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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미국 현지시각) 뉴욕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수락연설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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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설마 하던 일이 벌어졌다. 개표 결과 발표 직전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근소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고, 공화당 안에서도 그 자질을 의심받았던 트럼프가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모두 충격을 받았다. 힐러리를 좋아했던 사람들, 좋지는 않지만 트럼프 당선을 막기 위해 힐러리에 투표했던 사람들, 또한 트럼프에 투표했던 사람들까지 모두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했다.
주식시장이 출렁이고 다우존스 선물지수가 800포인트 가까이 폭락하기도 했다. 힐러리는 지지자들에게 트럼프에게 기회를 주라고 말했지만, 힐러리를 지지했던 아니 적어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던 미국 자유주의자 (혹은 리버럴)들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안정되지 않고 있다.
리버럴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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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쓴 <미국사 산책>16권에서는 '리버럴'이라는 개념에 대해 김지석씨의 글(2004)을 인용해 이렇게 밝힌다. "리버럴은 미국에서만 통용되는 용어. 말 그대로라면 '자유주의자'지만 유렵의 자유주의자와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진보 정치세력이 독자적인 정당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와 진보세력을 아우르는 개념이 리버럴이라고 보면 대체로 맞다. 그래서 리버럴을 진보자유주의자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그냥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알 수가 없다. 특히 경제적 자유주의자는 보수에 속한다. 보수는 우파(Right), 리버럴은 좌파(Left)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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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가지 않는 선거결과
소셜네트워킹 서비스, 미국 언론 등에서 보이는 미국 리버럴 들의 현재 반응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결과를 백인 저학력 저소득층의 반란으로 보는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과반을 넘고 경제상황이 상대적으로 호전되고 있던 상태에서, 왜 유권자들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었던 트럼프를 이토록 열렬히 지지했는지 의아해한다.
지난 세 차례 TV 토론회에서 트럼프가 보여줬던 태도는 이러한 유권자들의 생각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실수가 난무하고 역대 토론회 중 가장 치졸하고 더러운 토론회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트럼프는 유권자들에게 그의 자질을 증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이메일 스캔들 재조사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힐러리의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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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트 트럼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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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좌파, 리무진 리버럴
미국의 리버럴을 흔히 보수진영에서는 '샴페인 좌파', '혹은 리무진 리버럴'이라 부른다. 한국의 강남좌파와 같은 개념으로 주로 보수진영에서 고소득, 고학력 화이트칼라 민주당 지지자들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쓰인다. 보수진영의 이러한 공격은 사실 악의적인 것이고, 미국의 리버럴들이 공화당의 슈퍼리치 지지자들처럼 부자도 아니다.
주로 사회적으로는 중상층, 교육수준은 대학 졸업 이상의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에 따라 민주당을 지지한다. 이는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며 오히려 전 세계적 현상에 가깝다. 하지만 저학력 저소득 공화당 지지층 입장에서는 큰 주택과 여러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좋은 학군에 거주하며,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반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무지개 연대 vs 백인 연대
이러한 미국 리버럴들의 큰 특징은 사회적 이슈, 특히 소수민족, 성소수자, 여성, 환경 등의 이슈에 있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바마를 두 번이나 당선시킨 집단이 바로 이러한 미국의 리버럴과 소수집단의 연대, 즉 무지개 연대다.
그들은 유전자 조작 식품, 원자력 발전, 화석연료 자동차 등에 반대하여 직접 지역 농장에서 생산된 유기농 제품을 소비하고, 하이브리드 혹은 전기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을 권장하며 대체 에너지 개발을 적극 지지한다. 이런 모습들이 사회적 진보에 영향을 주고 우리 사회를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에 서 있는 저학력 저소득의 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한 번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그들은 리무진 리버럴들이 생활 속에 실천하고 있는 이러한 행동들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지역 농장의 유기농 식품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대량생산된 식품에 비해 가격이 높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이브리드나 전기자동차는 일반 가솔린 자동차에 비해 20% 정도 가격이 높고, 원자력 발전을 통해 생산된 가격이 싼 전기 덕분에 마음 놓고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때때로 리버럴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우월감은 저소득 백인들의 반감을 더욱 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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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50개 주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렸다고 보도하는 CNN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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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슈 vs. 사회이슈
리버럴들이 다양한 사회이슈로 눈을 돌리면서 상대적으로 경제이슈에 대해서는 관심이 줄어드는 듯하다. 비록 그들이 월가를 비판하고 대기업의 전횡에 반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월가나 대기업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많은 돈을 들여 명문대학에 자녀를 보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승계하고 이러다 보니 소위 기층 민중이라 할 수 있는 저소득 백인 계층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교육열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경제 이슈에 대한 대안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흔히 볼 수 있는 그들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대안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덜 먹고 절약하여 환경을 지키고 대기업의 전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경제문제를 도덕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끝내는 민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저소득 백인들은 그런 걸로 계몽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낼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해 줄 수 없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월가나 대기업에 일하게 하기도 힘들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본성을 억제하기에는 그들의 삶은 너무 고달픈 것이다. 이러다 보니 리버럴들이 이야기하는 소수자 보호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삶이 피폐해진 원인을 외부에서, 특히 소위 '재수 없는' 리버럴들이 보호해주는 소수자들에게 돌리는 것이다.
리무진 리버럴의 종말
트럼프의 선거전략은 이러한 저소득 백인들의 사회적 반감에 편승하여 그들이 차마 사회에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이었다.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를 공격하고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그들의 힘을 보여주라는 메시지가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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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당선 소식에 환호하는 지지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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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흑인 대통령에 대한 은근한 반감은 저학력 백인뿐만 아니라 고학력 백인들에게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백인들의 연대도 이뤄지면서 다수를 점할 수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앞으로도 같은 결과, 즉 다수의 연대를 통해 소수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통한 대중영합주의자의 당선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리무진 리버럴은 이제 더 이상 효과가 없다. 저학력 저소득 백인 계층은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트럼프의 성공은 앞으로도 이러한 정치인이 계속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리버럴들이 사회이슈의 제기를 통해 미국사회 발전에 기여한 바는 상당히 크다. 하지만 이제 다시 경제적 이슈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줄 포퓰리즘적 정책은 아마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리버럴들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만일 기층 민중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수 있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김원용씨는 미국 미네아폴리스 소재 Augsburg College 에서 경영학과 재무전공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