책 1위 kt 마운드까지 무너뜨렸다. 젊은 에이스 주권을 5회까지 9득점으로 내려보낸 뒤, 전날까지 22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온 kt 불펜 상대로 3점을 추가했다. 17안타 12득점으로 3경기 연속 15안타 이상-두 자릿수 득점 행진도 이어갔다.
4연승 기간 맹타로 넥센의 팀 타격 성적은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넥센은 6일까지 팀타율 0.228로 타격 침체에 시달렸다. 그러나 12일 현재는 팀 타율 0.316으로 리그 1위로 올라섰다. ‘투고타저’란 말이 무색하게 리그에서 유일하게 팀 타율 3할대를 기록하고 있다. 팀 득점도 56점으로 롯데(62점)에 이은 2위, 팀 OPS도 0.856으로 롯데(0.913)에 이은 2위다.
넥센 타선의 3요소: 공격성, 컨택트 능력, 라인 드라이브
넥 센 타선의 새 히트상품 예감, 허정협(사진=넥센).
넥센 타선이 무서운 건 단지 최근 4경기에서 잘 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넥센 타선에는 박병호 시절, 목동 시절 그랬던 것처럼 넥센만의 뚜렷한 컬러가 있다. 그리고 이 넥센의 컬러가 상대 투수들을 ‘멘붕’에 빠지게 하고 두렵게 만든다.
현 넥센 타선의 가장 큰 특징은 ‘공격성’이다. 넥센은 12일 현재 타석당 평균 투구수 3.65개(최소)로 리그에서 가장 빠른 카운트에 타격하는 팀이다. 타석 대비 타구 비율을 나타내는 InP%도 77.5%로 압도적인 1위다. 갈수록 볼넷과 삼진 비중이 커지는 요즘 야구 추세와는 정반대로, 넥센 경기에선 배트에 공이 맞을 때 나는 경쾌한 타구음이 끊이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다 삼진이나 볼넷으로 끝나는 타석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배트로 공을 때려서 페어 지역 안으로 타구를 날려 보내는 적극적 타격을 한다. “항상 인플레이 타구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게 목표에요.” 주전 유격수 김하성의 말이다. “인플레이를 만들어야 뭔가 상황이 생기잖아요.”
전력분석을 담당하는 다른 구단 관계자는 시즌 초반 스트라이크존이 넓어진 리그 환경을 언급했다. “존이 넓어진 만큼 기다리면 투수가 유리해집니다. 삼진당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죠. 적극적으로 타격하는 게 유리할 수 있어요.”
이런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타격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시범경기를 거치는 동안 장정석 감독이 강조했던 덕목이다. 장 감독은 연습경기와 시범경기 기간 타자들에 “공격적으로 타격해라. 3-0 카운트에서도 기다리지 말고, 초구와 2구에도 타격을 해라”는 미션을 줬다.
연습경기에 졌어도, 타자들이 공격적 타격을 했다면 좋은 평가를 내렸다. 외부 사람들이 연습경기와 시범경기 승패를 신경 쓸 동안, 넥센은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계획을 실행했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공격적 접근법을 꾸준히 연습하고 몸에 익힌 성과가 정규시즌 실전에서 서서히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넥센의 공격적 타격은 뛰어난 컨택트 능력이 뒷받침하기에 가능하다. 넥센 타선은 컨택트 성공률을 나타내는 Contact%가 83.9%로 10개 구단 가운데 압도적인 1위다.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온 공을 컨택트한 비율도 88.4%로 뛰어나지만, 존 밖의 공에 컨택트 성공률도 71.5%로 가장 뛰어나다. 인플레이 타구의 타율을 나타내는 BABIP는 0.352로 단연 리그 1위다.
반면 타석당 삼진율은 14.4%로 리그에서 가장 적었다. 스트라이크 가운데 헛스윙 비율도 10.8%로 리그 최소다. 스트라이크존 밖의 공에 배트가 나온 확률을 나타내는 OZ Swing%는 23.1%로 두산(22.2%)에 이은 리그 2위다. 잘 맞힌다고 아무 공이나 배트를 휘두르지 않는단 얘기다. 존 밖의 공에는 거의 배트가 나가지 않고, 존에 들어온 좋은 공 위주로 공략하는 타격이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고 컨택트 위주 타자들이 흔히 하듯이 갖다 맞히는 식의 타격과는 거리가 멀다. 올 시즌 넥센 타자들의 타구를 살펴보면 외야로 뻗어 나가는 힘 있는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대부분이다. 내야에 머무는 힘없는 땅볼 타구는 거의 없다. 넥센의 내야 타구 비율은 44.8%로 10개 구단 가운데 가장 적다. 외야로 향한 타구 비율은 55.2%로 전체 1위다. 2루타도 23개로 리그 1위, 3루타는 3개로 공동 1위다.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많은 팀의 특징이다.
이처럼 넥센 타자들이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은 빠르고 강한 타구를 날릴 수 있는 신체조건을 갖추는 ‘준비’가 우선이다. 넥센 이지풍 트레이닝 코치는 종종 “방망이를 많이 휘두르고 펑고를 많이 하는 것만 노력이 아니다. 그 이전에 잘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좋은 몸과 컨디션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웨이트로 근육의 힘과 반응 속도를 키우고,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타석에 나서는 넥센 타자들의 타구 질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다 타격 훈련 때도 라인 드라이브 생산에 초점을 맞춘 연습이 이뤄진다. 강병식 타격코치는 나름의 ‘드릴(drills)’을 이용해 타자들이 가장 이상적인 타구 발사각을 몸에 익히게 돕고 있다. 강 코치는 “거의 ‘세뇌’하는 수준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까지 타격코치를 지낸 심재학 수석코치도 미국 메이저리그의 훈련 방법을 연구해 필요한 조언을 건넨다. “코칭스태프 간의 호흡이 아주 잘 맞는다. 감독이 참견할 일이 없다”는 장정석 감독의 말 그대로다.
‘포스트 목동’ 넘어 고척돔 최적화에 성공한 넥센
3점 홈런을 때린 김하성이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다(사진=넥센).
지금의 넥센엔 박병호와 강정호처럼 40홈런 이상을 때려내는 슬러거는 없다. 광활한 고척스카이돔은 목동야구장처럼 홈런으로 승부하기에 적합한 구장도 아니다. 하지만 넥센은 새로운 멤버 구성과 새 구장 환경에 최적화된 전략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이제 넥센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누구 하나 쉬어갈 곳 없는, 짜임새 있는 라인업을 자랑한다. 20-20 멤버 김하성은 8번 타순으로 경기에 나선다. 외국인 타자 대니돈이 부진해도 전혀 표가 나질 않는다. 이정후와 허정협 등 새로운 얼굴이 등장해 빠져나간 선수들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고 있다.
이전만큼 홈런포가 펑펑 터지진 않지만, 대신 쉴 새 없이 뻗어 나가는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무더기 안타와 2루타가 되어 끊임없는 찬스로 이어진다. 볼에는 방망이가 잘 나오지 않고, 스트라이크를 넣으면 여지없이 컨택트가 이뤄진다. 상대 투수에겐 끝나지 않는 악몽이다.
“우리 선수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11일 kt전 대승을 거둔 뒤, 강병식 코치가 기자에게 되물은 말이다. 왜 아니겠는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시즌 초반 넥센 타선의 기세가 대단하다. 판타스틱 4도, 팀 평균자책 1위 투수진도 막지 못한 넥센의 상승세가 과연 어디까지 갈지 벌써 궁금해진다. ‘포스트 박병호’, ‘포스트 목동’ 시대를 지나, 불과 2시즌 만에 고척돔 모드 최적화에 성공한 넥센의 방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