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Yesterday – 공황의 극복과정 1
Since Yesterday – 공황의 극복과정 1
그동안 Since Yesterday 책 번역에 수고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크게 도움되는 자료를 편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발제문 만이 아니라 번역 원고 전체를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흥미 있게 술술 읽힙니다. 또한 짧은 발제문에 다 담을 수 없는 매우 유익한 통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우선 대공황의 성격에 대해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Forus 님께서 정리해주신 자료에 따르면, 1929년에 미국의 자동차 보급대수는 2,312만1천대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인구는 크게 어림잡아 1억명을 넘는 정도였습니다(정확한 통계수치 추후 확인 예정). 즉 당시는 '노동자 가구를 포함해서' 1가구 1대 꼴로 자동차가 이미 보급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당시는 현재와 생활 수준이나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30년대 대공황을 까마득한 옛날 일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오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1930년대의 대공황이 이전의 공황(30년대 대공황 이전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공황이 있었습니다)들과 달리 특별한 것이었던 이유 몇 가지를 언급하는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이런 대목은 당대를 미시적으로 관찰한 이 책의 강점입니다.
(번역원고 영한 대역본 62페이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몇년동안 분명히 지속될 수 없는 뚜렷한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것들은 1. 급속한 산업혁명의 진행 : 증기엔진, 그리고, 가솔린과 전기와 모든 방식의 과학적, 발명의 기적들이 있었다. 공장 생산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대도시로 인구가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독립적인 경제주체로부터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복잡한 경제의 구조에 더 얽매이게 만들었다.
저는 저자가 1순위로 꼽은 윗 대목에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의 진행으로 인해 경제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독립적인 경제주체로부터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시켰다”는 대목입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자본가였고 사업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이자 사업가입니다. 옷을 만들어 팔았던 재단사, 제화업자, 대장장이 등도 모두 스스로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이자 사업가입니다.
그러던 것이 산업혁명이 경제구조에 안착하면서 공장제 대량생산체제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제 '직업인'이 되었습니다. 즉 해고를 당하면 즉시 생계를 위협받는 취약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당시 해고를 당해 장기간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얼마나 큰 충격(물적·정신적으로)을 받았는지는 책 여러 군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대공황이 이전과 달랐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1순위로 이걸 꼽고 있습니다. 이런 대목은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 책의 강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30년대 대공황이 이전과 달랐던 또 다른 요인은, 발제를 해주신 음주외길 님께서 마침 제 책의 표를 찾아서 발제문에 올려주셨습니다(감사합니다. 덕택에 기억이 환기되었습니다 ^^;),
표에서 '내구성 소비재' 항목과 '비내구성 소비재' 항목을 견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내구성 소비재'라는 것은 당시에 처음 등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대표적인 내구성 소비재입니다. 다음으로 라디오. 책에서 당시 라디오 가격이 135달러라고 나옵니다. 다른 대목에서는 당시 약간 고급스런 점심식사가 1달러였다고 나옵니다. 후자로 보면 당시 1달러는 대략 1만원이라고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라디오는 135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책에서는 당시 라디오가 이 가격대임에도 불구하고 1200만 여 가구에 보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자동차는 1년에 145만 대 정도인가가 생산되었다고 얼핏 기억합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 인간 생활에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러한 '내구성 소비재'가 등장함으로써 당시 경제가 초호황을 구가했던 것입니다. 자동차와 라디오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다가 처음 등장해서 저렇게 팔려나갔으니 경제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지요. 즉 당시는 경제 구조가 '비내구성 소비재 경제'에서 '내구성 소비재 경제'로 바뀐 직후이며, 그에 따른 혼란을 조정했던 과정이 30년대 대공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윗 글에 있는 표를 보면 '내구성 소비재'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전체 산업생산을 크게 감소시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전통경제에서 소비되던 '비내구성 소비재'들, 즉 빵, 옷, 구두 등은 호황이나 불황에 따른 진폭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새로이 등장한 '내구성 소비재'들은 진폭이 훨씬 큽니다. 이 때문에 30년대 대공황이 이전과 양상이 달랐던 것입니다. 자동차나 135만원 짜리 라디오는 일시불로 사기에 부담되기 때문에 '할부금융'이라는 것이 당시에 새로이 도입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신용팽창이 과거보다 더욱 커졌던 것입니다. 이하 아래에서는 책의 각 장별로 내용을 발췌 또는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5장 뉴딜 허니문
1933년 3월 4일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1932년말 1933년초에 있었던 은행시스템의 붕괴 및 폐쇄가 전국민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에너지가 모아짐. 그에 따라 뉴딜 정책은 전례없는 속도로 신속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172페이지) 행정부의 일꾼들은 연달아 법안들을 생산해 놓았고 대통령은 이 법안들을 의회에 간결한 추천을 붙여 보냈고 의회는 마치 매혹당한 것처럼 이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충분한 논의 없이 심지어 의원들은 읽어 보지도 못한 채 나아가 전체적인 의미도 모르면서 입안처리를 해버렸다. 전쟁의 경우를 제외하고 정부가 의회를 완전지배하는 모습은 없었다. 전쟁 중에도 입법과정이 이렇게 서둘러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때 채택된 새로운 정책들(177페이지 이하)
1) 금에 대한 달러화의 평가절하 : 1달러 -> 59.06센트의 가치로 평가절하
2) 경작 조절 : 농민들이 농지에 농사를 짓지 않을 경우 보조금을 줌으로써 농작물 수확량이 줄어들게 만들고, 이를 통해 농작물이 가격이 오르도록 유도함(실제로 올랐음)
3) 고용촉진책 : 25만명의 젊은이를 산림보호 숲으로 집어넣는 루즈벨트의 계획은 의회에 의해 즉각 승인되었으며 CCC(civilian conservation corps. 시민 산림보존 협회; 젊은이들로 구성된 노동근로사업)에는 젊은이들로 군에서 방금 제대한 젊은이들이 포함되어졌다. 또한 33억 달러짜리 공공근로작업이 법안으로 통과되었음
4) 연방구제책 : 연방정부가 실업자들에게 실업수당을 대규모로 지급함(과거에는 실업자 구제는 주정부 소관사항으로 여겨졌던 것이므로 이는 처음 있는 일임)
5) 테네시 계곡 실험 :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실행된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계획은 그동안 그 진면목이 가려져 있었던 느낌임. 책 내용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전력 공급은 94% 정도가 민간 전력회사가 담당했기에 전력 요금이 비싸서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임.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계획은 연방정부의 예산으로 발전용 댐을 만들어 전력을 저가에 공급함으로써 민간 전력회사들이 전기요금을 인하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정책이었던 것으로 보임. 저자는 이 정책이 장기적 측면에서 볼 때 초기에 취해진 여러 뉴딜정책들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음. 그 이유는 연방정부가 직접적으로 민간 산업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고(그 이전에는 없던 일임), 국가개발 영역에 있어서도 지배적인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이 역시 그 이전에는 없던 일임). 6) 부채 부담의 완화 : 연방정부의 대행기구(페니매와 프레디맥을 말하는 듯)를 설립해서 농민과 주택 담보대출의 이자율을 내려주고 정부보증을 부가해 줌으로써 이들의 등골이 휘는 고통을 완화시켜주었고, 부수적으로 더 나아가 지역사회의 부채를 동결조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7) 금융 개혁 : 은행이 예금 수신기능과 증권발행업무를 같이 할 수 없음을 명문화함. 이를 통해 상업은행이 증권계열사를 가질 수 없음을 강제함.
8) NRA의 설립 : “NRA” 관련해서는 책에 용어가 불분명한 감이 있음. 루스벨트 행정부의 뉴딜정책으로 인해 새로이 입법된 법률은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로 약자는 NIRA가 됨. 이는 “국가산업부흥법” 내지 “국가산업재건법”이라 명명할 수 있겠음. 이 법을 통해 새로이 만들어진 연방정부의 행정기구가 NRA임. “국가부흥국” 내지 “국가재건국”이라 할 수 있겠으며, 약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풀네임은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또는 Agency)인 듯 함. NRA를 통해 추구했던 정책 방향은, 최대 노동시간을 제한함으로써 고용을 늘리고자 함 최저임금제를 도입함.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규정 마련 유명했던 7a조항을 명시함 : 그 내용은 ”근로자는 조합을 조직할 권리를 가지며, 그들이 선택해서 뽑은 대표부를 통해 단체로 협상할 수 있으며, 고용인과 그의 대리인에 의한 방해,강요,구금으로부터 자유로와야한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정위원회Labor Advisory Boards설립에 관한 규정 신설. 소비자를 보호하기 의한 소비자조정위원회Consumers' Advisory Boards 설립에 관한 규정 신설.
이상과 같은 여러 정책들을 서둘러 시행한 결과는?
“1933년 봄 여름엔 미경제 시스템은 즐거이 처방된 약을 복용했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이미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190페이지) “되돌아온 희망의 물결이 뉴딜정책 초기 6개월동안 흐르고 있었다”(191페이지)
산업생산 수치는 전년도 7월 58이었던 것이, 4월에 66, 5월 78, 6월 91, 7월 100으로 회복되었다(1929년 7월은 125였다). 하지만 고용률에 있어서는 그만큼 개선은 없었다. 기업들이 속도를 낼수록 예전에 부분작업하던 사람들이 전면작업으로 전환되어지고 사무직이 초과근무를 하는 식이었다. 그에 따라 기업개선효과와 실업률과는 격차가 심해졌다.
아래 차트(밀턴 프리드먼의 ‘미국화폐사’에서 발췌)를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여러 차트들 맨 아래에서 두번째 차트가 산업생산이다. 이를 보면, 1933년 전반기에 급격하게 좋아졌다가 이후 하락과 상승을 반복하고 있다. 이후 1934년 말부터는 안정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37년 중순에 이를 때까지는…
6장 기류의 변화
책에서는 대공황을 전후하여 사회적 풍조가 변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201페이지) 대공황이 있기 전 10년은 미국의 예절과 도덕에 급격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 혁명은 무릎스커트, 포켓 위스키, 밀매점의 칵테일, 카섹스, 막말, 프로이트 콤플렉스에 대한 자의적 해석, 좀 더 청교도적인 부모를 거부하고 모든 청교도 전통을 우습게 여기는 시류에 중독된 청년층의 공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1920년대 말이면, 적어도 청교도주의가 매우 순순히 사그라졌던 인구 중심지에서는, 혁명이 위축되는 중이었다. 장년 세대는 점차 자손들의 기이한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자신들의 행동 강령을 완화시켜갔고, 청년 세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온건함의 실익을 학습해나갔다. 대공황기까지 남녀공학의 “격정의 메이미(Flamin’ Mamie)”(재즈 음악)는 여전히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미래의 전조라기보다는 과거의 유물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1930년대가 돛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그런 기류의 변화는 점점 더 분명해져 갔다.
(204페이지) 이 연구는 성도덕에 대한 전통적 규정에 대항하는 반란, 달리 표현하면, 성적 자유를 지지하는 정서의 범람이 1923년과 1927년 사이에 정점을 찍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잡지들은 전술한 시기보다는 1930년과 1931년간의 가족과 성 문제들에 더 많은 토론을 할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조는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1930년의 그 잡지들은 결혼과 가족으로서의 삶, 우애, 이해심, 애정, 공감, 소통, 순종, 통합, 협력에 1920년보다 더 큰 동조를 보였다.
(209페이지) 대공황은 (혼인율을 떨어뜨렸으며) 이혼율 또한 급격히 떨어트렸다. 이혼율은 1929년 인구 천 명당 1.66에서 1932년에는 고작 1.28로 떨어졌다. 이혼은 돈이 든다. 게다가 스트레스의 시대에 그 욕망은 그리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곤경까지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에 대한 다량의 경건한 말들이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그 곤경이 행한 것은 사랑하건 안 하건 살아내기 위한 냉혹한 필요에 종속된 것이 전부였다. 최악의 시기를 지나자 이혼율은 다시 높아졌다. …. 제도로서 결혼은 1920년대보다 더 존귀해진 듯 보였다. 가족 역시 제도로서 더 존귀해진 것처럼 보였다. 포춘은 1936년의 조사에서 “여대생의 60%와 남대생의 50%가 졸업 후 1-2년 내에 결혼을 희망했고, 각 성별 50%는 결혼 직후 아이를 갖기 원했다.”고 보도했다. 1930년대 여대생들이 1920년대 여대생들보다 이른 결혼을 더 원했다는 사실이 여러 대학의 관리자들에 의해 알려졌다. 다른 대학생들 및 동시대 젊은이들 역시 10년 전 청년들보다 그들의 부모와 부모 세대의 견해에 대해 훨씬 덜 경멸적이었으며 가정생활이 엉터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225) ㅇ 주 5일 근무제의 등장과 정착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이 아니던가요?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해 70년쯤 뒤쳐진 셈입니다…)
공장 및 기업체들이 일감이 부족했던 1931년, 1932년에는 근무 시간 축소가 매우 일반화되었다. 한편으로는 “일자리 확산”, 또 한편으로는 급여를 삭감 당해야 했던 노동자들을 달래려는 의도가 실려 있었다. 1933년, 1934년에 국가 산업 부흥국(NRA) 조례들이 제정되자 이런 축소는 지속, 확대되었다. NRA가 폐지된 후에도 대부분의 조례는 유지되었다. 그 결과는 부자와 빈자를 막론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당해의 특정 기간에 토요 공휴일을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1937년 미국산업회의소의 한 연구는 주 5일 근무의 확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2,452개의 회사(대개 제조 회사) 중 57.3%가 임금 노동자에게, 45.3%가 사무직 근로자에게, 7.5%는 근로 형태를 특정하지 않은 노동자에게 주 5일 근무를 부여하였다. 보고서는 “5년 전 주 5일 근무는 예외적인 것이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고 요약했다. … 아마 30년대의 다른 어떤 변화도 이렇게 수백만 명의 주간 스케줄을 바꿔놓지 못했을 것이다. 도시를 벗어나는 금요일 행렬이 늘고, 토요일 행렬이 줄면서 자동차와 기차의 패턴도 바뀌었다. … 이틀간의 주말은 하루 반의 주말을 대체해가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여름이면 더더욱, 대도시의 상업 지역은 일요일 같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달갑지 않은 실업으로 내몰렸던 수백만의 사람들을 논외로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여가를 얻었다.
(228) 국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한때 “실내 야구”로 알려진 야구의 축소판, 소프트볼이었다. 30년대 초 무렵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1939년까지 매우 빠르게 성장해서 50만개의 팀과 전 세대에 걸친 500만 명 이상의 선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수의 준프로팀들과 월드시리즈가 있었고, 준프로팀들 틈에는 여성팀들도 있었는데, 여선수들은 상당히 짧은 반바지를 입고도 이따금 베이스에 슬라이딩해서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대공황은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 같은 운동에도 작은 붐을 일으켰다. 자전거 붐은 (캘리포니아 젊은 여성들에게 “디트리히 스타일 바지”를 입을 좋은 핑계거리를 주었던) 1932-33년 겨울의 헐리우드 지역에서 유행처럼 시작되었고 다음 2-3년간 널리 확산되었다. 그건 아마 돈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다발적 스키의 대유행은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었다. 적당한 지형과 겨울 기온의 교외 지역 거주자에게는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적합했지만, 장비를 장거리 운반해야 하는 도시 거주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스키의 비상에 대한 한 가지 비밀은 그 자체로 복잡한 사연(온화한 플로리다나 캘리포니아에서 겨울 휴가를 보내는 기쁨의 발견, 금주법 영향권 바깥 지역으로 겨울 유람선 타기나 드라이빙 하는 것의 인기 상승, 주간 근무일의 축소, 일요일의 세속화와 주말 취미의 증가 등)이 있는 겨울 휴가의 유행에 있다. 좌우간 스키 열풍은 대공황기이자 뉴욕 레이크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1932년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 보스턴 & 메인 철도회사는 보스턴 북부의 제법 탁 트인 공간으로 향하는 일요 “눈꽃 열차”의 시범 운영으로 꽤 성공을 거두어서 1937에는 눈꽃 열차 또는 눈꽃 버스가 뉴욕, 피츠버그, 시카고,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백화점은 노르웨이 전문가를 초빙해서 스키 활주장을 건설했다.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역은 뉴잉글랜드와 뉴욕의 십여 개 스키장을 위해 일간 기상과 강설, 적설 자료를 눈에 잘 띄는 중앙 홀에 게시했다. 싸늘한 위도의 지방 호텔 경영자들은 자기들의 남다른 스키 장비를 광고하며 운명이 달린 겨우내 눈이 오기를 밤마다 기도하고 있었다. 스키 열풍은 도시 빈민들의 재력을 넘어서는 범위에 있었고 지리적 제약도 있었지만 하나의 일반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더 많은 미국인들이 자연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다른 이들의 시합을 구경하며 돈을 내는 대신 스스로 즐기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237) 이런 모든 흥, 규제 완화, 스포츠의 징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긴장과 동요가 있었다. 대공황기 동안 미국인들이 의존했던 수많은 신념들이 부서졌고 그들은 내심 흔들렸다. 잠시 잔해더미를 들여다보자. 용모 단정한 청년들이 학교를 나오자마자 응당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야망과 열심, 회사를 향한 충성, 세일즈 비법이 성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 (농장이나 몇몇 불황 지역 외부에서의) 가난은 분명 무능, 무지 혹은 꽤 특별한 불행의 소산이며, 지역 자선단체에 의해 우선적으로 돌보아질 것이란 믿음, 자산을 “우량 채권”에 투자하면 차후 안정적인 수익이 보장된다거나, 현기증 날만큼 높은 확률로 주가가 오를 “미국 선도 기업”의 “우량주”에 투자한다는 믿음, 월스트리트의 대가들이 경제적 선지자이고, 경기 예측가들이 예측할 수 있으며, 경기순환이 질서정연한 리듬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미국 경제체제가 위대하고 고무적인 성장을 확신한다는 믿음, 잔해더미 속에서 이런 것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다 이 모두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 안에서 지위와 역할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그 중 한 가지 이상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는 충격은 두렵고 놀라운 것이었다. 한 개인으로서 무의식 중에 연봉과 직급으로 자신의 가치를 생각했는데, 결국 그 두 가지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기업체 간부의 자긍심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라. 수년간 그가 했던 조언들이 예상치 못한 전환에 의해 우스워지고, 그가 의지하며 살아온 행동규범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공격 당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은행가, “회사”에 모든 충성을 쏟았지만 결국 거리로 내던져진 사무원 및 노동자, “비올 때”를 대비해 10년, 20년간 저축했지만 모든 재산이 폭우에 휩쓸려가는 것을 바라만 보게 된 일가족, “좋은 것을 갖고,” 자녀에게 경제적, 사회적 “우선권”을 주려던 청사진이 이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것을 바라보는 주부, 인생의 매 단계마다 근면성실하면 당연히 풍성한 보상이 뒤따를 것으로 믿었지만 현실은 궁지에 몰린 신세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은 이제 무엇에 기대고,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러한 최악의 위기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위안과 감화에 귀의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쏟아지는 설교 가운데 성직자가 예언하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회는 국가나 주류 구성원들의 삶에서조차 차츰 중요성을 잃어갔으며, 그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242) ㅇ 여러 가지 사회적 구원론의 등장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며 의존하는 가치이고, 가장 깊이 추동하는 신념이자, 자기 존재의 중심이 되어줄 열망을 의미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종교라면, 대공황의 충격이 그런 종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1932년 암흑의 시기를 보내던 한 청년의 이런 말을 떠올린다. “만약 누군가 정말 믿을만한 것들을 가지고 나타난다면, 나는 어디든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따를 겁니다.” … 그 청년은 청교도적 도덕이나 기독교적 경건 따위가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정책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의 시대는 새로운 교리, 새로운 신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세속적이었다. 그 공통분모는 사회성이었다. 즉 성공, 정의, 자비에 대한 의지를 품었는지 여부와는 무관한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향한 움직임이었고, 그 구원이란 개인들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고 집단이나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이런 구원을 조직화된 행동을 통해 찾았다. 정치적 양상으로 이런 세속적 종교주의자들은 스펙트럼의 한 끝인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반대편 끝의 열렬한 자유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늘어서 있었다.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EPIC”, 휴이 롱(Huey Long)의 “부의 공유(Share-Our-Wealth)”, 코플린(Coughlin) 신부의 경제 프로그램, 타운센드 계획, 산업별 노동조합(CIO) 이 거기에 포함되며, 뉴딜 정책이 들어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 간의 전쟁이 격화되고 모든 전장이 좌경화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라면, 이어지는 장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일단은 사회적 구원에 관한 대개의 신흥 종교들이 뉴딜 허니문이 끝난 후까지도 최대의 팽창 잠재력을 모으지는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겠다. 어쩌면 허니문 기간 동안 뉴딜이 그들 모두를 삼켜버렸다거나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열정의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던 때는 이어지는 2-3년 간 정도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회적 구원론의 구체적인 진행양상에 대해서는 286-295페이지 참조)
7장 개혁 그리고 회복은?
뉴딜 정책 초기의 빠른 회복은 너무 급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복이 무너지자 허니문 기간도 끝났으며 뉴딜 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자동차법(automobile code) 서명에 반대하였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는 신문 전면 광고 면을 통해 국가산업부흥법을 “국가 사회주의의 수단”이며, “정치적 권리와 헌법상의 자유에 위협”으로 비난하였고, 전국부흥국(NRA)의 약어가 의미하는 바는 “회복불능국(No Recovery Allowed)”이라고 단언하였다.
고용주들은 법률의 근로 시간에 대한 조항을 피하기로 결의하면서, 단체 교섭권을 보장하는 부흥법 7a부분을 사문화 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이러 회사들은 있으나 마나 한 어용 노조를 열심히 설립하거나, 노조와 대화하지 않고 사측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법정을 이용하였다. … 7a조항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인 노동자들은 정부가 보장한 권리들을 위해 강력하게 파업하며 투쟁하였다. 산업 단지에서 피켓 라인을 따라 유혈 충돌과 최루탄에 흠뻑 젖은 성난 군중과 주 방위군의 투입 소식이 보도 되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자들도 뉴딜 정책에 반발했다. 그들은 루스벨트가 너무 느리게 움직이고 획기적인 해결책보다는 일시적인 처방만 제안한다고 비방하였다. 수 천명의 농부들은 농업조정법(AAA)의 실패로 농산물 가격 인상이 멀어지게 되어 분노하였으며, 무질서함이 옥수수와 밀 경작 지역의 고속도로를 따라 여전히 터져 나오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정부가 노조 설립과 실업구제 사업에 충분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었으나, 7a 조항의 집행에 무능력함과 고용주들에 의해 무력화된 전국부흥법 조항에 분노하였다.
(267) 뉴딜 금융 개혁을 둘러싸고 보수 지를 통해 울려 퍼진 월가의 격렬한 항의는 엄청났다. 증권거래법이 만약 통과되면, 투자 시장 유동성을 없애고 전반적인 경제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루즈벨트는 공산주의로 가는 대로를 달리고 있다! 윌리엄 워트 박사가 참석한 대통령 자문 위원회 파티에서 공무원들이 대통령이 새로운 미국 혁명을 위한 케렌스키(Aleksandr Feodorovich, 케렌스키(1881-1970):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역자 주) 일파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농무부 차관인 렉스포드 터그웰이 식품과 약품 광고를 제한하는 법안을 제안했을 때 매출 감소를 두려워하는 신문사주들에게 실제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보이지 않았는가? 정부는 공공사업체의 모든 투자자들을 파멸시킬 원하는 것 같았다. 정부는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he Tennessee Valley Authority (T.V.A.), 1933년 설립, 역자 주)는 남부 민간 기업들에 대한 경쟁력을 확대했다. 시 자체 전력과 전등 시스템을 갖추길 원했던 지장 자치 단체에 보조금을 지급했고 TVA로부터 전기를 공급 받았다. 공공전력이 공급될 수 있는 지역을 확대할 서부의 그랜드 쿨리(Grand Coulee)와 보네빌에 새로운 댐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주회사법을 통해서 힘없는 많은 지주회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있었다. 쟁점은 분명하다고 보수주의자들은 외쳤다. 경제독재 대 경제민주주의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 뉴딜주의자들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월가의 잘못된 경영은 상원 위원회 보고서들에 잘 나타나 있었다. 미국국민들은 그러한 구습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 뉴딜은 월가의 이기적인 이익에 대항하여 일반 시민을 지키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버블형성기와 시장의 붕괴가 진행되는 동안 월가의 금융업자들이 어떠한 불법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고 일반 개인투자자들에게 손실을 떠넘긴 정황이 상원의 조사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신문 일면을 장식하였다. 그로 인한 공공의 분노가 너무 높아서 뉴딜은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그로 인해 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개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1935년 사회보장법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실업 보험을 지급했고, 노년 지원을 위한 광대한 제도가 세워졌다. 임금소득세를 기반으로 거대한 기금을 조성하여 먼 미래에 노년 연금을 지불하게 하였다.
실업자 구제를 위해 토목사업국(CWA)을 설립했다가 비용이 과다 소요되어 폐지했음. 높은 실업 상태가 개선되지 않자 1935년초 공공사업촉진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을 다시 한 번 설립함.
(271) 연방구제기금의 운용 원칙은 훌륭했었다. 실제로 정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실업 상태에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극빈자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어떤 수치에도 처하면 안 된다.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불행한 경제 상황의 일시적인 희생자인 시민들이요 친구들로 여겨야 한다. 연방정부지원금을 받는 것이 사람의 존엄성을 낮게 한다는 후버 정부의 원칙을 따르기에 늦었고, 또한 지원금을 나눠 주는 것으로 만족할 때도 지나 갔다. 그들은 지급된 돈을 위해 일하기 원한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민간 부분과 겹치지 않는 좋은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 그들은 정부의 고용인이 되어 다시금 자신감을 찾아야 한다. 일자리를 주는 것이 지원금을 주는 것 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도 사기가 회복이 된다면 편익이 비용보다 클 것이다.”
토목사업국은 가장 왕성할 때 4백만명 이상을 고용하였음. 공공사업촉진국은 350만명을 고용할 목표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함.
가치 있고 민간부분과 겹치지 않고 수백만의 다양한 개인들의 능력과 경험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수혜 대상자는 민간 사업부분에서 일하거나 제조업 종사하거나 또는 경쟁 판매시스템을 세워서는 안되었다. 처음에 기금의 대부분은 농촌에서 도시로의 도로의 수리나 건설, 공공건물과 학교의 수리, 주차장과 놀이터의 건설과 같은 프로젝트에 쓰였다. 전문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와 같은 화이트 컬러 계층을 위해서는 정부나 대학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에 쓰였고,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다른 사람들을 교육시키도록 하는데 투자되었다. 어떤 일들은 단순하거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배치되거나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일하였다. 그래서 일자리를 주기 위한 불필요한 일이라거나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 들려왔다. 1935년 초 뉴욕 시의회의 심리에서 구제기금이 탭 댄스 교습이나 그림자인형극 공연에 사용된 것이 발견되었다. 간호학교, 유치원과 초등 과정에 있는 선생님들의 주된 비전문적인 흥미에 관한 연구와 지도식 초급 라틴어 서한문 강좌의 상호 효과성의 연구에도 사용되었다. … 보수 신문의 어느 곳에서건 구제 프로젝트의 의문시되는 가치를 언급할 때면 “쓸데없는 일(boondoggling)”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연방 구제 기금이 취한 모든 형태를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임시 수용소(Transient Camps), 전국청소년협회(NYA)와 공공사업촉진국의 잉여상품 구매에 대해서는 적어도 한마디는 언급되어야 한다. 임시수용소는 일자리를 찾아 여행하고 그들의 고향을 떠난 후에 정규 구제 기금 대상이 될 수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였다. 전국청소년협회(National Youth Administration, NYA)는 교육과 훈련기회 없이 지내는 젊은이들의 교육/훈련 기회를 위해 지불 보조하였다. 공공사업촉진국은 주로 농산품인 잉여 상품을 구매하여 곤궁한 사람들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공공사업촉진국에서 다리, 댐, 공공 건물등과 같은 큰 사업들을 건설한 것과 아직 행적적으로 연방 구제 프로그램이 아닐 때 구제 제도를 지원한 민간보존단(CCC)의 산림보호 사업은 잊혀질 수 없다.
(276) 두 번째는 그러한 구제 제도의 큰 비용이 사업이 흘러가게 하지만 임금노동자에게 부담된다는 것이다. 현재 세수를 넘어서는 비용이 정부 부채로 있는데 긴 기간 동안 임금노동자들의 부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인간 존중은 비싼 대가를 치렀다. 여기에 뉴딜의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었다. 이성적으로 충분히 1929-33년 대붕괴의 교훈을 적용하고 금융제도 개혁을 원했지만, 분명하게도 연방 감독 관료제도 설립 없이, 금융계에 끊임없는 규칙과 규제, 질의응답, 보고서, 투자설명서 작성의 끊임 없는 책무를 지움 없이, 그리고 회복을 지연시키는 이성적 비이성적 공포로 월가를 채움 없이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심각한 재정적자를 일으키고 쌓여가는 채무로 인해 무한정 계속해나갈 능력에 대해 자연스러운 우려와 다시금 회복을 더디게 하지 않고서는 실업자 문제를 인도적으로 해소할 수 없었다.
(296) 1935년 5월 27일 미합중국 대법원은 만장일치의 결정으로 전국부흥국(NRA)을 ‘위헌’이라 하여 무효화하였다. … 그 결정이 뜻하는 바는 연방정부가 개별 공장, 상점 또는 농장주들에게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강제함으로 국가 산업, 사회 또는 농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라는 것이었다. 법원의 법리에 따르면, 한 공장의 운영은 생산하는 원료가 다른 주에서 공급되었고 그 공장이 다른 주의 공장들과 경쟁하더라도 한 주 내의 운영이기 때문이었다. 상점의 운영도 다른 주에 본사를 둔 전국적인 체인망에 의해 운영되고, 다른 주에서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고 다른 주들의 경제 조건에 의해 수 백 가지 조건이 영향을 받더라도 주 내의 활동이었다. 작물의 재배도 성장 후 주간 유통되고 농부가 받는 가격은 전국 시장에 영향을 받더라도 주 내의 활동이었다. 헌법하에서 연방 정부는 주간 상업만 규제할 수 있고, 위와 같이 이런 것을 어느 것도 주간 상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법원은 No라고 말하였다. 심지어 국가적 위급 상황이라도 연방정부가 그것을 다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외적인 상황이 헌법적 힘을 창조하거나 확장시키지는 않는다” … 이에 대해 루스벨트는 “큰 쟁점은 이 결정은 미정부가 경제 문제 관련 어떠한 통제력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가?”라고 말하였다. 주간 경제법(ICC) 조문이 쓰여진 이래 국가 경제의 근본에 변화들과 그 조문을 엄격하게 해석한 초기 법원 시대 이래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오랜 분석을 한 후에, “우리가 주간 상업의 의미를 구시대로 되돌린 것이다”라고 다시금 말하였다. 국가적으로 결정해야 할 큰 문제가 제기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단 대법원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미국의 대공황 (from 만쭈리 블로그) (0) | 2017.04.04 |
---|---|
<<<Since Yesterday – 공황의 극복과정 2 >>> (0) | 2017.03.28 |
★★★★★<<<최고의 투자 상품은 절대 광고되지 않는다 >>>비공개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내부자 투자 행위는 합법 (0) | 2017.03.11 |
★★★★★<<<"2017년 주식의 해…4차 산업 대박주 발굴해야">>>반도체 등 IT업종이 (0) | 2017.03.10 |
★★★★<<<세계화로 인한 중산층의 자산 감소와 빈부격차 확대 과정 >>> (0) | 2017.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