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Yesterday – 공황의 극복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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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농장,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8장은 미국 중부 대평원의 농장지대가 1930년대에 처했던 어려운 형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공황에 더하여 1933년 11월부터 약 2년동안 엄청난 흙먼지 폭풍이 계속 덮쳐서 수천 평방 마일이 폐허로 변했으며, 거기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먼 길을 가로질러 필사적인 이주를 위한 방랑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대평원은 풀밭이 넘실대는, 그래서 낙관적 분위기가 넘쳐나고 언제나 하늘은 청명한, 미국에서 제일가는 목초지였다. 하지만 19세기가 저물 무렵에 이미 대평원은 과도한 방목의 결과 심하게 손상되고 있었고, 비도 거의 오지 않는 건조한 땅에서 먹거리 한 톨이라도 더 짜내려는 정착민들의 유입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남북 전쟁으로 인해 밀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면서, 또 트랙터를 이용한 기계 경작이 가능해지면서, 대평원은 이제 식량을 공급하는 땅으로 개인의 토지가 되어버린 결과, 대평원을 보호해왔던 표면을 덮고 있던 푸른 풀밭이 대규모로 파헤쳐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19세기 내내 대평원은 밀 경작지로써 확장 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미국 농업의 대혁신이 실현되는 신천지가 탄생했다고 떠들었으며, 의기양양하게 기계식 농업을 그 지역에 적용했다. 그러다가 가뭄이 닥치자 흙먼지 폭풍이 생긴 것이며, 대평원의 초지를 망가뜨린 인간에 대한 응징인 셈이다.
어쨌든 대공황에 더하여 흙먼지 폭풍이 2년간 계속 덮치자 중부의 농민들은 대공황 기간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그룹이 되었다. 소설 ‘분노의 포도’가 바로 이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그 배경에 트랙터 보급에 따른 농업의 기계화가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314) 기계를 사용해 대규모로 목화 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소작농들이 이리 저리로 내몰렸다. 당시 포춘지의 기사를 보면 트랙터 22대와 네 열 짜리 경운기 4대를 구입한 미시시피 주의 한 대형 농장에서는 160 소작농 가족들 중 130 가족 이상이 보금자리에서 내쫓겼고, 일용직 근로자 30명 정도만이 남겨졌다. 1930년에서 1937년 사이에 목화를 재배하는 10개 주의 트랙터 판매가 90% 이상 증가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에는 증가율이 더 높아졌다.
(311) 1938년 농무부에서 전국의 농장 3000 여 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더 좋은 농기계의 보유도 늘어났고 그로 인해 농사짓기도 편해졌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30년보다 전기 보급율도 올라갔으며, 트랙터와 트럭 보유율, 목욕 시설, 자동차, 라디오 보유율 등이 상승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전체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우선 수많은 농부들이 저 끔찍한 불황의 초기에 빚으로 인해 그들의 농장을 날렸다. 이런 농장들은 은행이나 보험회사, 농부들에게 담보대출을 제공한 소도시 투자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갔거나, 세금을 내지 못해 결국 정부에게 차압을 당하고 결국 채납 처분을 당했다. 국가 자산 위원회의 발표를 보면 일찍이 1934년도에 북서-중앙 주들에 위치한 농장 자산의 거의 30%를 “어쩔 수 없이 소유를 떠맡게 된 채권자나 정부 기관”이 소유하고 있었다. 뉴욕의 큰 보험회사에서 대평원에 위치한 소도시로 파견된 직원은 도처에 널린 자산을 관리하느라 엄청 바쁜 사람이었다. 자기들은 ‘절대 이런 식으로 문어발을 내밀고 싶지 않았다, 돈만 돌려받으면 정말 이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문어발과 같은 대도시의 경제력은 그 어느 때보다 넓고 깊게 지역 경제를 헤집고 들어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도시의 보험회사들은 그들이 보유한 농장 자산들을 살 사람을 찾느라고, 또 그들이 할부로 쉽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느라고 적극적인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월가의 냉정한 격언에 따르자면 미합중국의 농장들은 이런 식으로 “더 유력한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농장들이 농장에 살지 않는 소유주들이 고용한 소작인들에 의해 운영되게 되었다. 이후 최소 50년 이상 미국의 농장에서 일하는 소작인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1880년에만 하더라도 25% 미만의 미국 농장들만 소작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 비율은 천천히 늘어나서 공황기에는 약 42%에 달했다. 소작의 증가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많은 미국 국민이 오래 전부터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개인의 토지 소유라는 옛 제퍼슨 시대서부터 내려온 훌륭한 이상마저도 무색케 했을 뿐 아니라 여타 여러 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소작인은 뿌리를 내린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땅과 사용하는 농기구에 대해서 온전하게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망가져도 상관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완전히 섞이지 못한 채 떠도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1935년에는 미국 전체 소작인의 삼분의 이 미만만이 일 년 이상 한 곳에서 일했다! 찰스(Charles)와 메리 버드(Mary Beard)는 “소작인들은 이 농장에서 저 농장으로, 이 주인에서 저 주인에게로,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걸어서, 초라한 마차에 실려서, 다 낡아빠진 자동차를 타고, 대게는 딸린 식구들과 함께, 자신이 자랄 때보다 더 못한 생활 여건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농장들이 “더 유력한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감으로써 또 다른 변화도 생겼다. 자신이 직접 운영을 하건 안하건 간에 농장 소유주는 점점 더 자신이 사업가라고, 농장 운영은 사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농장주는 농업이 더 이상 자신이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농작물이란 키워서 내다 파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회계 장부에 공을 들였고, 기계화의 장점, 가능하면 트랙터를 사용해 대규모로 짓는 농사에 더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이런 경향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바로 “여행 가방을 든 농부”의 출현이었다. 그들은 작은 도시의 사업가로 한두 개의 농장을 사들여서 거기에 있던 집이나 헛간을 쓸어버린 후,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데 일 년에 몇 주 정도의 시간만을 쓰며(자신의 트랙터를 사용하거나 임대해서), 나머지 시간은 사업에 몰두하는 식이고, 농장에서는 전혀 거주하지 않는다. 캔자스 주의 한 은행가가 랫드 해이스테드(Ladd Haystead)에게 말한 것을 들어보면 1930년 후반 무렵에는 서부 캔자스 주 농지의 약 20에서 30%가 이와 같은 여행 가방을 든 농부가 소유주였다. 바로 이것이 가뭄으로 인한 수많은 피해 농민들이 농장을 떠나간 결과 지역에 생긴 변화였다.
(316) 해고된 소작인 가족은 어디로 갔을까? 일부는 도시로 향했다. 시골 지역의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시 인구는 증가했으며 동시에 시골 지역의 인구는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텍사스의 한 주유소에서 일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식의 인구 이동은 도시를 버려놓았어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시골에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이들 중 일부는 하루에 1.25달러 받고 농장에서 트랙터 모는 일로 취직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캘리포니아로 갔다. 결국 농업이 정착된 삶으로써의 직업이 아니라, 대규모 이동 가능한 노동력의 공급에 맞춤한 하나의 거대한 기업이 되어갔다.
대서양 연안에 인접한 지역에서도 이주 농장 근로자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말한 새로운 경향은 대부분 남서부 쪽에 한정된 일부 현상이었다. 일찍이 1920년대에 대평원 지역에서 크게 유행했고 촉망받던 트랙터 영농이 그랬듯이, 아마도 농업의 산업화라는 세찬 흐름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결국 다시 한 번 토양을 망가뜨리고 나서, 땅이 원래대로 돌아갔듯이 스스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미래의 농업은 작은 규모로 좀 더 집약적인 방식으로 향해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농-생물학자들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과학 분야인 농산화학(農産化學) 덕분에 이제는 농산물을 여러 가지 산업생산의 원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뒤퐁사는 셀로판, 듀코 수지, 영화 필름, 레이온, 피랄린. 플라스트셀, 패브리코이드, 스펀지, 차양, 머리 장식, 핸드백, 술, 기타 예전의 농업에서는 그런데 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수많은 제품의 생산에 농산물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새로운 용도로 쓰이는 특수 작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배하는 미래의 농부는 작은 규모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최선일까? 대부분의 농업인들이 가진 자본보다 적은 비용으로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아직 없다. 어쨌든 대규모 트랙터 영농은 급속히 퍼져나갔으며, 그 결과 마치 미국은 그 동안 인류의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듯이, 19세기 중반에 인류가 이미 경험한 가혹한 산업화의 역사를 다시 그대로 반복하게 되었다. 새로운 변화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대도시에 의해 운영될 것이 틀림없는 기업화된 대규모 기계식 농장은 아직 트랙터가 들어가지 않은 경사지에 위치한 남부 옛 면화경작지의 작은 농장들까지 점점 기업화시킬 것인가? 멤피스 출신의 러스트(Rust) 형제에 의해 발명된 면화추출기는 이런 변화를 가속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 불쌍한 물납소작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국은 국토의 다른 지역도 남부와 서부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변화의 전철을 조만간 밟게 되고 말 것인가?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기댈 데도 전혀 없고 그 어떤 정착지도 없기에, 조직화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조직화되면 몹시도 위협적인, 방랑하는 수많은 정처 없는 빈곤층을 양산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야만 할 것이다. (저자는 1939년 당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0년 이내에 다른 산업 부문이 모든 인력을 흡수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322) 1931년에서 1936년 사이에는 미국으로 유입되는 인구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으며, 미국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인구는 매년 증가 추세였다. 사실 이런 경향은 조금씩 역전되어 온 결과였다. 유럽에서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인해 1936년도부터 다시 유입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전쟁(1차 대전) 전에 비해서는 전체적으로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엘리스 섬은 더 이상 붐비는 곳이 아니었다. 미국 내에 사는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수가 사망으로 인하여 급격히 감소하는 시점이 코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미국의 여러 도시의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들리는 다른 나라 언어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학교, 아동복 생산업, 장난감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출생률 감소의 여파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불황의 초기에 일어난 출생률의 급격한 감소가 이 경향을 더 심화시켰다). 헨리 프렛 페어차일드의 1938년 보고에 따르면 미국에서 열 살 미만인 어린이의 수가 오 년 전에 비해 160만 이상 감소했다.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수가 줄어들자 학교 교장선생님들은 인구 전문가들이 말해온, 전체 인구가 점점 줄어들 것이고, 노인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고, 젊은이들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보게 된 것이다. (미국은 1921년, 24년 국적법을 강화하여 이민의 유입이 그 이전에 비해 줄어든 상황이었음. 또한 미국의 1920년대는 그 이전에 비해 출생률도 다소 낮아진 상황이었는데, 대공황으로 인해 출생률이 더욱 감소했음. 2008년말의 경제위기 이후 시간이 상당히 흘렀으므로 2017년 현재 미국의 출생률 역시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닌지 궁금.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이 더해지면 과거와 유사한 상황이 향후 펼쳐진다고 할 수 있음)
9장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가 승리한다
1936년의 상황 (328) 그 해 1936년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을 일년으로 지나가고 있었다(루즈벨트의 집권 4년차가 되었음). 루즈벨트가 처음 대통령 후보가 된 1932년 이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잊혀져 갔던가! 이제 없어진 것은 금융 파국의 전망이었다. 은행에 대한 불신이 사라졌다. 은행부도는 거의 없어졌다. (핀란드를 제외하고) 전쟁빚을 받아낼 희망이 사라졌다; 오년전(1931년) 허버트 후버대통령이 전쟁빚을 1년만 지급을 연기하자고 제안하였는데, 이렇게 했더라면 과연 대공황을 멈추는 것이 가능했었을까? 전통적인 국제 금본위제도로 조기 회귀할 희망이 사라졌다. 이제 관리통화제도가 그자리를 차지했다. 즉각적인 인플레 위험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사그라들고 있었다. (후버시대보다 훨씬 커진 연방정부 적자가 심각하게 우려되었지만, 사람들은 정부 채권을 사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실업문제를 빨리 해결해줄 경제의 급상승을 기대하는 것도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비상사태나 위기를 언급하였지만, 분명히 그들은 더이상 갑작스런 위기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이런 비상사태는 반영구적인 것인양 되어버렸다. 경제시스템은 1929-33년의 침몰 시기를 빠져나왔으나, 만성적인 환자상태가 되어버렸다. 정상으로 돌아오는 신호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구백만에서 천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실업이라는 사실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대부분 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정부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경제시스템의 작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문은 더이상 없었다. 정부가 한번 개입하고서, 빠져나오려 했음에도 빠져나올수 없었다. 문제는 정부의 개입이 어느 정도 해야하나였다. 국가의 경제본부는 월스트리트에서 정부로 옮겨갔을 뿐만 아니라, 무한정 그곳에 남겨진 것 같아 보였다. 늘 그렇듯이, 경제적 권위가 농촌에서 도시로, 중소도시에서 뉴욕으로 중심이동을 해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미시시피 계곡 큰 토지도 뉴욕 회사들의 의지로 개발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그 회사들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정부가 말할때, 월스트리트은 누가 주인으로 지시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월스트리트의 머리이자 심볼인 금융재벌 모건가조차도 정부의 지시로 상업은행부문과 투자은행부문으로 두조각났다. 월스트리트의 어떤 결정도 정부의 승인, 허락없이 내려지지 않았다. 정부는 권력뿐 아니라 규모와 복잡함이 증대되고 있었다. 열풍이 정치계를 흔들면, 새로운 연방정부기구들이 줄줄이 생겼다, 마치, 몸의 열이 날때, 그것과 싸울 백혈구가 늘어나듯이. 당시 관행상 각각의 연방정부기구들은 기구명칭의 앞글자들로 불려졌는데, 그러나 곧 기구들이 너무 많아져서 오직 전문가들만이 앞글자들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RFC, NRA, WPA는 정부기구 작명 수업의 초급반에도 쉬울것이다; AAA, CCC, SEC, TVA는 중급반용, 그러나 HOLC, FHA, FCA와 NYA등은 무엇의 약자란 말인가? 뉴딜정책이 직면한 어려움이 성공적으로 풀어내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그리고, 경제위기에 부적응 피해자들에게 경제위기자체를 고쳐 주는 것보다 정부 보조금을 나눠주는 것이 더 쉬웠기에, 이 비대해진 정부조직은 거대한 보조금 지급기계가 되었다. 전쟁수당과 상선지원보조금은 물론이고 정부 구조기금, 농촌할당기금, 그리고 다른 수많은 비상기금들을 나눠주었다. 1936년까지 1억불의 세출예산은 작은 변화였고, 심지어 10억불의 예산도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연방정부의 권력 강화에 대해 공화당은 경악했다. 그러나, 필요불가결하다는 상황인식이 자리잡고 있어서 공화당이 집권한다해도, 그 추세를 거스를수 있을런지 의아했다. 두 정당간의 차이는 마치 한쪽은 연방정부 확대를 위해 계속 가속페달을 밟고 다른 한쪽은 브레이크페달을 밟으려 하는 격이었다.
(332) 최악의 대공황이 지나고 나면, 국가간 경제장벽이 걷혀질 것으로 예상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장벽들은 더 높아졌다. 독일에서 나치 정권의 목표는 1930년 모든 정부들을 어렵게한 경제문제 해결에 있지 않았고, 자국 국민에게 정복의 짜릿함과 자부심을 주는 데 있었다. 독일은 실업자들을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고, 한편으로 인플레된 자국의 통화와 거의 모든 경제활동을 중앙권력으로 통제하여 번영을 이루었다. 나치는 일시적으로나마 자유 민간 경제의 핵심을 거부하였다. 사실상 경제라는 말이 자유로운 인간의 조직적인 결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볼 때, 경제이론을 완전히 무력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자리를 충동적이고, 정복적인 조직으로 대체시켰다.
(341) 1936년의 확실치 않게 다가온 이 조그마한 경기회복조차도 얼마나 반가왔던가! 철도는 그 경기회복의 혜택을 보지 못한 반면, 자동차 회사들은 1928년과 29년을 제외하면 매년 더 많은 차를 팔았다. 철강산업은 마침내 백퍼센트 생산가동했고, 소비재 산업과 체인점들은 살아났다. 심지어 대공황 최악기에 완전히 중단되어 오래 신음해온 건설업도 정부지원과 함께 활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젠 건축가에게 안부문의를 하는 게 더 이상 곤혹스러운 질문이 되지는 않았다.) 부유촌엔 돈이 넘친듯 보였다. 마이애미는 캘빈쿨리지 대통령의 오래전이후 플로리다의 쇠락이래 가장 좋은 계절을 보내고 있었고, 큰 도시에는 돈이 넘치는 파티들이 열렸고, 경마장에는 인파가 넘쳤고, 나이트클럽의 캐시어는 돈들어오고 나가는 팅클링 소리를 내기 바빴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후버시대에 그들의 투자와 루즈벨트정권하에서 그들의 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고려하면서, 그들의 돈을 당장 즐길수 있는 데 쓰고 있었다. 살펴보면, 새로운 산업시대로 판명될 수는 있는 좋은 전망도 있었다. 일부 기차들은 그동안의 기술정체에서 벗어나 듀랄루민, 스테인레스철강, 또는 내후성 강판(코르텐)으로 만들어진 날렵한 유선형의 기차를 선보였다. … 에어컨디션도 유행이 되었다. 영화관과 기차에서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가게들, 사무실에도 설치되었다. … 비행기는 1932년 시간당 110마일을 날았던 데 반해, 1936년 6월 나온 은빛의 더글라스 DC3는 시간당 200마일의 항속속도를 가졌다. 밤을 넘기며 항해하는 대륙횡단 비행여행은 일상이 되었다. 1936년 10월에는 대형 상업비행기 차이나클리퍼(China Clipper)가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왕복스케줄을 완수했다. 아직까지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용 비행서비스는 없었지만, 독일의 최신 비행선 힌덴버그가 1936년 규칙적인 일련의 비행을 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우아한 비행선에 1937년 5월에 무슨 일이 닥칠지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자동차 운전자도 시속 60마일로 잘 다듬어진 하이웨이를 달리며 새시대의 불빛을 느낄수 있었다. 교량밑 차로, 클로버 잎모양의 웅장한 교차로을 갖추고, 마을 외곽으로 난 고속도로는 몇년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저 차는 붐비는 지역도로에서 헤맸었다. 이제 세상은 새롭고 신기한 스피드의 세상이었고, 1930년대 건설된 미국에서 유일한 마천루였던 뉴욕의 록펠러센터를 보면, 멋진 디자인과 밝은 조경, 그리고 때깔나는 건축자재가 도심의 장면을 멋지게 밝혀주고 있었다. … 새로운 건축자재라구? 화학자와 금속학자들은 마치 원하는 재료는 뭐든 만들수 있는 것 같았다. 니켈, 크롬, 텅스텐, 바나듐, 몰리브데늄을 섞어 만든 가볍고 더 강한 철판. 플라스틱은 자동차 운전대부터 주방식기까지, 또 라디오몸체부터 주사위까지 성형되었다. 새로운 인조섬유가 셀루로즈로 만들어지고, 남부소나무로부터 새로운 셀루로즈를 추출하는 새로운 공법들이 발견되었다. 합판도 나무같지않은 품질로 제조되었다. 분명히, 기술자들은 내일의 세상에서 사용될 재료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러한 신기술 결과의 생산은 지체되었다. 수경재배 농법에서 어떤 끝없는 가능성이 제약될 수 있을까? 광전기셀은 무슨 신기한 효율성을 만들지 못할까? 테레비는 미래의 엔터테인먼트와 뉴스전달에서 무엇을 할것인가? 2행정 디젤엔진은 생산과 동력전달을 혁명적으로 바꿀 것인가? 조립식 주택이 연구소에서 나와 실제 대량생산되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게될까? 이런 질문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있었다. 미국의 상상력은 끝을 모르고 달려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동차나 라디오와 같이, 엄청난 수요가 새로운 열품을 일으키게 한, 어떤 새로운 기계나 발명품이 있었나? 1936년 여름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이 진정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 즉, 바로 공황전인 1929년, 박테리아학자인 아서 G 셔먼이라는 사람은 바퀴를 단 작은 집을 만들어 휴가때 자동차로 끌고 다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좋은 평을 받아서, 그는 두 세채를 더 만들고, 1930년에는 디트로이트 자동차 전시회에 소개했다. 지금 그는 훨씬 더 커진 규모로 그 이동용 주택을 짓고 있으며, 다른 제조업자도 달려들었고, 연장과 도구들을 잘 다루는 개인들도 자신들의 집 뒷마당에서 트레일러집을 만들었다. 자동차 매일뉴스지(Automotive Daily News)에 의하면, 1936년까지 트레일러집의 숫자는 16만채로 추정된다. 플로리다주의 관찰자들에 따르면, 1937년 새해첫날에는 시간당 25대의 꼴로 트레일러집들이 주경계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로저 밥슨은 20년이내에 미국민 절반이 이동식주택에 살것이라고 예측했다. 일상에 지친 미국인들이 자신의 집을 팔고, 트레일러집에 타고 뻥 터진 길위의 생활로 나설때, 부동산가치, 세금, 직장유지, 아이들 학교문제, 위생문제, 그리고 다른 잡다한 일들을 떨치고 자유로운 시대를 맞이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무엇이 있을까?
10장 한 자루 펜과 카메라를 들고 암흑속의 미국을 가로지르며
(382) 정말로 ‘The Grapes of Wrath – 분노의 포도’가 몇 년만 빨리 출간되었다면 1939년에 누렸던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 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보였을 것이다. 1939년까지 대중들은 실업에 익숙해졌고 – 심지어는 현실에 안주하였다 –히틀러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관심을 바꿀게 될 새로운 걱정거리들을 얻게 되었다. 1939년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Steinbeck(‘분노의 포도’의 저자)을 마음의 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대목을 보면 미국의 대공황은 2차 대전에 개입하기 이전 시점인 1939년에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397) 대공황의 초기 몇 년 동안에 주목되기 시작했던 것은 여기 저기서 젊은 사람들이 가죽케이스의 오페라용 안경으로 보이는 것을 목에다 차고 다닌 것이었다. 그들은 우표크기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찍을 수 있고, 속도와 초점 심도를 겸비했으며, 사진작가로서의 모든 종류의 새로운 기회가 열려있는 어두컴컴한 빛 속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Leicas(라이카, 독일제 카메라의 상표명)나 다른 작은 독일산 카메라들을 발견했었던 카메라 열풍의 선구자들이었다. “소형 카메라” 중독자들의 수는 집행위원회나 나이트클럽을 가득 메운 단골 손님들이 얼마나 쉽게 촬영을 위한 착석을 할 수 있는지를 사진전문가들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8년 동안은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와 그 부품의 미국으로의 수입이 –주로 독일로부터– 5배 이상 증가하였다. 1935년과 1936년까지 미국 카메라 생산자들과 사진 용품 상점들은 경영호황을 맛보았다. 소형 카메라는 모든 곳에 있었다. 유명인사들이 젊은 남녀가 공식행사에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 작은 카메라를 눈에 대고 그들을 분명 허락없이 찍는 것에 익숙해졌던 얼마 전까진 말이다. 연극의 시작부와 갈라 콘서트의 휴식시간에는 복도들이 때때로 카메라 저격수들로 가득찼다. 남학생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확대기와 노출기를 사달라 애원했고, 카메라 전시회는 전례 없이 많은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1935~1937년의 2년간 미국에서 카메라 생산은 157% 급증하였다. – 1935년에 5백만 달러 이하에서 1937년 12.5백만달러 가까이 상승함. 저명한 사진 작품의 연간 모음집인 U.S. Camera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새로운 사진 잡지가 무더기로 등장하였고 이 중 몇 개는 대단한 인기를 얻으며 더 품위있는 삶일수록 덜 위엄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주도하였다.
11장 마찰과 경기 불황
1937년 1월 루스벨트가 두 번째 취임식 연설을 행했다. (423) 매우 유창한 연설이었다. 1933년 이후의 국가적 조건의 향상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그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여기서 멈춰 서서 우리 앞에 놓인 길에서 부터 돌아서야 하겠습니까?" 물론 그의 답은 "아니오" 였다. 이어서 그는 아직 남아 있는 가난과 참혹함을 패퇴시켜야 함을 통렬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나는 이 나라의 3분의 1이 제대로 거주하지 못하고 있고,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있으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을 나는 절망 가운데서 그려내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 가운데서 입니다. 그것은 이 상황에 내재한 불의를 보고 이해한 이 나라가 그 불의를 제거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미국 시민은 이 나라의 관심과 염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며, 우리의 영토 안에서 신실하게 법을 지키는 어떠한 사람들도 불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전진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풍요함을 더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가진 것이 너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충분히 주는지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 "
(426) 제너럴 모터스는 미국의 경제적 소왕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약 25만명을 고용하고 있으며, 미국 전역과 해외의 공장들에서 연간 2백만대의 승용차와 트럭을 생산했다. 이는 미국 전체 생산량의 5분의 2를 상회하며, 전세계 생산량의 3분의 1을 초과했다. 경영진은 이론적으로는 33만명의 주주들에게 책임을 져야했지만, 소수의 대주주들을 제외하고는 주주들로부터 어떤 지시나 제약 없이 자유로왔다. (이 주주들의 대군은 배당을 원했고, 배당이 없을 듯 하면, 이러한 거대 회사의 소액주주들은 저항하기 보다는 주식을 매도했다.) 순이익은, 1932년에는 순이익이 전혀 나지 않는 정도까지 줄었다가, 1936년도에 다시 증가하여, 2억5천만달러에 이르렀다.
(428) 1933년에 뉴딜이 경영진에게 조직화를 허가했을 때, 우리가 보아온 것 처럼 노동자에게도 조직화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이러한 조치가 혁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법들, 클레이튼 법안이나 노리스-라구아디아 법안 등은 이미 이러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그러한 조항들을 무력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산업회복 법안의 7a 조와NRA 조항들에 기술된 명시된 조직화에 대한 허가는 노동 조합 가입을 가속시켰다.
이 때 탄광노동자 연합의 지도자였던 존 루이스는 노동운동에 있어서 기존의 직종조합 주의가 철강, 자동차, 고무 등의 아직 조직되지 못한 대량 생산 산업의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집결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망쳐왔다는 믿음 하에 산업별 노동조합주의를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산업별노동조합주의란 산업별로 단 하나의 조직이 있어 산하 노동자들이 어떤 소규모 조합에 가입하였던 관계없이 한 조직으로 모두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후 제너럴 모터스를 상대로 한 연좌파업 농성이 성공했고, US스틸이 산업별노동조합주의에 따른 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를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맺음에 따라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위상이 올라간다.
(445) 1937년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가 대법원과의 신경전 끝에 대법원을 굴복시키며, 이후 대법관들이 진보성향 인사로 교체되면서 뉴딜정책이 다시 추진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471) 루스벨트 행정부는 계속되는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재정지출을 감축함으로써 균형예산을 달성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재정지출 감축 시도가 1937년 8월 이후의 경기후퇴를 불렀다. 이로 인해 재차 실업률이 상승하였고, 연방정부는 다시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그러다가 1939년 9월에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도 영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품 생산을 시작으로 2차 대전에 말려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이로 인해 우리는 뉴딜 정책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대체적으로는, 뉴딜정책으로도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전쟁(2차 대전)이 대공황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우세한 듯하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1937-38년의 경기후퇴는 너무 일찍 재정지출을 감축시킨 데 따라 나타난 일시적 경기후퇴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두 차트를 대조하면 1937-38년의 재정지출 감축은 너무 빠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민간 부문의 신용수축이 여전히 진행중인 상황이었으므로 재정은 팽창 기조를 좀 더 유지했어야 한다.
실수를 깨달은 연방정부가 재정을 다시 팽창시킴으로써 미국 경제는 다시 회복세를 이어갔으며, 이는 뉴딜정책이 시행된 1933년 이래 미국 경제가 일시적 등락은 있었지만 추세적으로 이어왔던 회복세를 계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2차 대전이 없었더라도 그 뒤 미국경제가 회복을 이어갔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다음 차트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2차 대전이 누진세 제도의 강화를 통한 소득 분배를 더욱 촉진함으로써 보다 탄탄한 회복의 기반을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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