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서천 무형문화재복합전수관 내부에 전시돼 있는 한산 소곡주. 충남 서천 무형문화재복합전수관에서는 소곡주 제조 과정과 옛 건축 도구들을 살펴볼 수 있다. | |
ⓒ 연합뉴스 |
개인적인 인연부터 풀어놓자면, 내가 처음 취재라는 핑계로 맛보았던 술이 소곡주였다. 16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 맛보았던 술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 머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코와 혀가 기억한다. 찬 바람 속에서 소곡주를 한 잔 들이켜면, 그날 그 순간에 느꼈던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그리고 연기처럼 매움하게 번지는 맛이 마치 연인의 손처럼 따듯하게 전해온다.
소곡주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이름난 술이다. 한산은 모시로도 유명한 마을이다. 한산 모시를 삼는 아낙들의 손끝에서 빚어지고 있는 술이 소곡주다. 16년 전에는 집집마다 조금씩 소곡주를 빚고 있긴 했지만, 소곡주 면허를 낸 곳은 한산에서 오직 우희열 명인 혼자였다.
지금도 집집마다 소곡주를 빚는 관습은 이어져 오고 있지만, 술 빚는 양상은 사뭇 달라졌다. 소곡주라는 이름으로 양조 면허를 내고, 술을 빚는 곳이 2015년 10월을 기준으로 47곳이나 되었다. 바야흐로 한산은 한국판 코냑이나 마오타이와 같은 지방이 되어 가고 있다.
물을 타지 않은 술... 독하지만 꾸밈없다
한산 소곡주는 2013년에 특허청으로부터 지리적표시단체표장 등록을 받았다. 유사 상품이나 허위 표시제 등 상품 명칭 침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수단으로, 앞으로 한산 소곡주라는 상표는 서천군 한산면과 이웃한 화양면, 마산면, 기산면 지역에서 빚는 소곡주에 한해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산 소곡주는 많은 매력을 지녔다. 소곡주의 근원은 오래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 관련 책인 <산가요록>(1450년대 전순의 집필)과 한글로 적힌 가장 오래된 음식 책인 <음식디미방>(1670년경 장계향 집필)에 모두 소곡주가 등장한다. 두 책 사이에는 200년이라는 간격이 있고, 한양과 경북 영양이라는 지리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제조법과 원료의 비율이 같다. 소곡주 제조법이 조선 시대에 폭넓게 공유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소곡주를 맛본다면, 당신은 조선 시대에 살았던 선비들이 어떤 술을 맛보았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산 소곡주의 또 다른 매력은 물을 타지 않고 원주 그대로 상품화시킨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18도에서 16도로 높아 진하고 독하지만, 꾸밈없는 술맛을 느낄 수 있다.
가내 수공업의 규모로 소량 생산하기 때문에 살균하지 않은 생주로 유통되는 소곡주들이 많아, 맛과 향이 풍부한 발효주의 특징을 맛볼 수 있다. 게다가 감미하지 않아서 곡물의 두툼한 단맛과 누룩의 은은한 향을 까다롭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새롭게 생긴 직업군, '농민 양조업자'
▲ 제1회 소곡주축제에서 진행된 소곡주 품평회 당시 모습. | |
ⓒ 허시명 |
올해는 소곡주 양조인들이 함께 모여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한산읍내 장터에서 제1회 한산 소곡주 축제까지 열었다. 참가자들은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시음 잔 하나를 받고, 출품된 소곡주 42개를 모두 맛볼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
그날 만난 소곡주 제조자들을 보니, 평범하고 투박한 농민이자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다. 자본이 있어서, 권력이 있어서, 사업 수완이 좋아서 양조장을 차린 이들이 아니었다. 한산 땅에서 나고 자라 농사를 짓고 살지만, 그 농사지은 것만으로는 자식 교육을 시킬 수 없어서 모시 삼듯이 소곡주를 빚는 이들이었다.
소곡주로 하여 한산에서는 새로운 직업군이 등장했다. 쌀농사 짓고, 그 쌀로 술 빚는 '농민 양조업자'라는 직업군이다. 술에 취해 앉은뱅이가 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 술을 통해서 전통과 만나고 지역도 알리는 일이 충청남도 서천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 소곡주 품평회에서 상을 받은 입상자들. | |
ⓒ 허시명 |