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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잘 먹는 비결은…, 나이 든다는 건 죄도, 벼슬도 아니야 >>>

문화·패선·취미·노후

by 21세기 나의조국 2016. 1. 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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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잘 먹는 비결은…

기사입력 2016-01-07 11:05

[한겨레]

 

“스리, 투, 원, 제로! 해피 뉴 이어~.” 도쿄 신주쿠의 어느 허름하고 좁아터진 클럽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흑인, 백인, 동양인들과 잔을 부딪히며 나이 한살을 더 먹었습니다. 서른을 넘기고 언젠가부터 새해를 집에서 조용히 맞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이렇게 글로벌하게 카운트다운을 하며 마흔네살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순전히 죽마고우와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 때문이었습니다.

 


10대 때는 어서 스무살이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생이,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지요. 20대 때는 서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불안하고 가난하고 불투명한 터널을 어서 통과하고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한몫했지 싶습니다. 30대 때는 마흔이 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진짜 어른이 아님을 깨닫고는 ‘불혹’(不惑)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불혹을 넘긴 지 몇년 된 지금도 ‘불같은 유혹’에 새털처럼 흔들리긴 하지만요.

 



40대 초반, 쉰이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세월이 딱 멎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4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고, 지금껏 경험에 따르면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50대에 진입하겠죠. 쉰이 되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입니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희끗한 머리, 적당한 주름, 희미한 연륜의 향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꽤나 멋진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회사 승강기에서 이런 글을 봤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안 노는 게 아니다. 놀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무릎을 쳤습니다. 이젠 이런 말을 하고 싶군요.

 

“놀면서 나이 들자.”  나이는 나이대로 먹고도 늘 즐겁게 노는 것,

 

그게 나이를 잘 먹는 비결 아닐까요?

 

2016년 올 한 해도
esc와 함께 신나게 놀아봅시다.

 



서정민 esc팀장 westmin@hani.co.kr

 

 

 

나이 든다는 건 죄도, 벼슬도 아니야

기사입력 2016-01-07 11:05

 

[한겨레]

 

우아하게 나이 먹기
마흔살의 내가 스무살과 예순살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본 ‘우아하게 나이 먹기’

 



 

나이듦은 누구나 겪는 과정이니, 외면의 ‘안티 에이징’에 공을 들이는 만큼 나이 드는 과정 자체에 충실해야 제 나이에 걸맞게 책임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왼쪽부터 <한겨레> 편집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동석씨, 서정민 esc팀장, 강재훈 선임기자가 각각 20대, 40대, 60대의 이미지를 연출해 나이드는 과정을 표현했다. 모델의 실제 나이와 표현한 나이는 무관하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새해다. 또 한살 먹었다. 화장품 업체들은 ‘나이 앞에 당당해지라’며 젊어 보이게 해준다는 제품을 광고하고, 주부 대상 아침 토크쇼나 연예인 인터뷰 프로그램에선 온갖 ‘동안 비결’이 화면을 채운다. 나이 먹는 건 죄가 아니라 순리인데, 왜들 이렇게 호들갑일까.

 

어려 보이는 것도 좋지만, 그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만큼 제 나이에 걸맞게 숙성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 마음을 기울여본다면 삶이 조금은 더 충만해질 텐데 말이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웠든 아직 못 세웠든, ‘우아하게 나이 먹기’를 다짐해보는 건 어떨까? 가상의 ‘마흔살의 나’가 ‘스무살의 나’와 ‘예순살의 나’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빌려 ‘나잇값’ 하며 사는 길을 모색해봤다.



스무살의 나에게

 


마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나이. ‘불혹’이 아니라 ‘부록’이 되는 나이라고 한탄하는 어떤 선배를 “늙었다”고 놀려먹을 때만 해도 마흔이 이리도 쉽게 내게 다가올 줄은 몰랐어. 고작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뿐인데도 ‘아…, 이제 나이가 드는구나’ 애늙은이처럼 굴던 그땐 새치도, 주름도, ‘제 얼굴에 책임져야 하는 나이’라는 말의 뜻도 알 수 없었지.

 



이십대 중반에 읽었던 <열정과 불안>이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와. “유 선생, 얼마 안 있으면 마흔 되지? 마흔 넘으면 성장기 트라우마를 졸업해야 해. 부모에 대해서나 성장기의 좋고 나쁜 경험에 대해서나, 더이상 그걸 끌고 갈 수 없는 나이야.” 지은이 조선희는 “그것들을 모두 토해놓고 나니 이제 비로소 내가 안전하게 40대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작가의 말을 남겼고. 그 문장들을 읽은 뒤로 나는 서른살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 그때 내가 경험하던 혼돈, 불안, 고통이 30대가 된다고 해서 해결되거나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됐거든.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어.

 



스무살. 넌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미숙하고 서툴렀지. 왜 아니겠어. 공부만 하면 되는 학생으로 12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 됐으니 말야. 뭐가 될지도 모르겠고, 과연 제 손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가족과 주변을 챙기며 ‘사람 구실’을 얼마나 잘해낼지도 모르겠고,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저렇게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삶을 살아낸다는 건 교과서 달달 외워 정답을 맞히는 시험이 아니기에, 경험도 지혜도 모자란 네게 세상이 온통 모르겠는 것투성이였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야.

 



그래서 난, 시간을 되돌려 다시 스무살이 되기를 바라지 않아. 다시 그 미숙하고 불안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지금이 완전해서가 아니야. 이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건 없고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어서 나는 마흔이 된 지금도 여전히 무릎이 꺾이는 날이 있고, 가슴속에 바람이 불어 휘청대는 날이 있어. 하지만 너와는 달리 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문제에 닥쳤다면 우선 그 문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아. 당장 괴롭고 아프다고 외면하고 회피할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와 ‘대화할 용기’를 내야 근본적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걸 알아.

 



그걸 알 수 있게 된 건 다 네 덕분이지. 네가 했던 실수, 네가 겪은 고통, 네가 살아낸 시간들이 쌓인 게 지금의 나잖아. 넌 길을 찾지 못할 땐 주저앉아 운 뒤에 다시 걸었고, 그 길 끝이 가로막혀 되돌아와야 할 땐 자책하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 걸었지. 그렇게 울면서도 계속 걸을 용기를 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네가,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한 작가가 그랬어. “고통이 쌓인다고 지혜가 되는 건 아니에요. 고통 속에서도 용기를 내 한 발자국씩 디뎌나갈 때 자신감이 쌓이고 삶의 지혜와 통찰이 생겨요.” 맞는 말 같아. 외로웠지? 무서웠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용기를 낸 네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싶어. 잘했어, 고마워.

 



네가 했던 실수, 네가 겪은 고통
그것들이 쌓여 오늘의 내가 됐어
예순의 너는 ‘꼰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이였으면 해




예순살의 나에게

 


예순은 어떤 모습일까. 건강하게 지내려고 나쁜 음식 덜 먹고, 운동을 자주 하려 애쓰겠지만, 천천히, 다리를 지탱하는 근육은 빠져나갈 테지. 기억력이 나빠져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 같은 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매일 보는 사람의 이름까지 퍼뜩 떠오르지 않아 당황해할지도 몰라. 이미 ‘살아낸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완전하게 느끼고 쓸쓸해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예순은, ‘진짜 어른’으로 살면서, 지나온 삶을 정리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아. 인생은 60부터라지만, 내 천명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이듦이 곧 성숙해짐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야.

 



얼마 전에 <케이팝스타5>를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졌어. 사전 트레이닝 때 한 출연자의 자작곡을 “난해하다”고 혹평했던 유희열이 본경연 때 그 노래를 다시 듣고는 “미안하다. 내가 잘못한 것 같다”고 사과하는 장면이었어. 박진영이나 양현석이 다그치거나 몰아세운 출연자를 편들어주고 보듬어주는 역할을 주로 하는 유희열이었기에 우선 그의 혹평이 낯설었고, 그담엔 수정 없이 원래대로 다시 부른 노래를 들은 그가 화를 낼지 욕을 할지 궁금했었어.

 

그런데 그는 곧바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뭐야. 놀랐어. 방송에서,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연륜이 모자란 후배이자 자신이 평가하는 대상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자신감 있고 솔직한 ‘진짜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살아봐서 아는데, 해봐서 아는데, 내가 옳다, 나만 옳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결혼 안 하니, 애는 안 낳니, 남의 삶에 하등 쓸모없는 오지랖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나이가 벼슬인 줄 아는 ‘꼰대’가 아니라,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는 사람, 언제든 누구에게든 배울 자세를 갖춘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이미 지나가버린 청춘을 한탄하거나, 옛날이 좋았다고 추억 타령 하는 대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됨으로써 스스로 가치있는 사람임을 느꼈으면 해.

 



나는 네가 다름과 틀림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만, 네 기준과 다른 사람도 포용할 줄 알았으면 해. 그러려면 우리 편이니까 또는 대의를 위해 ‘작은 잘못’을 덮자는 주장엔 반대해도, ‘속사포 랩’을 하거나 등짝에 용을 그렸다고 “저게 뭐 하는 짓이냐”며 혀를 끌끌 차선 안 되는 거야. 살아온 날들의 지혜를 모아, 틀린 사람에겐 단호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너그러워야 하는 거지.

 



그러려면 지금이 중요한 것 같아.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니까.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식으로는 더는 성숙해지기 어려울 거야. 마흔이 되기까지의 삶이 ‘성장기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부터의 삶은 오롯이 ‘나’라는 사람을 다듬어 완성해가는 과정이어야 하겠지. 나를 소모시키기만 하는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을 짓누르는 일을 끊어내야 하는 거야.

 


삶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워. 앞으로 또 20년을 살아내는 동안 어떤 돌멩이가 날아들지, 얼마나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칠지 알 수 없지.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작년보다, 어제보다 성숙해진다는 거니까 스무살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좀더 잘 걸어갈 수 있겠지. 비틀거리면서도 한발한발 걸어온 지난 20년처럼, 앞으로 20년도 난 용기내 걸어볼 테야. 기억해, 유토피아는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거야.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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